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아녀' 시대를 등지고 '강호'에 남은 사람들
'강호아녀' 시대를 등지고 '강호'에 남은 사람들
  • 이지영
  • 승인 2021.07.07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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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장된 세계관 속에 무협극과 현실극 사이를 배회하다"

1. 강호의 아들과 딸

지아장커(Jia Zhangke) 감독의 2018년 작 <강호아녀>는 강호의 아들과 딸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강호'는 단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데, 세상을 비유적으로 의미하기도 하며, 은자나 시인이 현세로부터 도피하여 은거하던 곳을 의미하기도 한다. 영화에서는 차오(자오 타오)와 빈(리아오판)이 2000년대 초반을 호령했던 산시성 다퉁시 일대를 부르는 말이기도 하고, 그 시절의 사람들이나 그들이 따른 행동 원리와 규율까지도 모두 아울러 '강호'라고 부른다. 영화의 오프닝은 버스를 탄 평범한 인민들의 얼굴을 롱테이크로 찍는다. 마치 산시성 출신인 감독의 자전적 기억을 투영하듯, 1.33:1 비율의 화면비로 다큐멘터리 푸티지와 같이 사실주의적으로 촬영, 편집되었다. 차오와 빈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인민들의 얼굴을 자세히 보여주는 것은 이 이야기가 단지 두 남녀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시절을 살아간 모두의 이야기임을 암시하는듯하다. 좀 더 확장된 1.88:1 화면비로 보여주는 다음 밤무대 씬은, 차오와 빈이 몸담고 있는 조직이라는 한층 확장된 세계를 보여준다. 이 씬에 등장하는 인민들은 주로 노년층으로 중국의 전통 노래와 여흥을 즐기고 있는 구세대를 대변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 에스와이코마드


차오의 내부자적 시선으로 본 조직의 모습은 모두가 크고 작은 범죄에 가담할지언정 서로에게는 형제로서의 의리를 지키고 빚진 것은 반드시 갚는다는 성문화되지 않은 불문율을 따르고 있다. 작은 시골 도시에서 이 모든 것을 관장하는 것은 조직의 보스인 빈이다. 90년대 개방 경제로 전환한 이후 중국에서는 중앙정부와 공권력의 힘이 아직까지 미치지 않는 낙후된 작은 시골 도시에서 불법 조직들이 지방 경제를 장악하고 있었고, 무법지에서 서로가 공멸하지 않도록 최소한의 규칙을 정해놓은 것이 강호의 규율이었다. 부하 둘이 채무 때문에 싸우게 되자, 빈은 관우신을 앞에 두고 스스로 법을 집행하는 집권자의 역할을 한다. 빈의 권력 행사의 근거는 법적인 권리도 경제권의 행사도 아니며, 관우신이 상징하는 전통과 과거의 인습에 기대고 있다. 이처럼 강호의 도리란, 무법지의 카오스를 막기 위해 암암리에 모두들 따르고 있던 관습적인 생존 원칙이었다.


시대가 저버린 사람들의 현실을 치열하게 담아왔던 지아장커 감독의 작품인 만큼, 영화에서 묘사하는 강호 또한 급변하는 세월 앞에 속수무책으로 사장될 운명에 처해있다. 차오의 아버지가 광부로 근무하는 산시성은, 지역 경제 전체가 석탄 산업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2000년대 이후부터 석탄 가격의 급격한 저하, 치솟는 실업률과 대도시로의 인구 유출, 전국적으로 가장 심각한 오염 문제로 몸살을 앓았다[1]. 광산국이 신장으로 이동한다는 소문이 돈다고 할 때, 차오는 신장이라는 새로운 땅에 이주하여 차오와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것을 암시하지만 빈은 이를 외면한다. 그에게 강호는 본인 스스로가 규율이 되는 세상이며, 누군가가 끌어내리기 전까지는 자신이 군림하고 있는 세상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경제사범을 도와 받은 대량의 현금을 눈앞에 두고도 "형제들에게 밥 한 끼 사"라는 겸양있는 인사치레 말로 사양하고, 자신을 잘못 오해하여 린치한 젊은이들은 가혹한 대질심문 없이 풀어주는 빈은, 한편으로는 대인배와 같은 덕을 갖춘 사람으로 비치지만, 또 한편으로는 냉혹한 현실에 대한 대비가 없는 위태로운 왕처럼 보인다. 빈은 몰락하는 강호를 지키고 부흥시키는 무협자라기 보다는 그 안에 은둔하는 '시인'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대사에서 그는 실제로 '시인'으로 불린다) 이후에 빈의 조직원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습격들은 모두 익명의 젊은 갱단 무리들이 행하는 것으로, 세대 간 권력의 폭력적인 이행과 피할 수 없는 냉엄한 현실을 보여준다. 빈의 세대는 법의 사각지대에서도 나름의 정의와 질서를 세우고 인정을 베풀 줄 아는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면, 후세대는 권력과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드는 무모함을 특징으로 한다.

ⓒ 에스와이코마드
ⓒ 에스와이코마드

2. 수몰하는 도시의 풍경

한 결정적인 사건을 계기로 차오와 빈의 운명은 갈린다. 차오의 시간만 멈춰있고 세상에서 상전벽해가 일어나는 5년이 흐르는 사이, 빈은 강호를 떠나 그가 못이기는 척 사양했던 자본주의 세계와 손잡고, 수감을 마치고 찾아온 차오의 연락을 일방적으로 받지 않는다. 한편으로 차오는 늘 그랬듯이 빈에게 먼저 다가가는데, 그 과정에서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역으로 남을 이용하기도 하면서 그를 찾게 된다. 기존 무협 영화에 나오는 비현실적이고 기상천외한 전개가 아님에도, 현실에 굳건히 발붙인 채 차오가 절묘하게 기지를 발휘해 나가는 모습은 마치 현대판 무협지를 연상케 한다.

차오가 도둑을 맞아 모두 돈을 잃고 망연하게 거리의 공연을 보는데 우리에 갇혀있는 호랑이와 사자는 차오가 인식하는 빈과 그녀 자신의 처지를 투영하고 있다. 어느 비 오는 밤, 과거의 호방한 기세를 잃은 강호의 두 맹수는 우여곡절 끝에 좁은 우리 같은 방 안에서 대면한다. 차오는 자신은 강호를 떠났다는 말을 빈의 입으로 직접 듣는다.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자 자신의 옛 연인에게 면회 한번 오지 않은 그의 배은망덕한 태도나, 다시 강호로 돌아가지 않는 별 볼 일 없는 이유들, 심지어는 새로운 연인이 생겼다고 직접 고하지도 못하는 비겁함은 그가 더 이상 차오의 기억 속 빈이 아님을 매분 절절히 알려준다. 그런데 이 때 차오의 반응을 보면, 영화는 평이한 멜로 드라마의 서사를 따르고 있지만 전혀 평범한 연인들의 감정선을 따르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처지를 자조하면서 회복할 수 없도록 망가져 버린 빈에게 차오는 직접적인 원망의 말도, 아직 사랑한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차오가 빈을 위해 감행했던 희생은 단지 한 남자에 대한 연정의 차원을 넘어서는 강호의 도리의 연장선에 있다. 그녀는 강호의 주변부에 있었지만, 그 이치를 삶으로 직접 실천함으로써 강호의 딸이 되고자 한다. 차오가 망가진 빈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연인에 대한 애증 이상으로 어쩔 수 없이 변해버린 세월에 대한 무상함과 슬픔이 함께 깃들어있다.

3. 두 갈래 길, 다시 강호의 세계로

이제 차오는 상실한 시절을 뒤로하고 신장이라는 새로운 개척지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인가? 과거에도, 현재에도 머무를 수 없는 그녀는 무작정 어두운 기차에 몸을 싣고 미래로 향한다. 이윽고 차오는 기차 같은 칸에 탄 호객 기질이 있는 남자가 그려주는 허황된 미래상을 듣게 된다. 정부가 신장 관광 사업에 거액의 돈을 투자하고, 본인은 UFO 관련 사업을 한다는 남자의 말에 차오 뿐 아니라 기차 안에 있던 다른 이들 또한 솔깃하게 바라본다. 그러나 이윽고 남자가 밝힌 자신의 현실은 근처 도시에서 조그만 매점을 운영한다는 것이다. 차오는 담담하게 상관없다고 답한다. 차오에게는 어떤 신기루 같은 미래의 청사진도 UFO만큼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둘은 무차별하다는 뜻이다. 개혁개방 이후 고속성장기를 거치고 체제는 여전히 폐쇄된 중국에서는 많은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고 은닉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기차에서의 대화와 UFO 장면은 어떠한 현실이 닥쳐오든, 생존을 위해서라면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인민들의 심리상태를 은유하는 장치이다.

 

ⓒ 에스와이코마드

현실에 빼앗긴 강호의 세계(빈)를 되찾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미래(신장)로 가서 새로운 청사진을 그리는 데도 실패하면서 차오는 변한듯 변하지 않은 강호로 돌아온다. 그리하여 이제 연소되어 하얀 재로 남은 기억을 품고, 끝까지 '강호의 딸'로 남기로 한다. 그녀는 경제 활동이 어려워져서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던 조직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으고 완전히 몸과 정신이 망가져서 돌아온 빈을 받아들인다. 위에서도 한번 짚었듯이, 차오가 옛 연인인 빈을 다시 받아들이고 그의 재활을 돕는 것은 옛 연인에 대한 측은지심과 애증을 넘어서는, 일종의 의협심을 바탕으로 한다. 무질서한 혼돈에서 차오가 스스로 조직의 중심이 되어 질서를 다잡는 모습은 다퉁시의 겨울 풍경처럼 쓸쓸하지만, 끝까지 위엄을 잃지 않는 자의 최후는 경건함마저 자아낸다. 도식적인 지적일 수 있으나 강호가 석탄과 화산, 총이라는, 뜨거운 불의 이미지로 그려졌다면 5년 동안 수감된 뒤에 차오가 마주한 세계는 도시 전체가 수몰될 운명에 놓이기도 하고, 비가 퍼붓는 등 물의 이미지가 지배적이다. 마지막 돌아온 강호는 겨울의 찬 서리, 하얗게 타버린 재의 이미지로 가득하다. 흰 색채와 재의 은유는 젊은 날의 열정을 모두 태우고 재로 남을지라도 세월의 풍파와 속에 그대로 잠겨 죽지는 않으리라는 인물의 결연한 태도를 상징한다.

여기까지 살펴본 바로, <강호아녀>는 전작 <산하고인>(2015)의 멜로드라마적인 성격에 무협극, 또는 느와르의 성격을 더하였다. 또 한편으로 <스틸 라이프>(2006) 시절부터 지아장커 영화의 DNA처럼 이어져오고 있는 사실주의적이고 다큐멘터리적인 색채와 픽션이 접목되면서 장르영화의 문법과 사실주의 기법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 <천주정>(2013)에서 <산하고인>그리고 <강호아녀>로 이어지는 3부작에서 지아장커 감독은 <스틸라이프> 시절만큼 치열한 현실고발을 전면적으로 내세우는 대신, 점차 화면비를 더 넓혀가듯이 세계관을 점차 확장해간다. 이 세계 안에서 태어나는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인물들은, 무협극 캐릭터의 고전적인 비장미를 갖는 동시에 현대적인 생명력과 현실감 또한 잃지 않는다. 이렇게 확장된 세계관은 UFO로 대변되는 우주적인 요소까지도 포함하게 되는데, UFO마저도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비현실적인 것이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여지는 이 장치들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어야만 하는, 어떤 불가능할 법한 일도 현실에서 가능할 수 있는 한 사회를 은유함에 다름 아닐 것이다.

[글 이지영, karenine@ccoart.com]

 

ⓒ 에스와이코마드
ⓒ 에스와이코마드

강호아녀
江湖儿女
Ash Is Purest White
감독
지아장커
Zhang Ke Jia

 

출연
자오 타오
Zhao Tao
랴오판Liao Fan
서쟁Zheng Xu
펑 샤오강Feng Xiaogang
댜오 이난Diao Yinan
장이바이Yibai Zhang
장역Yi Zhang
동자건Zi jian Dong

 

수입|배급 에스와이코마드
제작연도 2018
상영시간 135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1.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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