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안 펫졸드] '피닉스' 복원과 재건 : 전후 독일의 자화상
[크리스티안 펫졸드] '피닉스' 복원과 재건 : 전후 독일의 자화상
  • 이지영
  • 승인 2021.07.2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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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과 재건의 갈림길에서 영영 상실한 것을 바라보다"

크리스티안 펫졸드(Christian Petzold)는 베를린파 1세대 감독으로 2000년대 이후부터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이번에 7년 만에 국내에 개봉한 영화 <피닉스>(2014)는 '독일 영화텔레비전 아카데미'(Die Deutsche Film- und Fernsehakademie Berlin, DFFB)에서 인연을 맺었던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 1944-2014)와 함께 시나리오를 집필한 공동 작업물이다.1) 영화는 종전 후에 파괴된 인프라의 재건, 홀로코스트 피해자 집단 재활과 나치 부역자 처벌, 시오니즘 운동이 일고 있던 전후 혼란기의 독일을 배경으로 한다. 개인과 사회의 문제는 서로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서로 공명하며, 특히 생존한 나치 부역자들에 대한 감독의 날카로운 시선을 투영하고 있다. 영화는 프리츠 바우어(Fritz Bauer, 1903-1968)에게 헌정되었는데, 그는 최초로 나치 부역자를 추적하고 법정에 세운 판사이다.

 

ⓒ 엠엔엠인터내셔널(주)

과거는 복원될 수 있는가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넬리(니나 호스)는 친구 레네(니나 쿤젠도르프)의 도움으로 수용소에서 심하게 훼손된 얼굴을 수술받고, 폭격 맞은 집을 대신할 거처를 구한다. 가족과 친척이 전쟁 중에 모두 죽어서 상속받은 유산으로 그녀는 수술을 받고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수용소에서 나온 넬리의 얼굴은 카메라에 담기지 않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군인의 얼굴만 클로즈업하여 보여줌으로써 얼마나 처참한 상태인지를 보여준다. 전후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넬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두 가지인데, 먼저 스스로 치유하고 정체성을 되찾아야 하며, 다음으로는 삶의 터전을 찾아야 한다. 친구인 레네는 넬리를 진심으로 조력하지만 이내 두 사람이 가진 가치관의 간극은 점차 타협할 수 없이 벌어진다. 그것은 바로 '파괴된 정체성을 복원하느냐, 복구하느냐'의 문제이다.

레네가 넬리에게 소개한 의사는, 이왕이면 인기가 많을 얼굴로 바꾸기를 추천한다. 즉 사회는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새로운 정체성을 가질 것을 개인에게 종용한다. 넬리는 여기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예전 얼굴을 반드시 되찾겠다고 한다. 레네 또한 은연중에 의사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예컨대 그녀가 넬리의 수술을 '재건 수술'이라고 불렀다가 '복원 수술'이라고 정정하며 사과하는 장면이 있다. 레네는 독일 사회를 떠나 팔레스타인과 텔아비브에 가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시오니스트이다. 즉 그녀는 "배신자는 이제 만나지 않겠다" 고 강경하게 말하며, 부역자가 은신하는 사회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인물이다. 또한 당대 이스라엘 건국이 유대인 사회의 큰 어젠다였음을 알 수 있다. 반대로 넬리는 독일에서 사는 것이 고통스러울지언정 자신을 배신한 전남편 조니(로날드 제르필드)와 모든 것을 암묵적으로 동조한 이들을 다시 정면으로 마주하고자 한다.

우리는 지난해 개봉한 펫졸드의 <운디네>(2020)에서 독일 연방의회가 21세기에 18세기 베를린 궁을 복원하기로 한 결정에 대하여 '옛것과 지금의 것이 같다고 주장하는 것은 속임수'라고 했던 '운디네'(폴라 비어)의 대사를 다시 상기한다. 부연하자면 역사의 진행은 비가역적이며 과거로의 복원은 단지 눈속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넬리라는 캐릭터에도 이미 투영되어 있다.(얼굴 성형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나지만, 넬리는 이것이 예전의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고 강하게 반발한다) 서로 다른 작품을 관통하는 이 메시지는 펫졸드의 생각과 의도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관객은 넬리의 이전 얼굴을 알지 못한다. 복원된 얼굴은 겉보기에 아름답고, 조니도 속을 만큼 과거의 자신을 닮기도 했지만, 정작 넬리는 그 정도에 그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가 반복하여 찾아가는 클럽 이름인 '피닉스', 즉 다시 살아나는 불사조에 대한 알레고리는 명징하다. 불사조는 부활했으나, 불사조의 일부분은 죽고 새로 태어난다. 거기에서 오는 혼란은 오롯이 혼자의 몫이다.

 

ⓒ 엠엔엠인터내셔널(주)

조니가 아닌 '요하네스'로 살아남다

넬리가 자신을 배신한 전남편 조니에게로 자꾸만 돌아가려는 충동은 이전의 삶을 통째로 되찾고 싶은 절박한 심정을 대변한다. 자신의 아내도 알아보지 못하는 조니는 또다시 기회주의적인 목적으로 '넬리가 넬리인 척하는' 연극을 계획한다. 그 과정에서 과거에 넬리라는 사람이 누구였지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남편이 자신을 여전히 기억하고 사랑한다고 그녀는 믿게 된다. 수용소에서 겪은 참화를 알지 못하는 조니는 아내의 예전 모습을 기억하며 그건 넬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처럼 보인다. 이러한 시도는 어딘가 위험한 질주처럼 보이지만, 정체성의 복원 같아 보이기에 넬리는 그와의 연극을 멈출 수 없다.

넬리는 남편을 '조니'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고 여전히 그렇게 부른다. 하지만 피닉스에서 조니는 예전 이름을 숨기고 '요하네스'라는 독일식 이름을 쓰고 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미국식 이름을 누가 들을까 두려워하는 것 같는 눈치이다. 이렇듯 한때 나치의 만행에 소극적으로 동조했던 조니는 미국식 이름을 버리고 평범하고 건전한 독일 시민으로 재탄생한다. 극한적인 수용소 생활은 하지 않았지만, 아내를 배신하고 마지막 인간성마저 저버린 조니의 자아의 한 면은 이미 죽은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전후 독일에서 소극적인 나치 부역자 집단을 처벌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극심한 식량난과 주택난 속에서 남아있는 것은 나치가 남긴 인프라 시설과 생존자들, 특히 전문가, 고위공직자, 기술자였고 이 중에 대다수는 나치 부역자였다. 이들을 처벌하거나 추방하기에는 남아있던 인적, 물적 자원마저 전부 포기함일 뿐이었다.

이 때문에 홀로코스트의 피해자 집단은, 역설적으로 또다시 소수자가 되어 이들 사이에서 괴롭게 살아가야 했다. 생존자인 레네와 넬리에게 돌아오는 질문은 "유대인이면서 어떻게 다시 돌아올 생각을 했냐"는 모독적이면서도 뻔뻔한 질문이다. 피해자들에게 전후 독일을 살아간다는 것은, 배신당한 기억과 고통받은 기억을 동시에 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넬리가 발견한 옛 사진 속에서 나치 부역자는 머리 위에 동그라미가, 죽는 자는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 것처럼 트라우마틱한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 인장으로 남는다. 이 때문에 차라리 과거를 등지고 대안을 찾아 떠나는 자들이 있었고, 그들을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레네이다. 그녀는 이제 독일 음악은 못 듣겠다고 말하며 미국의 재즈 음악을 듣는다. 그녀는 이제 독일인의 정체성을 버리고 미국의 문화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레네와 조니의 대비되는 태도는 전후의 국제정치적인 판세(미국의 이스라엘 지원의 역사)를 투영하기도 한다.

 

ⓒ 엠엔엠인터내셔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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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과 경멸

과거의 본인을 재현하는 연극을 한다는 이 설정은 <트랜짓>(2018)에서도 감독이 선보였던 카프카식 부조리를 보여준다. 인간은 타 존재를 쉽게 모방한다. 그것이 자신의 지인이든, 정형화된 인물 유형이든, 유명인사든, 동물이든, 대상을 잘 따라 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인 듯하다. 그리고 그 모방 대상은 자기 자신에까지 이른다. 간혹 우리는 연예인들이 과거 자신의 '리즈 시절' 모습을 재현해내는 장면을 보게 된다. 관객은 그것이 눈속임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복원된 과거에 열광한다. 그 시절의 공기를 느끼고 각자의 추억에 빠져들기 때문일 것이리라. 들뢰즈까지 인용하지 않더라도, 한 사람의 정체성의 이루는 핵심 요소들은 언제나 유동적이다. 현재의 자신과 과거 자신의 여집합, 즉 지금은 상실한 부분을 복구하는 것은 어쩌면 혼자서 정밀하게 해내기 어려운 작업이다. 어떨 때는 타인의 힘을 빌리고, 집단 기억과 조사를 필요로도 한다.

넬리의 상실감은 초반에 조니로 인해 어느 정도 메워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와 함께 하는 복원 작업이 속임수라는 것을 넬리는 연극을 준비하며 깨닫게 된다. 수용소에서 나온 사람이 빨간 드레스와 파리에서 산 구두를 신고 나왔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조니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눈에 당신이 넬리로 보여야 한다고,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기차에서 내렸을 때 지인들은 겉모습만 눈속임으로 위장한 '가짜 넬리'에게 쉽게 속는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피상적인 관계와 인간에 대한 몰이해를, 나치 수용소 피해자들에 대한 소시민의 무지와 위선을 낱낱이 밝힌다.

영화의 엔딩 씬은 넬리와 조니의 'Speak Low' 공연으로 끝맺음한다. 이때 넬리는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유일하게 잇는 교집합적인 부분을 끄집어내고, 그에 대한 조니의 리버스샷, 즉 충격과 혼란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카메라는 충분하다는 태도를 취한다. 부역한 자들에게 소수의 피해자들이 내릴 수 있는 처벌은 이렇듯 한 번의 조용한 경멸밖에 없다는 점이 씁쓸하게 다가온다. 그동안 텔아비브로 가기 위한 레네의 시도는 돌연 좌절된다. 그렇게 절망하고 자멸하는 사람들과, 서로를 경멸하면서도 끝까지 새로운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로 구성된 전후의 독일 사회는 실로 암담했을 것이다. 하지만 끝내 그런 방식으로 생존했고, 사회와 경제가 다시 융성해서 지금의 현대 독일에 이르렀다. 1964년도에 태어나 베이비부머 세대로 성장한 감독은 자신이 살아왔던 독일 사회의 근원적인 부채 의식에 집중한다. <피닉스>는 <운디네>와 <트랜짓>에서와 마찬가지로, 펫졸드는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카프카식 부조리와 고전적인 드라마 로맨스 장르―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사회·역사적 의식과 비판적 태도를 균형 있게 유지한다.

1) 윤종욱, <2000년대 이후의 독일 영화>, 산지니, pp.154-159

[글 이지영, karenine@ccoart.com]

 

ⓒ 엠엔엠인터내셔널(주)

피닉스
Phoenix
감독
크리스티안 펫졸드
Christian Petzold

 

출연
니나 호스
Nina Hoss
로날드 제르필드Ronald Zehrfeld
니나 쿤젠도르프Nina Kunzendorf
트리스탄 퓨터Trystan Putter
발레리 코흐Valerie Koch

 

수입|배급 엠엔엠인터내셔널(주)
제작연도 2014
상영시간 98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1.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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