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O] 숫자와 거리 그리고 '영화'
[편집자O] 숫자와 거리 그리고 '영화'
  • 오세준
  • 승인 2021.06.14 10: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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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갤러리 바톤
카운터 갭(Counter Gap), 1989/2019, 발광다이오드, 집적회로, 전선, 철 프레임, 597.6 x 11 x 7.3 cm ⓒ 갤러리 바톤

지난 주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찾아 <재난과 치유>(Catastrophe and Recovery) 전시를 관람했다. 이 전시는 코로나19 발생과 확산을 둘러싼 징후와 현상을 동시대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기획됐다. 전시가 시작되는 지하 1층 5전시실을 지나 6전시실을 들어서니 일본의 현대미술가 '미야지마 타츠오'(Tatsuo Miyajima)의 <카운터 갭>(Counter Gap, 1989/2020)이 어둡게 조성된 공간 속에서 LED 불빛을 비추고 있었다.

갑작스레 마주한 컴컴한 어둠과 수많은 숫자를 나타내는 LED 불빛의 떨림. 제각각 다른 속도로 점멸하는 숫자들, 그 미약하고도 명료한 숫자들 앞에 서 있자니 현실을 초월해 이 거대한 세계를 단번에 마주한 듯했다. 시각적으로 보이지 않는 시간을 LED, IC 등 전자 소재를 통해 시각화한 미야지마 타츠오. '모든 것은 연결된다.'(it connects with everything)는 작가의 철학적 사유는 팬데믹이 만들어낸 격리와 사회적 거리두기 그리고 매일 아침 일별 신규 확진자수와 백신 접종사수, 잔여 백신 현황을 확인하는 일상 속에서 오히려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고를 일깨웠다.

오롯이 빛만을 향한 시선. 이건 분명 낯설면서도 익숙한 경험이었다. 두어 발자국 뒤로 떨어져 작품을 보았을 때, '나와 작품 사이의 거리'는 마치 이미지의 거대함에 취하고자 최대한 앞 좌석에 앉던 '나와 영화관 스크린 사이의 거리'와 같았다. 그러면서도 알 수 없는 기시감을 쉽사리 지우지 못한 건, '숫자'와 '거리'가 지금 이 세상을 가리키는 지표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영화를 가리키는 지표로서 작용했기에 더욱 그랬다. 

주식이니 가상화폐니 투자 열풍 속에서 모두가 실시간 바뀌는 숫자에 눈을 떼지 못할 때, 난 극장 관객 수, 매출액, 예매율, 거리두기에 따른 극장 수용 인원, 코로나19 특별 예산, 영화 개봉 날짜, 영화제 개최일, 영화 관람료, 인수합병 금액, OTT 플랫폼별 작품 보유 현황과 가입자 수 등과 같은 숫자에 현기증을 느끼며 지냈다. 또한 이전과 멀어진 극장과의 거리감은 27인치 컴퓨터 모니터와 더욱더 가깝게 하였고, 작품의 경이로움에 빠져 넋을 잃은 채 집으로 향하던 길은 책상에서 일어나 방바닥에 눕는 데까지 고작 한 발짝 정도로 줄었다.

이러한 '나의 비관'이 한여름 오후의 햇볕처럼 뜨겁고 강렬해져만 갈 때쯤에, 나와 함께 영화를 본 사람들이 몇 명인지 세기가 몇 달째 열 손가락을 넘어가지 못할 때쯤에, 사람들을 매혹시킬만한 영화들이 차츰 극장에 등장하기 시작할 때쯤에, 어느 날 저녁 영화가 시작하는 시간에 맞춰 부리나케 극장에 들어선 내 눈에 들어온 광경―맨 윗줄부터 아래로 차곡차곡 좌석에 자리한 많은 사람들―에 숫자 세기를 포기한 채 좌석에 앉아 등 뒤로 많은 이들의 존재가 느껴지고 나서야 비로소 '소멸'되어져 갔다. 그 또한 영화가 보여준 한 장면이 아니었을까. 모두가 똑같이 한곳을 응시하며 빛줄기의 유희, 어둠 속에서 솟아나는 일종의 섬광, 이것들이 떠받치는 오브제와 인물의 고유한 운동성에 몰입하기를 자처하여 극장에 앉아 있다는 것. 극장은 영화와의 만남을 약속한 사람들로 찬 사각 프레임의 광장이었다.

어쩌면 이건 나만의 소회가 아닌 듯하다. '코로나 시대에 영화를 본다는 것'에 대해서 고민하며, 극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글을 써온 코아르CoAR 필진들도 분명 마찬가지 일 것이다. 영화를 쓰는 우리들의 행위는 발견과 비평, 기록을 위한 영화읽기 이전에 가슴 깊이 품어둔 영화에 대한 서정성의 발로(發露)가 아니었을까. 가혹했던 2020년을 지나, 벌써 한해 절반을, 그리고 6월 중순을 지나는 코아르CoAR에는 여전히 누군가의 영화가 누군가의 언어로 써지며 차곡하게 쌓이고 있다.

[글 오세준, yey12345@ccoart.com]

오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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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아르》 영화전문기자 및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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