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th SWIFF] '애프터 미투' 삶은 계속된다
[23th SWIFF] '애프터 미투' 삶은 계속된다
  • 이지영
  • 승인 2021.09.26 21: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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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트라이트가 사라진 후,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그늘을 바라보다"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60년대 여성주의 운동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다"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한 사람의 경험과 목소리가 한데 모여 점차 정치적인 운동이 되고, 이것이 모여 거대한 사회적 흐름으로 이어진다는 뜻이다. 2017년 미국에서는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들이 공개적으로 자신의 성폭력 피해 경험을 고백함으로써 본격적인 미투 운동 확산에 힘을 실어줬다. 'Me too', 나 또한 피해를 당했다, 공감한다는 뜻으로, 초창기의 미투는 공개적으로 타인의 경험에 공감함으로써 그들에게 권한을 부여한다는 의미였다. 미국 미투 운동의 창시자 타라나 버크는 "일어나 당당하게 말하라. 행동으로 실천하라"(Get up. Stand up. Speak up. Do something)고 말하며 성폭력 경험자들의 주체적이고 주도적인 행동 변화를 요청했다. 특정 성별에 상관없이, 성폭력의 피해자들이 어둠 속에 숨지 않고 당당히 증언하며 가해자가 적법한 절차로 정당한 처벌을 받는 세상이 오기를 그녀는 꿈꾸었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2018년에 현직 검사의 미투 고발이 중대한 사회 변화를 이끌어내었고, 각계각층의 권력형 성범죄를 폭로하는 익명의 고발이 트위터 등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초기 미투 운동이 성행하였을 때 대중과 정치권의 이목은 그쪽에 집중되었지만, 스포트라이트가 사라진 후의 시간을 감당하는 것은 온전히 피해자들의 몫이었다. 2~3년씩 이어지는 긴 법정 공방, 피해자의 진술에 의존하는 사법당국의 수사 방식, 생계유지의 문제 등, 미투를 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마법처럼 사라지는 변화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사건이 끝내 어떻게 종결되었는지는 아주 쉽게 잊혀진다. <애프터 미투>(2021)는 미투 이후, 당사자들의 일상은 어떠한 변화를 겪었고, 여전히 만연한 폭력 앞에서 우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묻는다.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애프터 미투>는 4명의 여성 감독과 2명의 프로듀서가 합작하여 만든 옴니버스식 다큐멘터리다. 박소현이 연출한 <여고괴담>은 2018년에 시작된 용화여고 스쿨미투 운동에 대한 재학생과 졸업생들의 증언인데, 이들의 신원은 대부분 익명으로 처리되었다. 오직 증언하는 목소리만이 학교의 사진을 배경으로 흘러나온다. 이솜이가 연출한 <100. 나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는 성폭행 트라우마를 스스로 치유하고자 매일 같은 문장을 100번씩 쓰는 중년 여성의 일상을 기록한다. 강유가람의 <이후의 시간>은 문화 예술계 미투 활동가들을, 소람의 <그레이 섹스>는 일상의 데이트에서 마주하는 폭력의 회색 지대를 다룬 애니메이션 다큐이다. 이처럼 각 단편이 취한 연출 형식들은 서로 다른데, 여기에서 각 연출가의 미학적인 고민부터, 코로나 시대 찍은 영화답게 현실적인 고민까지도 반영하고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미투 관련 시위 활동이나 간담회가 일제히 취소되어 촬영에 제약을 받고 영화 제작도 어려워진 현실 속에서, 엄연히 현존하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카메라 안으로 들여와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했던 지점을 영화는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애프터 미투>가 기록한 '포스트 미투'의 현실은 냉혹하다. 2018년 4월, 용화여고 재학생들의 창문 미투가 당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졸업생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용화여고 성폭력 뿌리뽑기 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노원구 스쿨 미투를 지지하는 시민 모임'과 같은 시민 단체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다음은 지난한 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해교사 혐의없음으로 불기소 처분, 교육청 소청 위원회에 의한 징계 취소, 이후 재수사와 2021년 2월 19일에 가해교사 A에게 실형이 내려질 때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랜 싸움을 한 것은 오롯이 재학생, 졸업생과 시민 단체의 몫이었다. 수개월 혹은 수년 동안에 걸쳐 평범한 일상을 잃어버린 이들의 2차 피해는 누구도 보상해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100. 나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의 주인공 역시 매일 같은 문장을 100번씩 쓸 만큼 심한 트라우마를 겪으면서도 워킹맘으로서 힘든 생계를 이어가고 있으며, 그녀의 생활을 누구도 나서서 책임져 주지 않는다. <이후의 시간>에서는 활동가로서의 정체성과 본디 예술가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문화예술인의 고백을 들을 수 있다.

지금 우리는 미투의 의의를 정의 내릴 수 없다. 미투 운동은 현재 진행형이며 후대에 역사적인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동안 갖가지 쟁점에 대한 갑론을박이 펼쳐질 것이다. 미투 피해자의 익명성 보장을 한 예로 들어보자. <여고괴담>을 보는 관객은 익명의 목소리 증언을 들으며 그들의 피해 기억과 그 당시 감정에 쉽게 이입하게 된다. 집단 트라우마를 남긴 가해자들이 혐의없음으로 불기소 처분되었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피해자의 입장에 서서 분노하게 되며 그 분노의 대상은 무능한 사법 당국과 교육 기관으로 향한다. 피해자의 익명성 보장은, 피해자에 가해졌던 수없이 많은 백래시와 2차 가해라는 현실에 대한 방증이기도 하다. 영화 결론부에 잠시 언급되었지만 가깝게는 전 서울시장의 죽음 이후 사태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만 보아도 그렇다. 그러나 동시에 익명성을 담보로 미투의 본질을 오용하고 남용하는 자들의 허위 고발과 무고죄, 무죄추정원칙에 반하는 사회적 낙인 효과라는 불편한 이면도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이다. 이처럼 타라나 버크가 꿈꾸었던 비전은 하루아침에 오지 않겠지만, 100번에 걸쳐 <나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라는 문장을 쓰는 마음처럼, 진정성을 가진 이들의 염원은 사회 전체가 아주 느리고 고통스러운 발걸음을 뗄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글 이지영, karenine@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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