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트로덕션' 잠재태로 존재하는 복수(複數)의 서사들
'인트로덕션' 잠재태로 존재하는 복수(複數)의 서사들
  • 이지영
  • 승인 2021.06.09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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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맞춰지지 않는 퍼즐

'인트로덕션'(INTRODUCTION), 글의 도입부를 뜻하기도 하고 누군가를 소개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1,2,3부로 명확히 구분된 이 영화는 언뜻 보기에 처음-중간-끝의 3막 구조로 이루어진 완결된 스토리의 외양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들을 하나로 관통하는 서사가 무엇인지는 묘연하다. 공통점을 굳이 찾자면 극 중 인물들이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시점에 대한 인트로라는 점이다. 에피소드들 사이에는 시공간의 이동과 빈 공백이 있고, 인트로는 또 다른 인트로로 이어진다.

통상적인 영화는 인트로 이후에 인물들에게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천착한다. <인트로덕션>의 관객은 그 전개 과정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 수 없으며, 다음 장의 단서들만 가지고 어렴풋이 추측할 수밖에 없다. 주어진 힌트들을 가지고 하나의 큰 스토리로 엮어보려는 관객의 시도는 번번이 무산된다. 마치 낱개로만 존재할 뿐 하나로 조합할 수 없는 퍼즐 세트처럼 에피소드들은 서로 조응하기도 하고, 미끄러지거나 어긋나기도 하면서 결코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로 우뚝 서지 못한다. 이쯤 되면 과연 에피소드들은 공통 요소들이 있을 뿐, 완전히 다른 인물들의 다른 이야기로 분절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홍상수는 그의 필모그래피 전반에서, 영화의 닫힌 서사 구조가 갖는 한계를 뛰어넘고자 노력해왔다. 일반적으로 관객들은 영화의 촬영과 편집이 마무리되면 모두가 같은 스토리와 결말을 보고 그 귀결을 받아들여야만 하지만, 홍상수의 작품관에서는 한쪽에 항상 뚫려있는 출구가 있다. 이러한 시도와 노력은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에서 정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이제 스토리에서 살을 들어내고 중심 뼈대가 허물어진 그의 영화 세계는 황량하지만, 훨씬 가볍고 자유롭다. <인트로덕션>은 영화적인 관습을 지키면서 관객을 친절히 하나의 서사로 인도하는 것을 포기했다. 전작 <도망친 여자>에서 감희(김민희)라는 인물이 주축이 되어 스토리를 이끌어가고 주변 인물과 대화하는 역할을 했었다면, <인트로덕션>에 나오는 배우들 사이에는 그 역할이 부재한다. 영호(신석호)도 감희와 같은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고 있지는 않다. 특히 누가 프레임 안에 들어오고 나가는지에 따라서 그들의 비중과 역할, 장면의 메시지는 시시때때로 변한다.

영화는 총 3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다. 먼저, 에피소드1은,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한의원으로 찾아온 아들이 온종일 아버지를 기다리는 일화다. 같은 공간 안에 있지만, 아버지와 아들은 계속 만나지 못하고 겉돈다. 아버지는 어딘가 괴로워하며 대화를 유예하고, 아들은 한없이 대화를 기다린다. 카메라는 이윽고 연극배우와 아버지의 대화로 이동했다가, 한의원의 직원(예지원)과 영호의 갑작스러운 포옹, 사랑에 대한 짧은 대화에서 멈춘다. 여기서 중심이 되는 것은 무엇인지 짐작이 가는가? 아버지와 아들의 못다 한 대화인가, 직원과 아들의 포옹과 대화인가, 아니면 아무런 관계도 없어 보이는 배우인가? (에피소드 3에서 우리는 이 배우와 아들이 그 이후에 만나게 되었고, 그것이 아들의 인생에서 어떤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쩌면 스토리에서 단서가 되는 사건을 카메라는 일부러 보여주지 않고자 하며, 그것이 곧 <인트로덕션>이 갖는 핵심적인 태도이다.

 

ⓒ (주) 영화제작전원사 , (주)NEW

 

에피소드2에서는 어딘가 불편하고 소통할 수 없는 엄마(서영화)로부터 독립해서 홀로 유학을 떠나게 된 딸(박미소)이 독일에서 묵을 집에 갓 도착해서 있었던 하루를 따라간다. 딸은 엄마의 옛날 지인(김민희)을 소개받고 그녀의 집에서 머물기로 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첫 만남 이후에 두 여성이 함께 살면서 어떤 일이 벌어졌고, 딸은 의상 디자이너의 꿈을 이룰 수 있었는지는 화면상에 나오지 않는다. 선배나 조언자, 때로는 구원자가 될 수도, 그저 지나가는 집주인이 될 수도 있는 김민희가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 영화는 확인해준다. 독일로 무작정 찾아온 그녀의 남자친구도, "나도 여기로 유학 올까?"라고 묻지만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에피소드 3에서는 연극배우, 어머니, 아들, 아들의 친구 사이의 관계를 제시한다. 재미있는 점은 카메라는 아들과 어머니, 남자 배우를 쓰리샷으로 잡고, 아들과 어머니를 투샷으로, 친구가 들어간 쓰리샷으로 잡기도 하며, 남자 연극배우가 열변을 토하는 모습을 단독 클로즈업으로 찍기도 한다. 이렇듯 프레임 이 바뀌면 중심이 되는 인물과 관계가 시시각각 달라진다. 필자는 어쩌면 이 이야기가 술자리에 우연히 불려가서, 친구 대신 배우가 되는 사람(하성국)이 주인공일 수도 있다는 상상마저 해보았다. 종합해 보면 <인트로덕션>의 스토리는 늘, 가능한 복수의 잠재태로 존재한다.

 

2. 무엇이 영화적인가

(...) 이 영화에서 사각의 틀을 '숏'으로 떠받치는 건, 그 안에 존재하는 두 사람의 구도다. 그것은 아마도 스크린이 아니라 텔레비전으로 본다면 감응할 수 없을, 서사에 귀속되지 않은 두 육체의 기울기, 시선, 거리, 자세다. <인트로덕션>에는 다만, 두 사람의 형상이 있을 뿐이다.

- 남다은, '두 사람, 그렇게 영화가 있다', FILO 20호, p9.

FILO 20호에서 남다은 평론가는, 전작 <도망친 여자>에서 최소한 영화로서 존립할 수 있었던 요소들마저 모두 벗어던지고, 어쩌면 영화가 '되기'를 거부하고 무언가로 '있으려는' 이번 영화의 태도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무언가로 있으려는 의지가 타성에 젖지 않고 여전히 보는 이에게 여전히 어떤 울림을 준다면, 그것은 한 숏을 이루는 두 육체의 공고한 형상 때문이라고 그녀는 설명한다. 영화가 되기를 거부하는 영화를 보며 영화적이라고 느끼는 연유는 무엇인가? 스토리가 해체되어 있을 때도 어떤 이야기가 우리 귀에 스스로 들려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남다은의 평처럼 어떤 하나의 숏, 한 프레임 안에 담긴 피사체들의 구도와 운동성만으로 그 영상은 충분히 영화적이라고 느낄 수 있다. 그리고 홍상수의 각본은 이를 증명하고자 서사의 흐름과 숏과 숏의 관습적인 연결, 숏과 숏이 주고받는 상호작용을 배제했다.

이 지점에서 떠오르는 것은, 얼마전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전에서 본 <24 Frames>(2016)이었다. 이 영화는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마지막 영화로, 감독이 그동안 찍었던 사진 24점을 영상화한 작업이다. 어떤 프레임 안에 담긴 장면을 본 뒤, 사진이 찍히기 전 앞뒤로 4분 정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사후적으로 상상하며 프레임 안에서 벌어지는 마이크로 단위의 드라마를 만든 것이다. 즉 이것은 영화라기보다는 움직이는 사진에 가까웠는데, 영화가 본래 초당 24프레임으로 이뤄진 "움직이는 사진”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의미심장하다. 물론 각 씬이 하나의 숏으로 이뤄진 엄연한 영화라는 주장도 충분히 가능하다.

24개 프레임 씬 중에서 기억에 남는 씬은 바닷가에서 소 한 마리가 누워서 자고 있는 어떤 프레임이었다. 바다에는 밀물이 점차 들어오는데 소는 태평하게 해변에 누워 깊은 잠에 빠져있다. 소 떼 한 무리가 지나가도 소는 잠을 깨지 못한다. 그러다 이제 물에 거의 잠기기 직전에, 지나가는 어떤 다른 소가 세차게 울어서 깨우자 잠들었던 소는 황급히 일어나서 프레임 밖으로 달려간다. 이 4분 남짓한 장면에는 어떤 대사도 장면 전환도 없다. 감독의 본래 생각과 의도는 모르는 채로, 필자는 이 장면에서 우울함에 잠식되는 사람을 떠올렸고, 그 주위를 지나쳐 가는 인간들의 군상과 소리쳐 깨워주는, 도움이 되고자 하는 누군가를 연상했다.

 

ⓒ (주) 영화제작전원사 , (주)NEW

에피소드 3의 바다 씬에서 유독 그 장면이 떠올랐다. "죽으려나 보지"라고 자조하면서 앉아있는, 어쩌면 바다에 잠기려는 사람과 그에게 손 내밀어 프레임 밖으로 꺼내주는 사람. 바닷물에 홀로 빠져서 한겨울에 떨고 있을 때 두툼한 패딩을 덮어주고 갑작스레 포옹해주는 누군가의 팔. 쓰러지기 직전에 기대어 선 마른 나무들처럼 젖은 모래 위를 딛고 선 가느다란 맨다리들. 남다은 평론가의 말처럼 이 숏 자체만으로 어딘가 깊은 울림을 주었고, 부족함 없이 영화적이었다.

 

3. 반쯤 감은 눈

<인트로덕션>은 최근 들어 조금 더 낯선 표정과 얼굴을 한 홍상수의 영화였다. 섹슈얼한 욕망이 지워진 아무런 맥락도 없는 포옹을, 특히 남자와 남자의 포옹을 그의 영화에서 보는 것은 신선했다. 간절히 기회를 달라고 기도하는 중년 남자의 뒷모습을 찍는 앵글도, 부모 자식 관계의 이면(속물성, 이질감 등)을 드러내려고 하는 카메라와, 슬프고도 어딘가 웃음이 필자는 늙은 배우의 절규를 찍는 그의 카메라도.

영화에는 시력이 안 좋은 인물들이 나온다. 에피소드 2에서는 안경을 끼고 나오는 김민희와, 에피소드 3에서 포도막염에 걸린 꿈속의 박미소가 그렇다. 영호는 꿈속에서 해맑게 웃으며 "바보. 내가 고쳐줄게!"라고 당당히 외친다. 꿈속이기 때문에 자신 있게 외칠 수 있었던 것일까?

<인트로덕션>의 스토리가 어떤 가능성의 상태로 남아 있기 위해서 실제 사건에 일부러 한쪽 눈을 감았다면, 그것은 과거 벌어진 것에 대한 어떤 회한 어린 감정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무엇을 보고 보지 못하는가. 인생의 새로운 막이 열리고, 긴장과 설렘으로 가득 차 있던 인트로는 자꾸만 다시 보고 기억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 과정이 나를 어떤 과정과 결말로 이끌었는지, 그 피날레를 자꾸 돌아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어쩌면 우리는 마지막 순간을 앞두고서야, 그 편린들의 의미를 깨닫고 마지막으로 그러모아 하나로 맞춰보려고 할지 모른다. 혹은 영원히 그 의미를 알 수 없을 수도 있다.

[글 이지영, karenine@ccoart.com]

 

ⓒ (주) 영화제작전원사 , (주)NEW

인트로덕션
INTRODUCTION
감독
홍상수
Hong Sang soo

 

출연
신석호
박미소
예지원
기주봉
서영화
김민희
조윤희
하성국

 

제작|배급 영화제작전원사
제작연도 2020
상영시간 66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1.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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