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애플'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 이지영
  • 승인 2021.06.22 1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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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 이후 잊어야 한다는 모순된 마음의 여정"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내 텅 빈 방문을 닫은 채로

아직도 남아 있는 너의 향기

내 텅 빈 방안에 가득 한데

(중략)

창틈에 기다리던 새벽이 오면

어제보다 커진 내방 안에

하얗게 밝아온 유리창에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

 

김광석,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中에서

 

김광석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라는 노래에서 "어제보다 커진 내 방 안에"라는 가사가 눈에 띈다. 가사를 곱씹어보면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화자가 인정하지 않으려 할 때, 그 텅 빈 공간만큼 방의 크기가 커지는 초현실적인 장면을 상상해볼 수 있다. 이렇듯 누군가의 부재를 끝내 인정해버리지 않으려는 의지와 이제는 잊어야 한다고 스스로 타이르는 마음이 한 노래 안에서 서로 상충하고 있다. 그런데 결국 그 마음이라 함은 자연스럽게 '잊히는' 마음도, 굳은 의지로 '잊으려는' 마음도 아니다. 잊어야 한다는 마음은, 이제 때가 되었음을 알지만 정작 떠나보낼 준비가 안 된 자의 모순되고도 고통스러운 마음이다. '잊어야 한다'는 당위를 생각하면 할수록 그 대상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은 한층 또렷해진다.

크리스토프 니코우 감독의 <애플>도 이런 모순된 심리와 그에 따라 매번 생성하거나 소멸하고 덮어 씌워지는 기억의 양상을 다루고 있다. 주체의 의지에 따라 기억들은 선별되어 살아남거나 버려진다. 우리는 영화 내내 강박적으로 사과를 고르고, 깎아서 먹고, 다시 새로 사는 주인공의 행동에 주목하게 된다. <애플>은 그리스어 원어로는 <Μήλα>, 영역으로는 <Apples>로, 둘 다 직역하면 <사과들>이다. 주인공은 끊임없이 신선하고 맛있는 사과를 채우고, 그것을 먹어 치운다. 어떤 때 그는 온통 물러버린 사과를 차마 어쩌지 못하고 다시 내려놓는다.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지는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 (주)다자인소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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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의 3단계

영화에는 어느 날 전염병에 걸린 것처럼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들이 등장한다. 주인공 알리스(알리스 세르베탈리스) 역시 버스 안에서 기억을 잃고 입원을 하게 되는데, 신원 미상에 가족을 찾을 수 없자, 새로운 경험과 추억, 자아를 만들어주는 "인생 배우기"라는 프로그램을 권유받는다. 이 프로그램은 원래의 삶을 무화(無化)하고, 프로그램화된 기억을 개인들에게 심어준다. 프로그램은 크게 세 파트, 유년기, 청년기, 그리고 노년기와 죽음으로 나뉘고, 인물들은 각 단계의 경험을 하면서 매번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경험을 했다는 증거 기록을 남긴다.

처음 검사를 받는 시점의 알리스는, 말을 배우기 전의 유아기 아동처럼 언어를 잃어버린 상태이다. 비슷한 사물을 혼동하기도 하고(주사위와 축구공), 마치 엄마와 아빠에게 낱말을 맞혔다고 자랑스럽게 웃음을 지었다가, 틀린 것을 알고 이내 실망해서 웃음을 거두기도 한다. 처음 두발자전거 타기, 분장을 하고 파티에 가기, 스트립쇼에 가기, 영화관에 가기와 같은 미션 또한 보통 사람이 청소년기를 거치며 한 번쯤 겪었을 법한 일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인생을 리셋했지만, 여기엔 최초의 흥분이나 설렘도, 내밀한 기쁨도 없다. 주인공은 자각 없이 주어진 숙제처럼 추억 쌓는 일을 수행할 뿐이다.

 

2. '찰리 코프만'에 대한 레퍼런스

사회 시스템과 개인 관계라든가, 특히 영화 초중반에 블랙 코미디적 요소가 들어간다는 점에서 같은 그리스 출신의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크리스토프 니코우 감독 스스로 영화 <트루먼 쇼>(1998), 그리고 각본가이자 감독인 '찰리 코프만'(Charlie Kaufman)에게서 영향을 받았음을 인터뷰에서 직접 밝힌 점을 주목할 만하다. 최근작 <이젠 그만 끝낼까 해>(2020)에서 코프만은 한 사람의 무의식을 헤집고 들어가 어린시절의 기억과 뒤틀린 욕망, 상실한 꿈을 단 하루의 여정을 통해 심리·공포·스릴러로 그려내는 각본과 연출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아울러 2004년에 그가 각본을 맡았던 미셸 공드리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2004)은 아픈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과 그 기억이 지워지지 않길 바라는 모순된 심리를 섬세하게 표현하여 <애플>의 주제의식과 가장 맞닿아 있는 코프만의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주)다자인소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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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적인 소품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여 때로는 서정적인 드라마로, 때로는 기발한 코미디로 표현하였다는 점도 공통분모라고 할 수 있다. 알리스가 들어간 병원 시스템이 때로 지상 세계가 아닌 시간을 초월한 공간처럼, 또 강압적이지 않은 '인간적'인 환경이라고 느껴질 수 있는 것은 이런 아날로그성 덕분일 것이다. 병원의 지침은 오래된 카세트테이프를 통해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낡은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한 번뿐인 순간을 기록한다. 또 기계가 구식이기 때문에 서로 사진 찍는 것을 살뜰히 돕기도 한다. (핸드폰 카메라로 셀카를 찍는다는 설정이었다면 디스토피아적이고 고립된 느낌이 강했으리라) 그래서일까. 빛바랜 폴라로이드 사진은 인위적인 기억일지언정 원초적인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방심하는 사이에 프로그램화된 기억은 진짜 기억, 즉 원래 삶의 자리를 넘본다.

 

3. 사과의 썩은 부분 도려내기 : 씬과 씬 사이의 단절이 의미하는 것

이렇게 '인생 배우기' 코스에 익숙해지던 알리스의 일상에 균열을 내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가 영화관에서 안나(소피아 게르고바실리)를 만나고 나서부터 그는 몸으로부터 이전 삶을 기억하기 시작한다. 운전을 할 줄 아는지 여부를 자신이 모르는 채로 그들은 차에 올라타 몸이 기억하는 방식으로 운전을 한다. 안나는 영화 <타이타닉>(1997)의 줄거리를 읊고, 알리스는 차에서 나오는 노래를 무의식중에 흥얼거린다. 프로그램으로 주입되던 무미건조하고 조작된 기억의 틈새를 뚫고 몸속에 체화된 기억들이 흘러나온다. 안나의 폴라로이드 필름이 떨어졌을 때, 알리스는 안나에게 음식을 해두었으니 좀 더 있으라고 제안한다. 그가 프로그램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충동에 의해서 행동하려고 하는 것을, 비정형적이고 혼란스러운 진짜 삶으로 돌아가고자 함을 알 수 있다. 이제 남들이 봐도 상관없었던 기억은 나만의 것이 되어야 하고, 안나와의 만남은 공유하고 싶지 않은 특별한 만남이 된다. 그녀를 따라 댄스파티에 간 알리스는 한동안 고민 끝에 같이 춤을 춘다. 그런데 안나가 화장실로 그를 불러 유혹하면서 갑작스럽게 씬이 끝난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씬은 다시 텅 빈방 안에 홀로 누워있는 알리스의 옆모습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는 뒤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지만, 이렇듯 급작스럽고 의도적인 씬과 씬 사이의 단절과 '술을 먹어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변명하는 듯한 알리스의 태도는 그날 안나와의 기억이 의도적으로 삭제되었음을 암시한다. 이 공백은 영화의 도입부에서도 이미 한번 일어났던 단절을 상기하도록 한다. 바로 알리스가 집 밖으로 나가서 꽃을 사서 거리를 걷다가, 바로 버스 안에서 잠에서 깨는 숏으로 연결되는 장면이다. 이 두 번의 단절은 왜 생겼는가? 정말 기억상실을 일으키는 병 때문인가? 사실은 알리스의 의지인가? 영화는 이 부분을 모호하게 짚고 넘어간다.

 

ⓒ (주)다자인소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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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애플>의 희극성과 비극성

이제 노년기에 이른 프로그램은 죽음이 임박한 환자의 말동무가 되어주라는 마지막 지침을 내린다. 죽음을 마주했을 때쯤 알리스는 기억을 거의 되찾아 간다. 그리고 죽어가는 노인 앞에서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시인한다. 이렇듯 서사는 사과껍질을 빙 둘러 깎고 일부 도려내기도 하며 최종 핵심부로 다가간다. 방치한 집안에서 썩어가고 있는 사과들은 짓물러가는 아픈 기억에 다름 아니다. 온통 짓무른 사과 하나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도로 내려놓고, 알리스는 다른 사과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고 한입 베어 문다.

알리스가 스스로 망각에서 깨어나 원래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한 것인지, 아니면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이 의도대로 그를 인도했는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어찌 되었든 새로운 자아를 만들면서까지 도망치고 싶었던 곳에서 나와서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주인공의 최종적인 운명은 비극적이다. 또한, 영화의 끝과 시작이 하나로 맞물리면서 어쩌면 망각과 기억의 여행이 영원히 반복될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그로 인해 비극성이 한층 강화되기도 한다.

이미 살펴보았듯 니코우의 <애플>은 코프만의 영화들이 천착하는 주제와 결이 맞닿아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각본과 연출 스타일은 지극히 정적이다. 인물들의 대사도 적고, 감정표현 자체도 절제하는 편에 가깝다. 그 절제가 지나쳐서인지, 전반부에서 아이러니컬한 상황으로 빚어내려 했던 블랙 유머는 존재감이 미미하고, 오히려 인물이 처한 상황과 운명의 비극성이 코미디·드라마라는 장르를 압도해 버리고 만다. 기억을 잃었다가 다시 되찾으면서 고통스러워하는 한 남자를 보면서 왜 웃음이 나야 하는가? 여러가지 레퍼런스와 힌트들이 주어지지만 감정적으로 동조하기는 쉽지 않다. 어찌하여 장르가 코미디인지 설명이 필요한 코미디라면, 이미 실패한 코미디인 것이 아닌가? "유럽의 찰리 코프만 필름"이 되고자 했던 감독의 의도와 별개로 영화는 아주 우아하게 그리스식 비극으로 미끄러져 내린다.

[글 이지영, karenine@ccoart.com]

 

ⓒ (주)다자인소프트

애플
Apples
감독
크리스토스 니코우
Christos Nikou

 

출연
알리스 세르베탈리스
Aris Servetalis
소피아 게오르고바실리Sofia Georgovassili
안나 칼라이치도Anna Kalaitzidou
코스타스 라스코스Kostas Laskos
바비스 마크리디스Babis Makridis
코스타스 시코미노스Costas Xikominos
알렉산드라 아이디니Alexandra Aidini


수입 (주)모쿠슈라픽쳐스
배급 (주)다자인소프트
제작연도 2020
상영시간 90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1.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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