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올로 소렌티노] '그때 그들' 일상을 구원하는 것
[파올로 소렌티노] '그때 그들' 일상을 구원하는 것
  • 이현동
  • 승인 2021.10.2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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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는 세월이 지나 의미가 되는 것인가"

파올로 소렌티노의 인생 3부작인 <그레이트 뷰티>(2013), <유스>(2015)의 마침표를 찍는 작품인 <그때 그들>(2018)은 이전 작품과 통상적으로 동일한 세계관(나이 듦)을 공유하며 등장인물의 상태와 대비적 속성을 가진 '정감'(情感)을 중첩하여 밀어 넣는 특징이 있다.

소렌티노에게 있어서 '정감'은 성욕, 물욕의 이미지이며, 종합해 볼 때 유물론적인 이미지로 점철된다고 보인다. 대표적인 예로 프레임을 가득 메우는 여성들의 헐벗은 육체를 뚫고 '나이 듦'으로 인해 부패한 남성의 육체가 융합하는 장면들은 욕망을 지향하는 인간의 속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영화적 톤으로 구술된다. 긴 시간을 할애하여 표현하는 여성의 유연하고 고혹적인 움직임과 육체의 윤곽들(비록 강박적인 움직임으로 관철되지만)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지언정 무엇을 지시하는 것인지를 파악할 수 없는 이미지들에선 의미는 소각된 채 각각의 쇼트들이 파편적인 형상으로 위치한다는 지점에서 소렌티노는 그간 의도했던 '형식화'의 무대를 적확하게 구현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 3부작의 주제 의식은 '욕망의 권태를 어떻게 이겨냈을까'라는 물음으로 집약되지만, 이를 명확하게 답하지 않는 영화의 어법은 엔딩으로부터 새로운 분기점을 생성하면서 프레임 밖에 있는 외화면의 세계에서 영화는 현실과 동시성을 확립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설하고 말하자면 인생 3부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그때 그들>에서 전작들과의 차별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서두에 상술했듯이 등장인물의 '나이 듦'이라는 상태에서 의미의 변용은 제한적이며, 오히려 <그레이트 뷰티>에서 번뜩였던 미학적이며 불균질한 이미지들은 좌초된 채 관습적인 형태의 영화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번 기고에서는 인생 3부작 이외에 그의 대표작인 <일 디보>(2008)와 <그때 그들>을 중심으로 밀접하게 공유하는 주요 지점들을 통해 소렌티노가 구현하는 장르적인 요소와 의미를 엿보고자 한다.

 

ⓒ 영화사 진진

실제 인물을 토대로 염두 하는 것들 : <일 디보>와 <그때 그들>을 중심으로

<그때 그들>이전에 <일 디보>에서 이탈리아 우파 정치인이자 언론인 암살 혐의와도 같은 중죄를 벌인 문제적 인물로 알려져 있는 줄리오 안드레오티(토니 세르빌로)를 감각적인 방식으로 다루면서 소렌티노는 이미 독특한 영화적 스타일을 구현하면서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은 적이 있다. 이후 10년이란 시간이 흘러 개봉한 <그때 그들>에서 등장하는 실존 인물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토니 세르빌로)는 총리로서 권력의 정점에 오른 인물이지만 각종 범죄의 온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욕망에 침체된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때 그들>과 <일 디보>의 공통점은 이탈리아 사회에서 '비판'의 대상인 권력자들을 소재로 한다는 점이고, 독특한 점은 단순히 그들이 저지른 범죄 자체를 심판하려는 방식의 도구로써 환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점은 영화적 관습을 돌파하는 수단으로 작동하고, 기존에 대중들이 인물들을 평가할 때의 상투적인 독해로 소모되지 않는다. 가령 <일 디보>는 마피아와 유착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줄리오 안드레오티의 무성한 추문들을 증명하는 것에 쇼트를 할애하는 것이 아니라 원인을 알 수 없는 다양한 이들의 사망 장면과 의도를 인지할 수 없는 그의 무감각한 감정선과 대사의 파편들은 혼재된 상황을 '형식화'한 것이며, 시대상을 오묘한 방식으로 극화한다.

<그때 그들>도 이와 유사하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플레이보이적인 행각으로 성매매를 일삼고 10대 슈퍼모델들과 단체로 파티를 벌이며 바람까지 피우는 전적이 있는 인물이지만, 그를 단순히 '범죄자'로 추궁한다거나 비판의 목소리를 드러내지 않는다.(도리어 희로애락 중에서 '희'가 부각된다고 보여진다) 소렌티노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특유의 영상미와 사운드트랙의 활용을 통해 한 인물의 삶이 규범이나 윤리와 같은 도덕률에 관한 논평들, 즉 교훈의 농도로써 표상되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인간의 실존에 접합하는 것임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이는 <일 디보>의 엔딩에서 강조되는 수사인데, 줄리오 안드레오티가 마피아와의 범죄에 관한 재판을 받게 될 때 그를 둘러싼 배경과 몽타주가 천천히 흙빛으로 변모하고, 화면을 뚫고 진입하는 보이스오버와 심장의 요동 소리를 상징하는 사운드트랙은 그의 마지막 대사로 응집되어 감독의 목소리처럼 도달한다.

"악을 저지를 권력을 쥔 것이 평생을 항상 악행을 하기 위해서였을까? 이건 모두 아무 의미도 없다. 전혀."

ⓒ 영화사 진진

이는 영화와 현실 사이의 간극에 균열을 일으키는 보이스오버다. 이 균열은 줄리오의 행위가 옹호될 수 있는 규범적인 차원에서의 기술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이 편성되는 요소로 병치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 그들>에서 실비오의 마지막 음성은 무엇일까? 정기적으로 방영되는 퀴즈쇼를 진행하는 사회자와의 대화는 <일 비노>에서 쓸쓸하고 처연하게 읊조렸던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일상성'에 대한 논구다. <그레이트 뷰티>와 <유스>에서 종종 언급되었던 평범한 일상을 소중하게 여기던 부부와 친구들의 대화내용을 떠올리면 이는 명료해진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적확하게 지시한 바 있다. 그에게 '일상성'이란 건 개개인에게 주어진 나날들을 '공공'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면서 '그들'로써 존재하는 우리 자신들을 가리킨다고 말했다. <일 비노>에선 개인의 고독감이 부각되는 서사적 이미지가 위치했다면 인생 3부작에선 이러한 공공성을 지시하면서 인생의 의미를 확장하는 지점으로 기울게 된다. 이탈리아를 사랑하는데 아무도 믿지 않았다고 말하며 자신의 정치적인 권력을 견고히 하려는 대화를 차단하는 사회자의 한마디는 인생 3부작의 마지막 메시지로 울림을 선사한다.

 

"여기서 자고 가도 돼요"

"고맙지만, 아내는 내가 밀라노로 돌아가야 안심할 거예요."

"좋아요. 다음에 오면 화산을 터뜨립시다"

욕망으로 점철된 세계에서 기필코 의미를 찾는다면 바로 사랑하는 대상에 관한 그리움의 묘사일 것이다. 1부의 주제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속임수'이겠지만, 2부와 3부를 거듭하면서 도달하는 단어는 우리의 일상으로 회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보면 소렌티노는 이탈리아를 너무나 사랑한 감독처럼 느껴진다. <그때 그들>에선 '나폴리'와 '밀라노'로, <그레이트 뷰티>에선 '로마'로 돌아가자던 등장인물들의 고향을 향한 그리움은 동시에 '영화'적인 그리움과 상응하는 것은 아닐까.

 

ⓒ 영화사 진진

이 두 영화의 완성도를 소급하여 들여다볼 때 <그때 그들>은 과연 <일 디보>를 능가할 만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냐라고 묻는다면 비평가들은 어떤 대답을 할까? 나는 <일 디보> 이후의 장편 작품들 <아버지를 위한 노래>(2011)를 비롯한 그 사이에 존재했던 인생 3부작과 <영 포프> 시리즈가 독립적인 장점들이 있는 작품들이지만 <일 디보>를 능가한 작품은 없었다고 평가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도 그것이 반복되면 흉측해진다는 누군가의 말은 동일하게 영화에서도 통용되는 선언으로 들려온다.

아쉽게도 인생 3부작을 통틀어 <그때 그들>이 도달하는 연출적인 수사는 그가 강조했던 '형식'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으며, 영화에서 사용되는 반복적인 오브제에서 나는 어떤 감응도 체감할 수 없었다. 소렌티노의 페르소나인 토니 세르빌로의 연기는 매우 훌륭하지만 <일 디보>, <그레이트 뷰티>, <그때 그들>로 거듭해 갈수록 점차 느슨한 형태의 톤으로 매력이 반감되면서 영화는 대중들과 교감하지 못하는 실책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소렌티노를 향한 비평가들의 높은 평가는 아직도 유효하다. 앞으로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하게 될 <신의 손>(2021)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차지함으로 기대감이 상승한 지금 이전에 <일 비노>를 감상하면서 느꼈던 전복적인 착상들이 또다시 도래할 것을 상상하면 여전히도 나는 그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다. 한동안 지지부진했던 이탈리아 영화에 숨을 불어넣어 줬던 소렌티노의 영화는 앞으로도 이탈리아 영화계의 한줄기의 섬광으로 대중들과 공명할 것임을 확신하게 한다.

[글 이현동, Horizonte@ccoart.com]

 

ⓒ 영화사 진진

그때 그들
Loro
감독
파올로 소렌티노
Paolo Sorrentino

 

출연
토니 세르빌로
Toni Servillo
리카르도 스카마르치오Riccardo Scamarcio
엘레나 소피아 리치Elena Sofia Ricci
카시아 스무트니아크Kasia Smutniak
파브리지오 벤티보글리오Fabrizio Bentivoglio
로베르토 데 프란체스코Roberto de Francesco
다리오 칸다렐리Dario Cantarelli
안나 보나이토Anna Bonaiuto

 

수입|배급 영화사 진진
제작연도 2018
상영시간 157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개봉 2019.03.07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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