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디'는 원작 피터팬에 대한 전복적 서사다
'웬디'는 원작 피터팬에 대한 전복적 서사다
  • 이현동
  • 승인 2021.07.0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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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동심이란 엔진을 달고 도착한 현실이란 딜레마"

<비스트>(2012)로 평단에 주목을 받았던 '벤 자이틀린'의 두 번째 장편인 <웬디>는 피터팬의 이야기를 각색하여 도전적인 해석과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비스트에서 핸드헬드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생동감 있게 묘사하는 데 주력했다면, 웬디에서는 그보다 더욱 광활한 쇼트들과 보다 더 직관적인 주제의식을 갖고 인물과 배경을 조명한다. 이 두 영화를 토대로 살펴본 벤 자이틀린의 주된 관심은 '인간의 야생성'이다. 비스트에서 허쉬파피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칼을 사용하여 게를 자르지 않고, 야생성을 발휘해 손으로 뜯어 먹으라 지시하고, 웬디에서 피터는 아이들을 일부로 기차에서 거세게 밀어 물에 빠뜨린다. 야생성은 마치 불균질적인 파동의 형태로 자연의 에너지를 발산하고, 이내 영화의 메시지가 되어 관객들을 휘감는다. <웬디>에서는 피터팬의 원형적 서사를 극복하는 방식으로 전복적 이미지와 상징을 활용하는데, 이러한 방식은 이전 작품인 <비스트>보다 감각적으로 정교하고, 정서적으로도 정밀하게 잘 세공된 것처럼 느껴졌다.

일반적으로 동화 '피터팬'은 원형적인 서사로 대중들에게 각인되어 있다. 악당인 후크선장을 물리치는 정의로운 피터팬과 네버랜드로 떠난 아이들의 어머니의 역할을 수행하는 '웬디'의 이야기가 바로 그러하다. 이는 전형적인 영웅서사이며 상투적인 성 관념에 대한 시대적 물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실제로 벤 자이틀린 감독은 인종 차별적이며 성차별적인 원작의 캐릭터를 다시금 살펴보고 싶다고 인터뷰한 바가 있다. 그의 의도대로 <웬디>에선 이를 극적으로 저항하는 것처럼 보인다. 제목이 피터팬이 아니라 여자인 웬디라는 것도 그 실례이며, 피터는 백인이 아닌 흑인이라는 측면 또한 이를 대변한다. 영화에선 신화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던 팅커벨과 후크 선장을 뒤쫓는 악어와 같은 환상의 이미지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삶에 쫓기듯 식당에서 엄마를 도와 서빙을 하는 웬디의 현실적인 측면이 더욱 강조된다.

 

ⓒ 영화사 진진 , 하이, 스트레인저
ⓒ 영화사 진진 , 하이, 스트레인저

어른들은 웬디와 아이들을 향해 본래 정해진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며 삶의 한계를 규정짓지만, 웬디는 반발한다. 이윽고 엄마의 꿈은 무엇이냐고 묻는 아이들의 질문에 '내 자식을 잘 키우는 것'이라 말하는 대답을 듣게 될 때 우리는 이전에 피터팬에서 체험했던 동심의 기억이 일순간 숙연함으로 변하고 만다. 당연하게 규정되어 있는 삶의 방식들은 노화라는 필연적 과정으로 인해 고착화되었음을 상기시키고, 이내 생기를 잃어버린 이들에게 호소하는 일종의 사명감으로 영화는 끊임없이 말을 한다. 환상의 서사를 뒤로한 채 그들은 하늘을 향해 날지 않고 바다를 향해 날아가고, 문명사회의 교두보 역할을 해왔던 기차를 타고 자연 세계를 상징하는 네버랜드와 현실 세계를 오가면서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잊고 있었던 삶의 동기에 생명력을 부여하며 모험의 한복판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웬디>는 원작이 갖지 못했던 무수한 삶의 공백들을 전복적으로 채워 놓으면서 네버랜드에 대한 진실을 파헤친다.

 

네버랜드는 이제 꿈이 실현되는 곳이 아닌 '꿈을 깨는 장소'

원작 피터팬에선 네버랜드를 이렇게 묘사한다.

"행복한 나의 꿈이 실현되는 곳, 내가 꾸는 모든 꿈이 실현되는 곳"

네버랜드는 '동심'으로 점철되어 있는 무의식의 메타포다. 즉, 동심이란 잠재태로 정신적 세계와 더욱 밀접하다. 원작에 네버랜드는 동심을 '꿈'으로 강조하는 무형의 형태를 관습적인 방식으로 드러냈다면, 웬디에선 그 공간을 '현실'로 존립하는 유형의 형태로 존재하게 했다. 벤 자이틀린 감독은 이 지점을 연출하기 위해 야성적인 아이들을 캐스팅하려고 노력했고, 자연 그대로의 경관을 충만하게 표현하기 위해 서인도 제도의 화산섬 몬트세라트에서 실재하는 공간을 찾았다. 이를 통해 네버랜드는 감독의 의도에 따라 구체화되어 <비스트>에서 선사했던 찬란한 야생의 현시를 또 한 번 관망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영화의 주요 관람 포인트이기도 하다.

 

ⓒ 영화사 진진 , 하이, 스트레인저
ⓒ 영화사 진진 , 하이, 스트레인저
ⓒ 영화사 진진 , 하이, 스트레인저
ⓒ 영화사 진진 , 하이, 스트레인저

먼저, <웬디>에서 슬픔으로 인해 노화가 진행된다는 점을 유심히 관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디와 쌍둥이 형제인 '더글라스'(게이지 나퀸)와 '제임스'(게비 나퀸)는 침몰되어 있는 배를 발견하고 그 안을 탐사하던 중에 더글라스가 행방불명 된다. 이로 인해 제임스는 슬픔을 금치 못하고, 피터가 말한 규칙에 의해 노화가 진행된다. 피터는 다음과 같은 규칙을 말했다. '머뭇(의심)거리거나 슬픈 생각을 하면 늙어 버린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지나친 동심에 대한 '강박'을 갖고 있는 피터와 나이 들어감을 '모험'으로 주장한 웬디 사이에서의 정신적 갈등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는데, 이후에 네버랜드는 이내 병들어 버린 생태계와 정신적인 갈등을 구분하는 시퀀스로 자연과 폐허가 된 도시, 지상(밖)과 물(안), 아이와 노인, 제임스의 오른손과 왼손과 같은 이미지를 비춘다.

이러한 양상은 꿈-현실을 실재화하는 소품이 된다. 이러한 실재화는 영화적인 성취로 감독의 의도와 호응하며 꿈이 현실로 이행하는 구도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꿈과 현실의 대비, 즉 피터와 웬디의 대비는 지나치게 명시적이다. 어린 시절 피터팬에 감격했던 동심은 꿈을 현실(굳이 말하자면 노화 혹은 성장)로 환원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동심을 가장한 웬디의 외침은 동심의 것이 아닌 것처럼 들린다. "늙는다는 것은 위대한 모험이야!"라고 의미심장하게 말하는 그녀의 몽타주는 묘하게 설득력이 없다.

소급해서 보면 피터팬이 주는 감동은 꿈을 '그대로' 두는 것이었다. 꿈이 현실이 되자 결국 동심은 소멸되고, 꿈을 깨고 나와 버린 이질적인 현실을 마주하게 되는 그 순간 결국 부유하는 것은 영화의 전복적 서사를 이끄는 '이미지'들뿐이었다. 아쉽게도 희망을 연료 삼아 달리는 웬디라는 열차는 동심을 복권하지 못한 채 '꿈'이라는 경로를 이탈하고 말았다. 현실이란 목적지는 피터팬(Peter Pan)을 동경해 왔던 팬(Fan)에게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웬디>의 화법은 강렬하고 인상적으로 다가오지만 피터팬의 동심이란 건 누군가에겐 거대한 우상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듯 함께 영화를 감상하고 난 후 관객들의 알 수 없는 표정이 스크린에 반사되며 영화는 막을 내렸다.

[글 이현동, Horizonte@ccoart.com]

 

왠디
Wendy
감독
벤 제틀린
Benh Zeitlin

 

출연
데빈 프랑스
Devin France
야슈아 막Yashua Mack
게이지 나퀸Gage Naquin
개빈 나퀸Gavin Naquin
아마드 케이지Ahmad Cage
크쉬슈토프 메인Krzysztof Meyn
로미리 로스Romyri Ross
로웰 랜디스Lowell Landes

 

수입 영화사 진진
배급 영화사 진진·하이, 스트레인지
제작연도 2020
상영시간 111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1.06.31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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