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마'의 비밀번호는 감각
'자마'의 비밀번호는 감각
  • 이현동
  • 승인 2021.08.31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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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인간이 자연을 밀어낼 때, 그리고 자연에게 맡길 때"
ⓒ 엠엔엠인터내셔널(주)

위태로운 모습으로 해안가 앞에 한 남자가 서 있다. 자연의 출구를 서슴없이 통과한 발가벗은 아이들의 웃음소리와는 반대로 자연의 척력 앞에 진입할 수 없는 기로에서 서성거리는 자마(다니엘 기메네즈 카쵸)는 권력의 상징이었던 제국주의가 결코 굴종할 수밖에 없는 어느 욕망의 형태로 묘사된다. 자마는 여인들의 소리에 이끌려 흙으로 목욕을 하고 있는 여인들을 관음 한다. 여인들은 자마의 시선을 눈치채고 도주하는 그와 실랑이를 벌인다.

'남자'와 '여자', '식민주의자'와 '원주민'으로 대비되는 위계질서라는 통념은 간극 혹은 거리에 대한 붕괴이며, 권력으로 직조된 세계에 대한 풍자이다. 이처럼 오프닝 시퀀스는 <자마>(2021)의 주제에 대한 압축된 명시화에 해당하면서도 루크레시아 마르텔 감독의 그간 주로 연출해왔던 '여성'화자의 이야기를 '남성'의 시점으로 전환된 것임을 알리는 일종의 선언이기도 하다.

영화 <자마>는 백인으로부터 주체화된 권력의 기호를 분산, 교란시키는 기믹을 통해 가시적인 현실과 비가시적인 현실간의 괴리를 불현 듯이 체험하는 형태로 대중들을 안내한다. 비가시적인 이미지들의 연쇄와 곳곳마다 정체를 파악할 수 없이 미끄러지듯 펼쳐지는 암호화 된 언어들, 그리고 굴절을 허용하는 몇몇 음성과 사운드트랙의 배치는 정치적인 담론을 도약하여 인간의 욕망이란 파국의 형태로 안착한다. 이는 마르텔 감독이 언급한 남성적 이미지의 종말, 즉 '손이 없는 남자, 아무것도 움켜질 수 없는 남자의 이미지'로 귀결된다.

 

ⓒ 엠엔엠인터내셔널(주)

소리와 이미지들. 이미지와 소리들

음울하고 묘연하게 교섭하는 이미지들의 중첩과 사운드트랙의 배치는 인과론적인 틀을 벗어나 횡행하는 <자마>의 메시지와 닮아 있다. 또 욕망의 불균질한 실체가 서사의 탈선을 유도하지 않은 채 긴밀하게 서사를 조율하는 스타일은 누벨바그 형식의 몇몇 감독들을 연상케 한다. 특정 장면에서 대사를 두 번씩 언급하거나, 갑작스레 누군가의 속삭이는 (비쿠냐로 추측되는) 음성, 사운드 트랙의 왜곡, 초현실적인 화면 전환 등의 기법은 철저하게 의도된 술책으로 작동한다.

몇 가지 예로 비쿠냐 포르투 패거리들이 여자들을 강간한다는 소문을 듣고 딸들이 걱정되는 세 딸의 아버지가 자마에게 그들이 여자들을 강간한다는 걱정스러운 이야기를 연달아 2번을 하는데, 그때 똑같은 어조와 억양, 그 사이에 교묘하게 분산되는 쇼트의 분화는 시청각적 교란을 야기한다. 또한, 오리엔탈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은 남성이 아이의 모습으로 순간 변화되어 그에게 속삭이는 말("자마, 늙어서 태어나 죽지 못하는 자, 칼을 뽑지 않고 정의를 행하는 자")과 더불어 하강 음계로 설계된 쉐퍼드 음(하나의 음이 끝나갈 때 새로운 음역이 다시 반복되는 형태, 귀의 착각으로 불리운다)이 깔리는 저변에는 마르텔 감독이 의도한 착시 현상이 이미지와 소리, 소리와 이미지들로 중첩되어 드러난다.

의미를 포착하기 난해한 <자마>의 이미지와 소리는 내면의 분열을 뜻하면서 자마를 향해 도달하는 지속적인 목소리들의 연쇄이기도 하다. 그 분열은 선명하게 자마의 하강을 암시한다. 기존에 역사적으로 강대하고 위대한 영웅으로 취급되었던 식민주의자들의 완력은 구조화에 산물로 표상되며 굴종의 대상으로 남용되었던 원주민들의 형상은 반대로 식민주의자들을 굴종시키는 방향으로 도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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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욕망 사이의 척력에 관하여

<자마>는 인간과 자연을 간극을 좁히려 할 때 발생하는 척력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연을 모사하는 인간의 자기 반영적인 측면은 인류를 설명하는 본질적인 기술로 읽힌다. 프랑스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을 빗대어 설명하자면 인간(역사)을 구성하는 형식은 '문명화의 재구성'이며 이는 일찍이 문명화를 이륙한 국가들이 인류 전반을 통제하며 사회, 문화, 전통을 다시 재정의하는 방식으로 구성한다는 것을 뜻한다. <자마>에서 해석되는 식민주의자와 원주민의 반향적 묘사는 위에 언급하였던 인류학적인 요소들과 접합하며 인간과 자연의 자조적인 대칭으로 의미의 외연을 확장하면서도 방임한다. 온 힘을 다해 헤엄치는 물고기들은 자연의 척력에 떠밀리지 않기 위해 종횡무진하며, 벽을 갉아먹는 벌레들은 생존을 위해 문명에 기생한다.

특히, 자마를 비유하는 초반부 물고기의 묘사("이 끈질긴 물고기들은 쫓아내려는 힘에 달라붙어 온 힘을 다해 자리를 지켜요. 강 가운데서는 찾을 수 없고 늘 둑 근처에 있어요")는 후반부에 이르러 자연의 척력을 극복하지 못하여 둑 위로 올라온 가오리와 동일한 형국으로 지시된다. 마르텔 감독이 Mubi와의 인터뷰에서 <자마>의 이야기를 “파리냐 강변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강에 빠지면 강물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 만약 맞서 싸우거나 헤엄치는 순간 익사하고 만다”라고 표현한 것은 자연 주의의 결과론적인 명시화이면서 욕망이 담고 있는 인간 종말에 대한 두 가지의 언급을 함의한다.

가오리가 자연의 부력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지 못한 채 발버둥 치다 죽임을 당한 것과 같이 자마도 자연의 형상화로 야기되는 '원주민'에게 저항하다 양손이 잘린 것은 일종의 대칭을 이룬다. 결국 생사가 불분명한 채 원주민이 운행하는 작은 배에 자신의 생사를 그들에게 전가할 수밖에 없는 처연하고 음울한 이 장면은 식민주의자의 파국과 동시에 착취의 근원으로 존재하는 '욕망'의 결과물로 점철된다. 반면에 자연의 섭리에 몸을 맡기는 자마는 이전보다 평온한 표정으로 누워 있다. 나른하게 스크린을 점유하는 사운드 트랙의 잔잔함은 욕망이 거세된 인간이 자연 품으로 회귀한 형태로 이를 상술하는 듯 보인다. 손이 잘린 그는 이제 아무런 허위 의식도, 성적 탐닉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마는 온전히 자신을 자연에게 맡긴다.

 

ⓒ 엠엔엠인터내셔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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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자마>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몇몇 영화의 화법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 곤충기>(1963)에서 생존본능을 쫓아 행위 하는 곤충의 행동양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인간의 욕망을 비극적으로 다뤘고, <신들의 깊은 욕망>(1968)은 홍성남 평론가의 말에 의하면 현대화의 물결이 어떻게 원시적인 세계를 '오염'시켰는지에 대한 욕망의 보고이며, <나라야마 부시코>(1984)에 등장하는 동물들의 교미 장면과 정면으로 병치되는 인간의 성관계, 식욕 등의 욕망의 분출이 마치 자연의 섭리임을 무심하게 응시하는 방식으로 그려졌다. 결국 인간과 자연의 풍경에는 '욕망'이란 경계선이 존립하는 것은 아닐까.

이쯤 되어 돌아보자면 <자마>는 탈식민주의라는 정치적 담론을 내파 하는 반성적인 성찰을 주제로 삼기에는 빈약하다. 환각과 망각이 혼재된 채 구술되는 이 희한한 영화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감각의 경기장으로 대중들을 초청한다. 자연에게 가진 부채의식을 가로질러 편재한 인간의 욕망은 마르델 감독이 비밀스럽게 은폐한 감각의 저장고에서 개봉한 <자마>의 기호이자 암호들이다. 감각적으로 민감한 이는 시각과 청각을 동원하여 영화의 의미를 채취하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게 될 것이다. 실로 <자마>의 비밀번호는 '감각'이다.

[글 이현동, Horizonte@ccoart.com]

 

ⓒ 엠엔엠인터내셔널(주)
ⓒ 엠엔엠인터내셔널(주)

자마
Zama
감독
루크레시아 마르텔
Lucrecia Martel

 

출연
다니엘 기메네즈 카쵸
Daniel Gimenez Cacho
마데우스 나츠테르가엘레Matheus Nachtergaele
후안 미누진Juan Minujin
로라 두에나스Lola Duenas
라파엘 스프레겔버드Rafael Spregelburd
카를로스 데페오Carlos Defeo

 

수입|배급 엠엔엠인터내셔널(주)
제작연도 2017
상영시간 115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일자 2021.08.26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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