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th SIWFF] '노 스트레이트 라인 – 퀴어 코믹스의 등장' 퀴어 코믹스와 퀴어 문화의 연대기
[23th SIWFF] '노 스트레이트 라인 – 퀴어 코믹스의 등장' 퀴어 코믹스와 퀴어 문화의 연대기
  • 이지영
  • 승인 2021.09.26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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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만화의 기쁘고 슬픈 자화상"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비비안 클레이만 감독의 <노 스트레이트 라인 – 퀴어 코믹스의 등장>은 퀴어 코믹스의 시조격인 하워드 크루즈부터 메리 윙스, 제니퍼 캠퍼, 루퍼드 키나드, 그리고 벡델 테스트로 대중에게도 잘 알려진 앨리슨 벡델까지, 언더그라운드 퀴어 코믹스의 계보를 탐구한다. 영화는 1960년대 이후 등장한 퀴어 코믹스 만화가들의 삶의 흔적을 좇으며 개인적이고 미시적인 영역을 다루는 한편, 이들이 살아간 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거시적인 시대 흐름도 놓치지 않는다. 60년대 말 퀴어 역사의 획을 그었던 스톤월 항쟁과, 이를 계기로 성적으로 개방적이고 자유분방했던 70년대, 80년대 에이즈의 확산이 가져왔던 두려움과 짙은 슬픔, 90년대 아마존과 반스 앤 노블스 같은 대형서점의 등장으로 언더그라운드 독립 출판이 점차 쇠퇴기를 겪었던 시기, 웹의 등장과 디지털 만화의 등장까지. 클레이만은 퀴어 코믹스의 변천사를 가벼운 필치로 수려하게 회고한다. 가끔씩 등장하는 다큐 푸티지는 함께 '생존'한 이들이 공유하는 그 시대의 향수를 머금고 있다.

1970년대 미국에 퀴어 만화가 처음 등장했을 때, 만화는 작가들이 성소수자성을 선언하고 드러내는 자기표현의 수단이자, 보수적인 기성 문화를 통렬하게 비판할 수 있는 유일한 매체이기도 했다. 내용적으로는 주로 작가 스스로 처음 성 정체성을 깨달으며 방황했던 자전적 경험을 반영하거나, 이성애자-남성 중심의 주류 문화를 시니컬하게 풍자하는 만화가 주를 이루었다. 하워드 크루즈의 『웬델 시리즈』는 '웬델'과 '올리'라는 게이 커플의 일상을 소재로 하는데, 여느 이성애자 커플과 다름없는 평범한 일상을 묘사하면서도 퀴어 커플만이 갖고 있는 공감대를 솔직하게 담아내어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때로는 동성애자 폭행 사건과 같은 퀴어인들의 집단 트라우마를 강렬한 방식으로 환기하기도 한다. 1975년 메리 윙스의 『컴스 아웃 코믹스』는 그녀가 레즈비언 커밍아웃을 하면서 겪었던 내밀하고 혼란스러운 기억을 지면 위에 담아냈다. 루퍼트 키나드의 흑인 게이 히어로 '브라운 바머'는, 어린 시절 그가 좋아하던 히어로 물에 왜 백인 이성애자만 등장하는가를 스스로 자각하며 탄생한 캐릭터다. 『브라운바머 vs 슈퍼맨』에서 흑인 게이인 브라운 바머는 백인-이성애자인 슈퍼맨과 대등한 위치를 점한다. 하지만 후세대에는 이렇게 백인을 전면에 내세울 필요가 없어졌다는 후배 만화가들의 코멘트는 시대상의 변화를 여실히 보여주기도 했다.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앨리슨 벡델의 『주목할만한 다이크(Dykes to watch out for)』는 여성주의-퀴어적 관점에서 당시 세태를 풍자했으며, 그중에서도 유명한 '벡델 테스트'(①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2명 이상 등장하는가 ②그 여성 캐릭터들은 서로 이야기하는가 ③대화 내용에 남성과 관련된 내용 이외의 내용이 있는가. 이 3가지 항목의 영화의 성 평등 지수를 측정)를 탄생시켰다. 그녀가 경제적으로 궁핍하던 시기에 집필한 『펀 홈』은 놀랍게도 앨리슨의 자전적 이야기이다. 그녀의 커밍아웃 이후 가족이 겪은 일은 그 자체로 '영화처럼' 드라마틱하다. 특히, 아마 성 소수자였다고 추정되는 벡델의 아버지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사건은 그녀에게 트라우마틱하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남긴다. 그녀는 관 속에 들어간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스스로 그 모습을 재현하기까지 하면서, 스스로와 싸우며 끝까지 작품을 완성해낸다. 그 작품은 다시 뮤지컬로 제작되고, 토니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룬다.

"우리 사이에는 경쟁이 없다. 서로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다"라고 퀴어 만화가들은 말한다. 지극히 마이너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동료는 더는 경쟁의 대상이 아니다. 되려 이들은 함께 생존을 고민하는 운명의 공동체다. (선배 하워드에게 원고료 책정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어보는 앨리슨처럼) 생계에 직결되는 현실적인 문제부터, 에이즈로 쓰러져간 친구와 동료에 대한 절절한 마음의 표현까지, 이들의 우정과 연대는 여러 층위에서 맺어지며 그 각자의 방식은 하나같이 특별하다. 루퍼트 키나드가 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왔을 때, 앨리슨을 필두로 한 만화가들이 자신들의 캐릭터를 하나씩 그린 카드를 보내고 그가 그 선물을 펼쳐 드는 장면은, 어쩌면 가장 상징적으로 그 느슨하고도 끈끈한 연대를 보여주는 하나의 씬일 것이다. 이들이 가진 아름다운 다양성을 조명하면서 다큐의 시선은 퀴어 코믹스의 예술적인 가치와 존재 이유를 설득하는 동시에, 보는 이를 완전히 매료시킨다.

[글 이지영, karenine@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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