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트로덕션' 홍상수라는 영화
'인트로덕션' 홍상수라는 영화
  • 배명현
  • 승인 2021.06.07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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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가 드러낸 관계의 담백함. 포옹이 만드는 관계의 포용성."

이런 선언이 너무 고루하고 낡은 것은 아닐지 고민되긴 하지만, 필자는 <인트로덕션>(2020)을 보며 다시 한번 확신했다. '홍상수라는 감독은 이제 본인 스스로가 영화가 되어버린 건인지도 모르겠다고.'

<인트로덕션>은 3부로 나누어진다. 1부는 아버지를 만나러 간 아들에 대해 다룬다. 2부는 독일로 유학 간 엄마와 딸의 이야기를 다룬다. 3부는 연극배우와 엄마가 만난 자리에 초대받은 아들을 보여준다. 이 세 가지 이야기는 그 접점이 어디에 있는지 명확하게 말할 순 없지만 서로 이어져 있다. 세 이야기 사이의 두 간극. 이 영화는 그 두 간극을 상상하게 한다. 조금 더 밀어붙이자면 이 영화는 그 간극을 상상해냈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영화이다.

 

ⓒ (주) 영화제작전원사 , (주)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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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부터 이야기해보자. 영화의 시작은 아버지로부터 시작한다. 아버지(신석호)가 한의원에서 기도를 한다. 그는 절실하게 기도한다. 보기 거북할 정도로 절실하게 기도한다. 재산의 반을 바치겠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바라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관객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의 소원을 알지 못한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 게다가 그는 찾아온 아들인 영호(신석호)를 냉담하게 바라본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이 소원을 바라는 장면과 아들이 도착한 시간 사이의 거리이다. 이 두 사건 사이는 거리는 얼마나 먼가. 몇 시간? 며칠? 혹은 그 이상일 수도 있다. 오히려 이 3부작이 모두 끝난 이후일 수도 있다(후술하겠지만 2부의 뒷일 확률이 높다). 홍상수 감독은 그렇게 찍었다. 소원을 비는 장면과 그다음 1부의 분위기를 모두 바꾸어 찍었다. 감독은 예전부터 시간을 비트는 것을 좋아했다. 이를 통해 사건을 비틀고 재조립한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몇 편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영화는 그의 이러한 악취미가 배가 되어 있다. 영화는 한 부조차 그 시간의 길이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 어려워졌다. 더욱이 대사와 섞인 블랙유머는 영화를 관람하기 더욱더 힘들게 만든다. 감독의 '개인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악취미는 더 힘들게 다가올 것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 아들은 아버지를 기다린다. 그러나 아버지는 배우와의 만남을 이유로 만남을 지연시킨다. 이 지루한 기다림 사이에 긴장을 만들어 내는 것은 누군가와의 만남이다. 아들은 간호사(예지원)과 대화를 나눈다. 그는 담배를 피우며 그녀와 과거 이야기를 한다. 두 사람은 내리는 눈을 바라본다. 그리고 포옹한다. 오랜만에 만나 포옹을 하는 사이. 과연 이런 관계가 어색하게 이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어야 하는 것일까. 나이 차가 꽤 나지만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던 사람에게 안겨있는 사람은 어떤 기분으로 눈을 바라보고 있을까. 이 사건 사이에 2부의 사건이 개입되며 감독의 악취미는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 (주) 영화제작전원사 , (주)NEW

2부는 독일에서 시작한다. 패션을 공부하겠다는 주원(박미소)과 자신의 친구에게 소개해주는 엄마(서영화)가 등장한다. 이 둘의 대화를 통해 수직적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엄마는 강압적이진 않지만 단단하고 뻣뻣하다. 그에 비해 딸은 어눌하고 물렁하며 즉흥적이다. 엄마는 담배를 태우며 딸에게 화 섞인 말을 한다. 이때 두 사람의 대화는 대화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종의 훈육이 이루어지고 응답으로 반응한다. 두 사람은 화가(김민희)를 만나 어색한 대화를 나눈다. 그러다 갑자기 딸은 독일로 자신을 찾아온 남자친구인 영호를 만나러 간다. 이 두 사람의 재회는 이상한 방향으로 향하게 된다. 패션을 공부하겠다는 주원과는 달리 영호에게는 목적이 없다. 그저 여자 친구와 함께 하는 것이 목표이다. 이 둘은 포옹한다. 두 번째 포옹. 그러나 그에게는 유학 자금이 없다. 그와 함께 살고 있는 어머니에게도 돈이 없다. 하지만 한의사인 그의 아버지는 돈이 많다. 이때 2부는 1부와 연결고리를 가지게 된다. 2부가 시작이고 1부가 그 이후이다. 하지만 이조차 맹신할 수는 없다. 과연 1부에서 영호는 돈 때문에 아버지를 찾아간 것일까? 물론 확률은 높다. 다만 맹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지도 듣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부자 사이에 대화는 없었고 우리가 본 것은 배우(기주봉)와 아버지의 대사뿐이었다. 그 이후는 어떠했는가. 가려진 커튼 사이로 의사를 찾는 배우의 목소리만 들릴 뿐이다. 의사는 없다. 두 사람의 만남은 '오랜만'이었지만 결코 이어지지 못했다. 오히려 이 이어짐은 영호와 간호사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두 사람은 포옹하고 과거를 회상한다. 영호는 본래의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예상치 못한 목적을 이루었다.

이야기는 3부에서 더 복잡해진다. 배우와 영호의 엄마가 만난 자리에 영호가 초대된다. 그의 친구가 그 자리에 함께한다. 그리고 술을 마신다. 이때 카메라가 잡는 빛의 노출은 이상하리만큼 과하다. 창문 밖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밝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배우를 잡는 포커스가 무너진다. 이때 관객의 시선은 밖을 향하게 된다. 우리는, 그러니까 관객은 어떤 것도 볼 수 없는 공허한 공간을 바라보게 된다. 대사는 들리지만 형상이 없다. 물질성을 잃어버린 대사는 거의 무의미해진다. 이 공간에 존재하는 공기가 스크린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된다.

이때 등장하는 것은 바다이다. 액체화된 의미는 바다가 되어 다가온다. 파도가 해변으로 다가온다. 아무리 멀리 가려해도, 화면 너머로 도망치려 해도 바다는 그것을 거부한다. 그리고 다시 화면으로 밀어낸다. 바다라는 의미가 대상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보낸다. 이 의미의 시작은 물론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6)이다. 그리고 3년이 지나 <도망친 여자>(2019)를 경유했고 바로 이 작품, <인트로덕션>으로 도착했다. 도망친 여자에서 스크린 속 스크린에 있던 바다는 한 겹의 스크린을 벗고 관객과 다시 가까워졌다. 우리는 액자 속에 담긴 그림을 보듯 관찰했던 바다를 다시 실물의 형태로 만나고 있다. 그리고 그 바다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보다 더 역동적이며 강렬하게 움직이고 작동한다. 인물을 도망치지 못하게, 관객에게 밀어내고 있다. 우리는 그 의미의 바다에 잠겨 질식할 듯하다. 영호는 친구와 포옹하고, (2부의 독일에서부터 먼 시간이 지난 듯 보이는) 꿈 속 재회에서 무너진 주원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목적에 실패한 인간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목적을 이룬 이들이다. 바다는 이들을 한자리에 모아 두고 뒤섞는다.

 

ⓒ (주) 영화제작전원사 , (주)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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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3부는 이 세 이야기 중 가장 나중의 이야기일까? 다시 말하지만 확언할 수 없다. 다만 확률이 존재할 뿐이다. 카메라의 포커스가 흐려지고 창밖의 세상이 보이지 않았듯, 우리가 지금 보았던 장면들은 모두 연결고리가 희미하고 흐리다. 여기에서 다시 글의 서두로 돌아가 보자. 홍상수 본인이 영화가 되어버렸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영화의 간극을 상상해야 완성되는 영화라고 했다. 생각해보자. <인트로덕션>은 어떤 방식으로 직조된 영화인가. 이 세 가지 이야기는 어쩌면 기억의 방식으로 재구성된 영화일지 모르겠다. 기억과 기억 사이에 잊힌 이야기들. 언뜻 떠오른 장면. 시점을 잃어버린 단편적 구성. 장면의 그 이전과 이후가 암실처럼 보이지 않는 것. 그리고 특히나 누군가가 재구성한 것 같은 이야기의 맥락. 객관화되어있지 않은 이 시퀀스들은 섬광처럼 떠오른 누군가의 기억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 기억의 주인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 기억에서 건져 올릴 희망은 포옹일 것이다. 담배를 문 인물(담배를 문 이는 대화하는 씬 사이에 우위를 점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 인물은 다른 씬에 들어서면 사라지거나 열위에 놓이게 된다)은 단절과 파열 속에서 계속해서 그 모습을 바꾸어나간다. 하지만 포옹이란 행위는 계속된다. 인물을 바꾸어가면서 이루어지는 만남의 행위는 결말에 가서 가장 극적인 접촉으로 완성된다. 접촉을 통한 이 전염은 도망가려는 인물을 영화라는 액체가 붙잡은 뒤 따스하게 안아준다. 물론 이 행위가 영화 도처에 깔린 부정적 이미지 모두를 희석시킬 수 없다. 그러나 <인트로덕션>은 그와는 별개로 다시 한번 홍상수라는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영화였다.

P.S. 이 영화가 개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홍상수 감독이 또 다른 영화를 완성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의 영화와는 별개로 부지런함에 있어서는 존경할 만한 인물이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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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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