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함께 여름!' 계절의 화양연화
'다함께 여름!' 계절의 화양연화
  • 이현동
  • 승인 2021.10.11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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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이번에 승차하실 역은 '여름'입니다"
ⓒ 엠엔엠인터내셔널(주)

캔버스 위에 유채를 활용하여 회화적인 색감과 은은한 향기가 풍겨 나오는 듯한 기욤 브락의 영화적 특성은 그 미학적 기법을 전면적으로 활용한 프랑스 화가 조르주 쇠라(Georges Pierre Seurat)의 신인상주의 그림들을 떠올리게 한다. 다양한 계급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소풍을 나와 함께 교류하는 장면을 묘사한 조르주 쇠라의 작품인 [아스니에르에서 물놀이하는 사람들](1883),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1884~1886)은 기욤 브락의 영화를 일목요연하게 관철하는 압축된 이미지처럼 보인다. 기욤 브락의 이전 작품인 <보물섬>(2018), <7월 이야기>(2017), <어 월드 위드 아웃 우먼>(2011) 등에서 활용했던 풍경들은 대체로 이와 유사하다.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어떤 유희를 위한 우발적인 여행을 시도하게 되는데, 그때의 계절은 여름이고, 여행지에는 '물'(해변)이 존재하며, 각기 다른 인종(보물섬)과 출신을 가진 사람들(대표적으로 7월 이야기의 두 번째 챕터)이 이를 표출하면서 영화는 정물적인 이미지가 어떻게 시네마라는 움직임으로 이행하는지를 생생하게 목도하게 한다.

기욤 브락의 영화를 추동하는 에너지는 풍경에만 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목가적이며 통속적인 풍경 안에 내재한 다소 억지스럽게 보이기도 하지만 충분히 납득할만한 우발적인 만남에서 거듭 이어지는 대사들의 배열은 이내 생동감을 구현하는 에너지가 되어 시네마가 그간 치환해놓았던 (과잉적인 혹은 도식적이라 할 수 있는) 영화적 톤과 일상의 간극을 시적-리얼리즘의 한 형식으로 편안한 감상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한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기욤 브락의 영화에서 연기적인 측면에서 강박적인 몸짓은 허용되지 않으며 천천히 흔 낱리는 나뭇잎과 같이 느슨한 연기를 선보이는 지점들은 자연주의적이면서 인간의 본연적인 모습을 관망하게 한다. 누군가는 이런 영화적 톤을 그저 쇄말주의로 한 부류로 여기겠지만, 누군가는 일상주의의 고상함이 선언하는 어떤 희락이 매혹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번에 <다함께 여름!>(2020)은 이러한 특징을 고스란히 되풀이하면서도 캐릭터의 다채로운 변용과 풍성한 풍경 묘사들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의도하지 않은 만남 속에 운명 같은 우연을 만나다

'A l'abordage!'(전원 승차!)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이 작품은 그간 느린 영화로 분류해왔던 기욤 브락의 영화들 중에서 가장 톡톡 튀는 리듬을 장착한 독특한 작품이다. <다함께 여름!>에서 인상적인 점은 그간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았던 여행을 떠나는 동기가 묘사되어 있다는 지점과 시간이 지나면서 대체로 허무하게 종결되었던 인물들의 관계들을 명료하고 보편적인 형식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코미디와 휴먼 드라마의 장르적 특색을 뚜렷하게 갖추고 있는데, 멜랑꼴리하게 느껴졌던 지난 작품들과 비해 경쾌하게 진행되며 호쾌하게 끝난다. 제목이 왜 '전원'과 '다 함께'라는 수식어를 전면에 내세웠는지를 상기할 수 있는 측면이기도 하다.

<다함께 여름!>에서는 에릭 로메르 영화인 <여름 이야기>(1996)의 첫 부분과 유사한 동기로 여행을 계획하고 출발한다. 첫눈에 반해 남녀의 관계가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은 상태로 시작되는 관계의 서사는 여름이라는 시간적 한계가 '규정'된 채로 시작된다. 두 이야기의 여행의 목적은 육체적 관계에서 지연되었던 정서적 유대를 확장하고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목적의 성취와는 관계없이 기욤 브락과 에릭 로메르의 영화에서 '의무'적인 남녀관계에서 증명되는 건 이와는 정반대로 '의도'하지 않았던 우연적인 관계, 혹은 이를 운명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비롯된 즉물적이며 자연 발생적인 만남에 대한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로 소급할 수 있다.

이는 기욤 브락의 첫 번째 장편 영화인 <어 월드 위드 아웃 우먼>(2011)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실베인(빈센트 맥케인)이 오랜 친구이자 돌싱녀인 패트리카(콘스턴스 루소)와의 로맨스를 갈망하지만, 역설적으로 여행 마지막 날에 그녀의 딸인 줄리엣(콘스턴스 루소) 과의 하룻밤을 교감하는 아이러니한 광경이 펼쳐진다. 이를 보면 '의무'와 '의도'를 허무는 과정을 반복하는 기욤 브락의 영화적 특징은 이미 그의 초기 서사의 단면에서 에릭 로메르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 엠엔엠인터내셔널(주)
ⓒ 엠엔엠인터내셔널(주)

의도하지 않은 만남 속에 운명을 마주하는 기욤 브락의 이야기는 <다함께 여름!>에서도 동일하게 이어진다. 펠릭스(에릭 난추앙)는 알마라는 여자와 한 여름밤에 첫눈에 반해 그녀의 가족이 있는 남프랑스로 그녀 몰래 여행을 계획하고 낭만적인 로맨스를 꿈꾼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여행에서 사랑을 발견하고 쟁취하는 건 펠릭스가 아니라 연애 경험이 전무한 모태솔로인 셰리프(살리프 시세)다. 펠릭스는 알마의 고향에 도착하여 끈질기게 구애를 시도하지만 서로의 정서적 거리를 끝내 좁히지 못한다. 반면에 셰리프는 '우연'히 마주친 엘레나(아나 블라고예비치)의 아이를 돌보면서 지속적인 만남이 이어지고, 마침내 꿈같은 여름밤을 함께 보내게 된다. 수미상관으로 구성된 이러한 여름밤의 달콤한 시작과 마무리는 그간 음울하고 철학적으로까지 느껴지던 몇몇 기욤 브락의 영화를 떠올려보면 시종일관 밝고 경쾌하다.

 

시간(날씨)과 장소는 영화의 주인공이다

에릭 로메르는 과거 '포지티브'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나는 날씨 변화에 맞추면서 촬영해요. 내 영화들은 날씨의 노예입니다. 나는 날씨를 속이지 않는 데다 거기에서 영감마저 받으며, 나 스스로 날씨의 남자가 되어야만 하죠. 내가 끌리는 것은 완벽한 예술품이자 자연의 경이로서의 우주입니다."

대표적으로 에릭 로메르가 <4계절 이야기>를 연출하면서 자연의 유동성과 인간의 삶이 품고 있는 유동성을 동시에 포착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던 건 '배경'이 보이지 않는 영화의 주요한 주연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릭 로메르의 인터뷰는 기욤 브락의 영화에게도 명징하게 도달한다.

겨울을 배경으로 한 <토네르>(2013)를 제외하고 그의 모든 작품들이 '여름'과 관계한다는 지점은 여름이 산발적으로 조명하는 활기에 대한 관심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더 나아가서 기욤 브락의 작품 중에서 '여름'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작품은 <다함께 여름!>임이 틀림없다. 여행을 떠나는 이 젊은 청년들은 활력은 여름처럼 뜨겁고 격정적이기까지 하다. 특히 그 리듬을 주도하는 여름과 같은 인물이 있다면 에두아르일 것이다. 에두아르는 펠릭스와 셰리프에게 카풀을 해주면서 그들과 첫 만남부터 티격태격하지만 점차 그 우정을 쌓아나간다는 측면에서 도화지 같은 변화의 가능성을 소유한 인물이다. 에두아르는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던 펠릭스와 사이클링을 하며 산의 아름다운 정경과 우정의 온기를 쥐여주기도 하고, 계류타기를 하는 도중 알마에게 은근슬쩍 스킨쉽을 하는 구조요원에게 참다못해 따귀를 때리기도 한다.

떠나기 전 마지막 날 밤 노래빠에서 에두아르가 취한 채로 부르는 노래와 그의 추임새에는 여름이란 무대에 과감하게 우릴 초청하는 사회자의 형국으로 배치된다. 셰리프와 엘레나는 에두아르의 지목에 의해 바의 중앙으로 움직이고, 둘의 노래와 춤이 넘실거리는 희락의 에너지로 밤공기를 충만하게 메꿀 때 생성되는 감정의 이미지는 여름이란 계절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우리의 일상에도 호흡을 불어넣는다. 우연을 가장한 운명이란 만남의 정체가 외화면을 뚫고 도래할 때 삶은 다시금 여름의 기억과 마찰하여 일상이 선사했던 환희의 순간들을 프레임 밖으로 소환해낸다.(결론적으로 나는 에두아르를 통해 한 인물이 계절의 이미지로 배치될 수 있음을 관찰하게 되었다)

 

ⓒ 엠엔엠인터내셔널(주)

다시금 언급하자면 <다함께 여름!>은 인물들이 그 장소를 떠나는 장면이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여자가 없는 세상>이나 <7월 이야기>에서 쓸쓸해 보였던 등장인물들의 종국과는 다른 변용으로 이는 기욤 브락의 의도적인 변용임에 틀림이 없다. 분명 그들이 머물 수 있는 기간이 지남에도 불구하고 여름의 시간을 이어나가려는 건 기욤 브락이 개인적으로 여름이란 영화적 원소에 대한 동경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여름이 지나 선선한 가을의 온도가 기분 좋게 아침을 깨움에도 여전히 여름이 벌써부터 그리운 건 이 영화를 지금에서야 보았기 때문은 아닐까. 딱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이 영화가 10월 개봉했다는 것이다. 아니면 만약 여름에 개봉했다면 이 시국에 여행을 가고 싶은 갈망을 부추기기 때문이었나. 이제 기욤 브락의 가을 이야기가 기대되는 시점인 것 같다. 먼저 에릭 로메르의 <가을 이야기>를 복습하고.

[글 이현동, Horizonte@ccoart.com]

 

다함께 여름!
A l’abordage!
All Hands on Deck
감독
기욤 브락
Guillaume Brac

 

출연
에릭 낭트슈앙
Eric Nantchouang
살리프 시세Salif Cisse
에두아르 술피스Edouard Sulpice
아스마 메사우덴Asma Messaoudene
아나 블라고예비치Ana Blagojevic
루시 갈로Lucie Gallo

 

수입|배급 엠엔엠인터내셔널(주)
제작연도 2020
상영시간 100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1.10.07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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