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발적 살인으로 홋카이도의 한 감옥에서 13년 동안 복역한 전직 야쿠자 '미카미'(야쿠쇼 코지)가 출소한다. 그는 더는 뒷골목 건달이 아닌 어엿한 사회인으로 직업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지만, 특별한 기술이 없을 뿐만 아니라―심지어 운전면허증도 복무 중에 만료됐다―성미가 급하고 폭력적인 성격 탓에 일을 그르치기 일쑤다. 다행히 그를 믿는 지인 부부, 동네마트 사장과 동사무소 직원 등 따뜻한 이들의 도움으로 도쿄 변두리 낡은 아파트에서 사회 복지 수당으로 생활하면서 구직을 포기하지 않고 버티어 나아간다. 그러던 와중 어렸을 적 보육원에 자신을 두고 떠난 어머니를 찾으려 TV 다큐멘터리 출연을 요청하고, 다큐멘터리 감독 쓰노다는 그의 일상을 촬영하게 된다.
우선 언급하자면, <멋진 세계>는 야쿠자 영화와 거리가 멀다. 이 작품에는 유혈사태나 조직 간의 패권 다툼은 나타나지 않는다. 영화는 오직 한 전과자가 사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드라마만을 욕망한다. 앞서 니시카와 미와 감독은 이 작품을 두고 "인간적인 삶을 살기 위해 어떻게 사회를 반전시켜야 할까? 어떤 사회가 우리를 존중하고 우리의 존엄을 지켜줄까?"라고 물음을 가지며, 영화 속에서 그 답을 얻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여기서 의문은 감독이 던진—작품을 통해 나타내고자 한—이 물음은 '과연 영화와 맞닿아 있는지'이다. 그 이유는 영화가 '인간적인 삶을 보장하기 위한 현대 사회에 대한 고민'과 '전과자에 대한 사회편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멋진 세계>가 야쿠자이자 전과자인 미카미라는 인물을 그려냄에 있어, 낭만주의적인—어쩌면 신파적으로 느낄 만한—서사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순간들이 대표적인 예다. 더 정확하게는 범죄자로서의 삶에서 벗어나 법을 준수하는 시민으로 사회에 들어서기 위한 주인공 미카미의 고군분투기가 사회적 시스템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내면의 드라마에 더 초점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감독은 유머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관객의 정서를 스크린에 더욱더 밀착하게 한다. 더군다나 미카미가 십대 이후 한 번도 본 적도 없는 어머니를 찾으려 하는 과정은 앞서 언급한 '전과자에 대한 사회편견'을 극 내 인물들뿐만 아니라 관객에게 또한 지워내고자 하는 의도가 분명하다.
물론, <멋진 세계>는 위와 같은 '미카미를 그려냄'보다, '그를 향한 시선'에 대해서 좀 더 곱씹게 만든다. 사회라는 유기체에게 분명 미카미는 '손님'(초대객)이지만, '현대'라는 사회를 이룬 공동체 집단에게 있어서 '이방인'이면서 동시에 전과를 가진 자이기에 '침입자'로 보일 수 있는 불청객이나 다름없다. 미카미가 사회 복지 수당을 신청할 때 받게 되는 불신에 찬 시선이나 마트에 장을 보다가도 언제든지 도둑으로 몰릴 수 있는 의심의 눈초리는 그에게 당연한 것으로 주어진다. 소음과 쓰레기 문제로 아랫집과 다투는 과정에서 엄격히 피해자인 그는 상대방이 내지르는 "야쿠자다!"라는 소리 한 번에 동네이웃들로부터 야유와 함께 혐오의 시선이 향하는 것만으로도 사회 안에서 그의 위치를 명징히 보여준다.
심지어 영화는 극중 인물들을 통해서 미카미를 향한 관음증적인 시선을 주기도 하는데, 쓰노다와 요시자와가 그를 만나기 전에 그의 집 현관문 신문투입구로 은밀하게 보는 장면이나 불량배와 거칠게 싸우는 미카미의 모습을 몰래 숨어서 카메라에 담으면서 지켜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 같은 미카미를 향한 시선에는 '그가 언제든지 다시 범죄자가 될 수 있다'는 의심의 싹이 트여 있는, 즉 불확실함내지는 불안함이 내포되어 있다. 여기서 흥미롭게 다가오는 건, 미카미는 그를 향한 시선에 대해서 무관심하면서도 정반대의 위치에서 충돌을 한다. 그게 어느 누구든 자신의 일처럼 나서고 자신의 공간(집)으로 기꺼이 들이는 미카미의 태도에는 '환대'가 녹아 있다.
<멋진세계>의 서사는 '미카미는 어디로 가야하는가'(그의 새로운 삶이 머물 영토는 어디에)라는 물음, 결과적으로 "어디?"라는 지리학적 물음의 답이 있는 곳으로 끌고 간다. 이 물음은 장소를 넘어서 무(無)장소에 이르는 '어딘가로 향하는 움직임'에 이른다. 어렵사리 한 복지센터에 취직한 미카미는 과거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데, 함께 일하는 한 자폐증 동료가 다른 동료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헐뜯는 상황을 모른 척하며 그들의 장단에 맞춰 호응을 하는 것이다. 이때 카메라는 미카미의 모습(특히, 얼굴)을 꽤 긴장감 있게 담아낸다. 결과적으로 자폐증 동료를 위해서 나서야 하나 참아야 하나 갈등하는 그의 몸짓은 이 영화가 도달한 물음의 종착지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물음은 영화와 함께 운동을 하며, 미카미의 몸짓과 끊임없이 동화되려 한다. 면허도 딸 수 없고, 어엿한 자격증도 하나 따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미카미는 야쿠자인 고향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자신이 자란 보육원에 가보기도 하면서 방황을 한다. 그러고는 미카미가 누군가를 더는 기꺼이 환대할 수 없는 곳에 도달하고 나서야 영화는 천천히 막을 내린다. 지병을 앓고 있는 미키미가 갑작스럽게 죽은 것은, 더욱이 자폐증 동료가 퇴근길에 준 '꽃'을 받은 그날 하필 죽음을 맞이한 것은, 병적인 이유보다 '그가 동료를 위해서 기꺼이 나설 수 없음에 대한 죄책감 내지는 무력함'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리고 앞으로 자신의 삶을 더는 변화시킬 수 없는 무능력함도 함께.
'폭풍우 속에서 꽃을 구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미카미에게 '꽃을 구할 수 없다는 것'—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은 자유를 잃은 것과 마찬가지다. "환대 행위는 시적일 수밖에 없다"는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말이 떠오르는 <멋진 세계>는 카메라를 다채롭게 사용하여 원근법적인 시선으로 '미카미'라는 인물을 그려내고 관찰한다. <유레루>(2006), <아주 긴 변명>(2017) 등으로 이미 널리 알려진 니시카와 미와 감독의 여덟 번째 장편영화인 <멋진 세계>는 사키 류조의 소설 '신분장'을 각색한 작품으로, 영어 제목인 'Under The Open Sky'의 뜻처럼 열린 하늘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의 희노애락을 따뜻하게 담아내면서, 한글 제목인 '멋진 세계'라는 단어에 따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살만 한 가치가 있는 멋진 세계인지 묻고 있다.
[글 오세준, yey12345@ccoa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