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안 펫졸드] '옐라' 이토록 우아한 자본주의의 사망선고
[크리스티안 펫졸드] '옐라' 이토록 우아한 자본주의의 사망선고
  • 이지영
  • 승인 2021.08.09 11: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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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해 다시 한번 믿음을 가져보는 이들의 얼굴에 피어오르는 여명을 보았다"

1. 펫졸드가 '붉은색'을 사용하는 방식

알베르 라모리스는 회색빛 도시를 어린 소년의 <빨간 풍선>(1956)이라는 순수함과 동심의 상징으로 밝혔고, 장예모는 인민들의 생명력과 희생을 그리기 위해 <붉은 수수밭>(1988)의 이미지로 스크린을 가득 물들였다. 에메릭 프레스버거의 <분홍신>(1948)에서는 구원이자 동시에 파멸로 이끄는 예술혼으로서 붉은 발레 신발이 관객들의 뇌리에 깊게 각인되었다. 크리스티안 펫졸드의 <옐라>(2007)의 오프닝에서, 주인공 옐라(니나 호스)는 기차 안에서 빨간색 셔츠를 무채색의 검은 셔츠로 황급히 갈아입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영화 내내 그녀는 시선을 끄는 붉은색 의상을 착용한다. 옐라는 우연히 호텔에서 만난 필립(데이브 스트리에소브)과 비즈니스 파트너가 되어, 그의 빨간색 아우디를 타고 이동하며 파산 위기에 처한 회사들을 매각하는 일을 한다. 우리의 시선을 끄는 '이 문제의 붉은 색'은 펫졸드의 영화 안에서는 동심의 순수함도, 예술혼의 열정도, 핏빛으로 물든 민중의 역사도 아닌, 포스트 이데올로기 시기에 도래한 자본주의의 속성을 파헤치기 위해 등장한다. 그 속성이라 함은, 부의 축적이라는 희망을 누구에게나 주는 동시에 냉엄하고 살인적일 만큼 잔인한 속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펫졸드의 작품을 관통하는 특성대로, 이러한 상징적인 이미지들은 감독이 가진 가장 현실적인 문제의식을 은유적으로 담는 데 충실히 기여한다.

 

ⓒ Schramm Film Koerner & Weber

<바바라>(2012)의 오프닝과 마찬가지로, <옐라>는 달리는 기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주인공 옐라의 익스트림 클로즈업 시점 숏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하노버에서 면접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고향인 비텐베르그로 돌아가는 중이다. 활력을 잃은 동독의 도시를 떠나서 기회가 더 많은 서독의 경제 시스템으로 편입하려고 하지만, 첫 씬부터 이것이 그녀에게 맞지 않는 옷, 맞지 않는 색깔과 코드인 것은 자명한 듯하다. 이어서 고향 거리에 내린 옐라를 그녀와 똑같은 검은 옷을 입은 전남편 벤(히네르크 쇠네만)이 따라온다. "걸음걸이만 봐도 취직을 한 줄 알겠다"고 말하는 벤은 돈과 자본에 본능적으로 민감한 인물이며, 옐라의 그늘을 따라다니는 유령이다. 옐라는 이미 파산한 상태의 그를 차마 완전히 뿌리치지 못하고 외면하다가, 하노버로 떠나는 날 벤의 차를 얻어 타게 된다(벤의 차는 빨간 '밴'이다). 그는 재정적으로 완전히 파산한 상태이고, 회사의 자산 가치를 터무니없이 강등당한 사실을 옐라에게 고하며, 무작정 자신을 한 번만 더 믿어달라고 애원한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폭언과 자멸적인 행동은 그가 오래전에 정신적으로도 윤리적으로 파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당위성 없는 희생의 의미

옐라의 첫 번째 상징적인 죽음은 타의로 인한 희생이다. 벤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폭언과 돌출 행동을 하고 옐라를 죽음으로 이끈다. 그녀 스스로 절망한 것도, 파산한 것도 아니지만 그녀를 싣고 가던 붉은 밴은 어떤 합당한 이유 없이 핸들을 꺾어 수직으로 낙하한다. 그렇다면 옐라는 왜 희생자가 되어야 했나? 무능함과 물질적 탐욕이 결합한 벤에게, 의리나 헌신이라는 명목하에 비즈니스 파트너(회계사)로서 제공해줄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의 서사는 타인이 만든 불운에서 스스로의 의지로 벗어나고자 했지만 타의로 희생된 한 개인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영화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수몰된 곳에서 빠져나와 그대로 다음 삶을 이어가는 옐라의 대안 서사로 나아간다.

펫졸드의 '유령 3부작' 중 하나인 이 <옐라>의 서사는 결국 옐라라는 유령의 이야기이다. 그녀의 물리적인 죽음 이후의 삶을 상상해봄으로써 '한 인물이 어떤 과정을 거쳐 실존적인 죽음을 맞기에 이르는가'가 이 영화가 진정으로 들여다보고자 하는 바이다. 죽음 이후에 펼쳐지는 이야기는 옐라의 대안적인 삶이며, 우리는 과연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렸는지'를 비교하며 살펴볼 것이다. 서독에서의 삶은 새로운 희망으로 옐라를 이끌 수 있을까? 그곳에서는 어떤 힘이 그녀를 삶으로 추동하고 죽음의 충동으로 이끄는가?

 

ⓒ Schramm Film Koerner & Weber

3. 가치 평가, 그리고 서독 자본주의의 삶

강가의 흙 바닥에 엎드려 깊은 잠에서 깨어난 듯이 다시 살아난 옐라는 예정대로 하노버로 가는 기차에 탄다. 하지만 호텔에 입성하는 순간부터 그녀가 가지고 있던 현금, 개인의 능력, 인격을 포함하여 그녀가 가지고 있는 모든 가치는 가차 없이 평가 절하되기 시작한다. 옐라의 아버지가 오랫동안 노동으로 모아서 특별히 비상금으로 쥐여준 돈은 호텔의 숙박비로 일시에 허망하게 지출된다. 일하기로 했던 회사는 이미 도산했으며 약속된 월급은 0에 수렴한다. 상사는 재취업을 약속하면서 성적인 암시를 주어서 그녀의 인격을 모독한다. 그렇게 동독을 탈출하면서 꿈꿨던 서독에서의 새로운 삶은 어김없이 수포로 돌아가고, 삶의 대차대조표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파산이라는 선고를 내린다. 그녀는 분노에 차 모든 짐을 싼 채로 호텔방에 엎드려 잠든다. 엎드려 자는 구도는 마치 강바닥에서 죽음과 같은 잠에 빠져들었던 그녀의 지독한 절망을 상기한다. 희망의 재고가 바닥나는 순간을 말해주는 동시에 이번에는 그녀를 흔들어 깨우는 필립이라는 인물을 만나도록 한다. 다시 한번 펫졸드 세계에서 인물들의 이야기는 반복하며 변주한다.

잠시 앞으로 돌아가 보면, 옐라는 호텔에서 묵은 첫날 저녁 대차대조표를 보고 있는 필립을 만났었다. 벤처 캐피털을 운영하는 그는 실직한 옐라에게 자신의 미팅에 같이 들어가 달라고 한다. 대차대조표를 읽을 수 있는 그녀의 실질적인 능력은 무시하거나 간과한 채 서독 자본주의의 비즈니스 코드를 기계적으로 익혀주지만 옐라는 잠자코 받아들인다. 첫 미팅에서 옐라는 적응을 하지 못하고 심하게 겉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물소리, 그리고 까마귀 소리의 환청이 들리는데, 그 환청이 들린 직후, 옐라는 전남편 벤의 상황과 거의 같은 상황에 처한 회사의 사정을 낱낱이 밝혀낸다. 그녀가 혼란을 느낀 것은 캐리커처와도 같은 우스꽝스러운 비즈니스 코드의 이질감, 벤이 겪은 개인적 불행에 대한 기시감, 또 이들을 이용해서 돈을 벌고 부를 축적할 수 있다는 가치의 혼란에서 온 것이 아닐까? 즉, 자본주의 경제에서 은연중에 통하는 코드 뒤에 숨겨진 이면은 인간성이나 상식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옐라가 이 일의 파트너가 되어 계속 일하기로 한 것은, 결국 경제적인 궁핍과 절박함 때문이라는 것을 필립이 알아채게 된다. 필립은 거액의 송금을 부탁하며 그녀의 신뢰도를 테스트하고, 그녀의 필사적인 절박함을 확인하고는 자신이 우위를 점한 채 옐라와의 파트너십을 유지한다.

두 사람이 파트너가 되어 해나가는 일은, 사실상 한 가정이 파괴되고 개인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절망을 지우는 일이다. 하지만 그 방식은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간단한 서류 한 장이라는 무기로, 격식을 차린 비즈니스 대화로 처리된다. 아주 가볍게 큰 숫자들이 날아다니고, 비언어적 제스처로 상대를 압도하면서. 이러한 일의 성격에 대해, 인물이 느끼는 감정은 아마도 자포자기 그리고 자조이다. 필립은 자신이 한때 은행가였으나 이제는 그 위치로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이것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그가 이 '욕망이라는 전차'에서 내릴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는 타인을 가치 절하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아니면 이 업계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전력질주하는 차에서 내리지 못한다. 그리고 옐라와 이런 이해관계가 정확히 들어맞기 때문에 그는 그녀를 선택하였고, 옐라는 벤과 정반대 일을 하고 있는(그렇다고 믿는) 필립을 사랑하기로 '결정'한다.

이들의 관계는 자연발생적인 사랑이 아니라, 특수한 이해관계가 맞물린 기묘한 형태의 사랑의 모조품이다.

 

ⓒ Schramm Film Koerner & Weber

4. 한 호텔방에서 다른 방으로

옐라 주위를 떠돌면서 그녀를 스토킹하는 전남편 벤은 옐라가 청산하지 못한 과거를 소환하고 있는 동시에, 그녀가 현재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서독의 다른 '벤'들에 대한 부채감을 환기한다. 한때는 누군가에 의해 가치를 평가절하당하고 파산 선고를 받는 입장에서, 이제 그 선고를 내리는 입장에 위치한 옐라는 그 어디에서도 궁극적인 행복과 안정을 찾지 못한다. 벤이 침범한 호텔방에서 도망쳐 필립이 있는 방으로 도망치지만, 누구라도 쉽게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고 커튼 뒤로 타인을 관음하고 있는 이 방은 하나의 호텔이며 동질적인 하나의 세계이다. 이와 반대로 그녀가 떠나온 비텐베르그의 집은 궁핍할지언정 안전하다고 믿을 수 있는 아버지의 집이다. 허나 떠나온 곳으로 회귀하려는 본능은 또 하나의 도피일 뿐 궁극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주고 있지 못하는 건 여전하다. 옐라가 자신의 의지대로 필립의 차의 방향을 바꿔 자신의 고향으로, 있는 그대로의 그녀의 삶으로 이끌려고 할 때, 이 관계는 즉시 파탄 난다. 필립의 붉고 선연한 탐욕은 정체되어 있는 삶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옐라의 유령은 그제서야 두 번째 실존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유예된 사망선고를 받아들이듯이, 그녀의 클로즈업 된 얼굴은 인제야 평화를 찾은 듯하다. 동독의 과거의 유령에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서독의 자본주의 체제에 온전히 녹아들지 못한 채, 동독의 향수(Ostalgie)로 도망칠 수 조차 없는 이 회색 지대의 유령 같은 인물들은, 통일 이후 독일이라는 모호한 정체성을 점묘화처럼 정교하게 그려나간다. 시대나 공간이 변해도 인물들의 근원적인 욕망은 변치 않고, 같은 드라마가 서로 다른 얼굴로 계속 반복된다는 지점은, 펫졸드가 갖는 통시대적인 통찰이 다시 한번 드러나는 대목이다. <바바라>에서 우리는 떠나지 않고 스스로 주체가 되어 남기로 한 자들, 사랑에 대해 다시 한번 믿음을 가져보는 이들의 얼굴에 피어오르는 여명을 보았다. 반면, <옐라>에서 사랑을 잃고 도피하는 자들, 사랑하는 일과 일할 곳을 잃은 자들은 목적을 상실한 채 부유한다. 이들은 동독식 사회주의와 서독의 자본주의, 빈곤하고 폭력적인 과거와 우아하지만 더욱 잔인한 현재 사이에서 어떤 선택도 내릴 수 없는 유령들이다.

[글 이지영, karenine@ccoart.com]

 

ⓒ Schramm Film Koerner & Weber

 

옐라
Yella
감독
크리스티안 펫졸드
Christian Petzold

 

출연
니나 호스
Nina Hoss
데비드 스트리에소브Devid Striesow
히네르크 쇠네만Hinnerk Schonemann
바바라 오어Barbara Auer
크리스티앙 레들Christian Redl
완자 뮤즈Wanja Mues
마틴 브람바흐Martin Brambach
피터 베네딕트Peter Benedict

 

제작 Schramm Film
제작연도 2007
상영시간 8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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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경 2023-09-03 01:26:28
영화를 보고 정리되지 않았던 부분들이 명쾌하게 이해되었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