'쁘띠 마망' 역할놀이와 역할naughty
'쁘띠 마망' 역할놀이와 역할naughty
  • 배명현
  • 승인 2021.10.23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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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가 아니었으면 하는 허구"
ⓒ 찬란

1. 놀이

'넬리'(조세핀 산스)는 할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넬리는 할머니의 유품인 지팡이를 챙긴다. 그리고 할머니의 집으로 향한다. 물론 이때 가족이 함께 넬리를 데리고 가는 것이지, 넬리가 할머니의 집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다. 넬리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그것이 '아이'이다. 아이에게는 자신이 어디를 가야 하는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권한이 없다. 아이는 보호받아야 할 존재 그 이상, 그러니까 능력의 부재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그 혹은 그녀라는 대명사가 어색한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그(녀)가 가리키는 것이 젠더만이 아닌, 하나의 완성된 개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할 때, 아이는 그 논리 밖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영화에서 주인공을 '아이'로 상정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하지만 아이들이 거의 유일하게 자유로워지는 순간이 있다. 바로 놀 때이다. 아이들은 현재 여기에 없는 것을 상상해내고, 없다는 것의 한계를 상상으로 있게 만들어낸다. 심지어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눈앞에 있는 것들로 한계를 만들어내지 않고 그 벽을 넘는다. 넬리가 할머니네 집 근처에서 만나 '마리옹'(가브리엘 산스)은 놀이를 시작한다. 역할놀이로 그들은 자신을 형사로, 공작부인으로 재구성해낸다. 멋진 넥타이를 목에 걸고, 묵주를 목에 걸고. 이들은 자신의 역할에 적극적으로 이입한다. 그리고 모든 상황이 이 이입을 도와준다. 넬리의 엄마 마리옹과 같은 이름을 가진 마리옹 그리고 두 마리옹의 엄마는 다리가 불편하다. 심지어 마리옹(둘 다)은 수술을 어렸을 때 했고-해야 한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넬리와 마리옹 이 둘은, 너무나 닮았다.

 

ⓒ 찬란

넬리는 조심스럽게 말한다. 이건 너의 비밀이자 나의 비밀이야. 자신이 마리옹의 딸임을 고백한다. 중요한 건 이 고백이 진실인지 아닌지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영화가 진짜 SF 내지는 환상 영화인지 아닌지에 대한 이야기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때문에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이 두 아이의 '놀이'이다. 그리고 이 놀이로써 형성되는 유대 내지는 관계-망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해보자. 아이들은 관계를 놀이로 배운다. 나와 타인 그리고 그 관계망이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지는가. 그렇기에 이 놀이는 사회화라고 불릴 수도 있고 자기학습이라고 불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두 아이의 놀이는 조금 다르다. 서로 간의 역할이 있고 그 역할에 충실하게 수행을 하지만, 이 두 아이의 놀이 사이에는 현실이 틈입해 들어온다. 일반적인 아이들의 놀이에는 현실이 배제되어있지만, 이 두 아이의 놀이는 현실이 '끼어듦'으로써 고유해지고 특별해진다. 때문에 이 두 아이만이 행할 수 있는 고유한 놀이는 즐겁다. 함께 오두막을 만들고 내리는 빗속을 달리며, 수프를 먹고 크레이프를 만든다. 천진한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습기를 가득 먹은 해변을 걷는 듯 물렁물렁해지고 평온해진다. 다만, 이 놀이가 단지 역할 수행으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이 이야기를 성립하게 만드는 두 가지가 이 영화를 더욱더 근사하게 해준다.

 

2. 애도

프로이트는 '애도'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상실에 대한 반응으로 규정한다. 그러면서 이 상실된 대상을 향하던 리비도를 다른 대상에게 전위되어야 한다고 애도가 완료된다고 말했다. 그의 제자 자크 라캉은 죽음을 생물학적 죽음과 상징적 죽음으로 구분하였다. 유기체가 죽으면 유령이 태어나는데, 이 유령은 세계를 활보하며 공백의 기로로서 죄책감을 자아낸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죄책감을 벗어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라캉은 상징적인 표상을 도입해 유령에게 죽음을 고해야 한다고 했다. 이를테면 제사와 같은 행위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유령에게 사로잡혀 자기처벌을 특징으로 하는 우울함에 빠지게 된다고 했다.

 

ⓒ 찬란

이러한 과정이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잘 드러난다. 클로디우스는 햄릿의 아버지를 살해한 뒤 애도를 금한다. 그리고 햄릿은 유령에게 홀리고 만다. 그 뒤 우리가 아는 비극이 일어나고 만다. 햄릿에게는 애도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고 능력이 거세되어 있었다. 그는 유령에게 죽음을 고하지 못했고 우울함에 빠지고 만다. 그 뒤 우리가 잘 알 듯, 비극이 시작된다. 완성되지 못한 애도는 비극을 불러온다. 어쩌면, 햄릿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애도를 완성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의 넬리는 어떠한가. 영화 시작에서 넬리가 손에 잡은 지팡이를 다시 떠올려보자. 작별 인사를 하지 못했다고 슬퍼하는 넬리는 할머니의 집에서 어떤 대상들을 만난다. 그 대상들은 자신의 엄마와 할머니(혹은 그렇게 이입할 수 있는 기묘한 대상)이다. 그들과 쌓은 하나의 관계내지는 역할 놀이는 세계를 이해하게 하는 동시에 애도를 완성하게 한다. 이 행위는 어린이의 방식으로 안녕을 말하는 제의로 보인다. 넬리는 적극적인 인사로 작별을 고한다. 영화가 끝나도 우리가 안심할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녀는 이제 포근하고 안온한 자리를 깔고 앉아있다. 유령이 나타나지도 우울함이 덮쳐오지도 않을 것이다.

 

3. 놀이-술래

넬리는 아빠에게 '오두막'에 대해 질문한다. 아마 영화 초반부 내용에 한정해 추론해본다면 아마 엄마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만든 오두막에 대해 이야기했을 것이고 함께 만든 사람은 아마도 아빠였다고 말했을 것이다. 여기서 넬리는 의미심장한 대사 하나를 던진다.

"아빠는 기억을 못 하는 게 아니라, 듣지 않은 거야" 아빠는 웃으며 그렇다고 말한다.

 

ⓒ 찬란

<쁘띠 마망>을 다 본 우리는 다시 생각한다. 그렇다면 아빠가 아니라 넬리와 오두막을 지었던 거였구나. 하지만 과연 그런가? 그렇다면 이 영화는 정말 넬리가 과거로 돌아간 혹은 그저 판타지스러운 영화였던가?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이 영화가 근사해지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명백하게 구획해놓지 않은 것. 셀린 시아마 감독은 영화를 이 두 아이의 역할 놀이로 한정 지어 놓지 않았다. 영화 밖에 있는 관객을 적극적으로 스크린 밖 '술래'로 임명한 뒤, 이 놀이에 참여하게 만들어 놓았다. 이것이 이 영화를 더욱 근사하게 만들어주는 지점이다.

<쁘띠 마망>은 관객을 스크린 밖에 있는 존재로 상정하는 동시에 그 안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관객의 참여는 영화 안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없지만, 이 영화는 관객의 내면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대부분의 영화는 보편적인 감정을 경유해 관객 안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몇몇 영화는 감정의 탈을 쓴 논리가 관객의 폐부로 잠입해 들어간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이 영화를 관객에게 몰래 보내는 편지처럼 설계해 놓았다. 아니, 어쩌면 철저한 계획 아래에 스파이-놀이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고 있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놀이에서 술래는 관객이겠지만.

 

4. 다시 영화로

<쁘띠 마망>이 끝난 후 아이 둘은 어떻게 됐을까? 마리옹은 스크린 바깥으로 나간다. 자신의 발로 직접 걸어 나간다. 아이가 수술(통과의례)을 받기 위해 직접 어른의 길로 나간다. 아직 넬리는 아니다. 놀이를 마친 넬리는 여전히 아이인 채로 남아있다. 하지만 아직 놀이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어른 마리옹이 사과를 하기 전까지 이 놀이는 계속된다. 그리고 마침내 사과를 했을 때, 넬리는 그녀의 이름을 불러준다. 그리고 마리옹은 그에 대한 화답으로 넬리의 이름을 불러준다. 어른-아이라는 관계가 완벽하게 동등해지는 순간을 영화는 포착한다. 아니, 이 순간을 포옹한다. 따듯한 품이 주는 이 순간, 영화의 놀이는 그야말로 근사해진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 찬란

쁘띠 마망
Petite Maman
감독
셀린 시아마
Celine Sciamma

 

출연
조세핀 산스
Josephine Sanz
가브리엘 산스Gabrielle Sanz
니나 뫼리스Nina Meurisse
마고 아바스칼Margot Abascal

 

배급|수입 찬란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72분
등급 전체관람가
개봉 2021.10.07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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