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 오브 투 러버스' 생략과 과잉이 말하는 진실
'킬링 오브 투 러버스' 생략과 과잉이 말하는 진실
  • 김민세
  • 승인 2021.10.21 12: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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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일상의 불쾌한 소리들이 기타 반주로 변화하기까지"

올해 5월, 크리스토퍼 니코우의 <애플>(2020)을 보고 예상치 못한 것에 당혹감을 느낀 적이 있었다. 4:3의 스탠다드 화면비로 촬영된 영화는 좌우로 압축되어 있는 듯한 화면비를 통해 기억상실이라는 영화의 주제를 드러내려 하는 것 같았다. 횡의 방향으로 넓어진 와이드스크린과 시네마스코프가 주를 이루고 있는 현대의 영화들 속에서 만들어지는 스탠다드 화면비의 영화들은 좌우가 생략된 이미지로서 존재한다는 시각적 인상을 남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이러한 생각에 반문하는 듯한 이미지가 존재한다. 주인공 알리스(아리스 세르베탈리스)가 비스듬히 카메라 쪽으로 걸어 나올 때, 알리스의 머리 위로 만들어지는 커다란 공백이 프레임 전체를 차지한다. 그 순간 스탠다드 화면비의 이미지는 더 이상 좌우로 잘린 것이 아니라 상하로 확장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생략된 이미지에서 확장된 이미지로의 전환. 그래서 가끔 이 영화를 생각할 때면 서사와는 상관없는 그 뜬금없는 이미지가 제일 먼저 떠오르곤 한다.

스탠다드 화면비로 촬영된 <킬링 오브 투 러버스>(2020)는 <애플>에서 볼 수 있었던 화면비가 가진 생략과 확장의 가능성으로 서 있는 영화다. 주로 측면 샷으로 촬영된 데이빗(클레인 크로포드)의 운전 장면들은 좌우가 생략되어 데이빗의 옆얼굴과 창문틀 안에 들어오는 것만을 보게 한다. 영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롱테이크 롱 숏(혹은 익스트림 롱 숏)의 장면들은 상하로 확장되어 광활한 원경의 자연풍경, 그곳에 놓인 땅과 길, 그 위에 서있는 사람들을 보게 한다. 생략된 이미지와 확장된 이미지. 전자는 그 좁은 화면을 통해서 데이빗의 불안과 분노의 심리를 외면화하거나, 그 정서에 매몰되어 다른 것을 볼 수 없는 그의 시선을 경유한다. 후자는 절실한 움직임들을 지속하는 데이빗을 멀찍이 떨어져서 대상으로 상정한 후에 거대한 세상 속에 서있는 무력한 존재로 만든다.

 

ⓒ (주)영화특별시SMC
ⓒ (주)영화특별시SMC

그런 의미에서 <킬링 오브 투 러버스>의 두 가지 이미지의 틀은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덜 보여주려 하거나, 더 보여주려 한다. 이는 영화가 서사를 이어나가는 방식과도 일맥상통한다. 영화는 분노에 찬 데이빗의 얼굴, 그가 바라보고 있는 니키(세피데 모아피)와 데릭(크리스 코이), 돌연 데이빗의 손에 들려 있는 총이라는 세 컷의 이미지로 시작한다. 그 세 이미지는 데이빗의 아내 니키가 외도를 하고 있다는 상황을 가장 간결하고 명확하게 설명함과 동시에, 우리를 서사의 시작이 아닌 서사의 중심이라는 자리에 데려다 놓는다. 그리고 전사를 생략해버린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이미지는 창문으로 집에서 나와 도로 위를 한없이 달리는 데이빗의 뒷모습이다. 이 장면은 그 어떠한 변주 없이 몇 분 동안 지속된다. 보고 싶지 않은, 혹은 볼 필요 없다고 생각되는 시간의 반복. 서사의 지연. 시간의 과잉. 영화가 덜 말하려 하는 중심의 서사와 더 말하려는 주변의 서사.

그렇다면 <킬링 오브 투 러버스>는 왜 생략과 과잉을 통해 시각화하고 스토리텔링 하려 하는 것일까. 고전적 영화가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적절한 시각화와 적절한 스토리텔링은 왜 이 영화의 관심사에서 벗어날까. 그건 아마 영화가 데이빗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데이빗의 정서를 따라가기 때문이다. 그는 니키와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해 정서를 덜 드러내고 (화를 참고), 결국은 쌓인 정서를 터뜨린다 (아내와 말다툼을 한다). 사실 그의 그런 행동이 마냥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그가 중용의 태도로 자신의 정서를 다스리고 니키를 설득했다면, 그는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었을까. 그가 데릭과 말싸움을 벌이다가 얼굴을 가격당하지 않았다면 문제는 해결될 수 있었을까. 영화는 이성이라는 중용의 태도에서 미끄러지는 인물이 진심을 전할 수 있다고,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애플>의 좌우로 잘린 이미지가, 종의 방향으로 생긴 커다란 공백이 알리스의 정서를 제일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 (주)영화특별시SMC
ⓒ (주)영화특별시SMC

마지막으로 영화 내에서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던 두 장면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 장면. 데이빗은 새벽 2시에 자신의 아이들이 살고 있는 집에 찾아온다. 그는 집 밖에서 창문 너머로 자고 있는 아이들을 부르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코미디언의 농담을 해준다. 비몽사몽 한 상태에서 데이빗의 뜬금없는 농담을 들은 아이들은 재미없다며 눈을 비빈다. 그리고 왜 하필 재미없는 농담을 하냐고 단정 지어 말한다. 두 번째 장면. 데이빗과 니키가 도로 한복판에서 말다툼을 할 때, 그들이 함께 살던 집에서 데릭이 나온다. 데이빗은 자신이 살던 집에서 데릭이 나오는 것을 못마땅해하며 소리를 질러대며 그의 심기를 건드린다. 그리고 데릭이 니키에게 말한다. "대화로 해결할게." 그 말을 듣고 니키가 잠깐 자리를 비우자 데릭은 더 이상 아무 대화도 나누고 싶지 않다는 데이빗에게 린치를 가한다.

앞서 말한 두 장면은 왠지 모를 이상한 처연함을 느끼게 한다. 무언가를 말했지만 상대방에게 거부된다. 서로 충돌하는 관계들 속에서 대화는 어긋나고 그러한 상황은 결국 누군가의 폭력으로 일단락된다. 대화로 해결하려 하지만 대화로 해결되지 않는다. 즉 가족들에게 돌아가기 위한, 니키를 설득하기 위한 데이빗의 절실한 발화는 의미와 상호작용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증발해버린다. <킬링 오브 투 러버스>에서 대화라는 의미론적 기호들은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한 채 서로 미끄러지고 만다. 이를 증명하듯 자신의 상황과 입장을 대변하는 것 같은 데이빗의 노랫말을 듣고 니키는 이런 말을 한다. "다음에는 반주가 있어야 할 것 같아."

<킬링 오브 투 러버스>의 반주자는 누구인가. 영화는 시종일관 차의 엔진 소리와 차문을 닫는 폴리와 가까운 사운드들로 만들어진 OST와 함께 진행된다. 한마디로 데이빗의 행위(발화)에 반주를 맡을 자는 없다. 아무도 편을 들어주지 않는 그의 삶에 반주로 존재하는 것은 의미 없고 신경증적인 일상의 불쾌한 사운드들이다. 반면 엔딩 크레딧과 함께 흐르는 그의 노랫말에는 기타 반주가 함께한다. 일방적인 발화에서 상호적이고 조화로운 예술로의 전환. 반주 없이 불리던 구슬프고 우울한 것만 같던 노래는 반주와 함께 희망차게 들리기 시작한다.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그 기타는 아마 니키와 그의 아이들이 들고 있을 것이다.

[글 김민세, minsemunji@ccoart.com]

 

ⓒ (주)영화특별시SMC

킬링 오브 투 러버스
The Killing of Two Lovers
감독
로버트 맥호이안
Robert Machoian

 

출연
로버트 매코이언
Robert Machoian
클레인 크로포드Clayne Crawford
세피데 모아피Sepideh Moafi
크리스 코이Chris Coy
바바라 휘너리Barbara Whinnery
아리 그레이엄Arri Graham
에즈라 그레이엄Ezra Graham

 

수입 블루라벨픽쳐스
배급 영화특별시SMC
제작연도 2020
상영시간 84분
등급 12세이상 관람가
개봉 2021.10.14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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