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가 라이트] 소름 끼치는 낯섦
[에드가 라이트] 소름 끼치는 낯섦
  • 배명현
  • 승인 2021.12.1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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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뢰그'와 '로만 폴란스키'를 경유하기

3.

앞서 「'에드가 라이트'의 밤으로 걸어가기」를 작성한 후, 필자는 다시 한번 <쳐다보지 마라>(1973)를 다시 한 번 감상했다. '니콜라스 뢰그'의 기이한 작품이자 에드가 라이트의 영화 인생 전체에 영향을 미친 그 영화 말이다. 기이한 에너지로 가득한 이 괴이한 작품은 완성된 지 50년이 다 되어가는 지난 지금 보아도 여전히 독창적이다. 그리고 서스펜스가 살아있다. 동시에 장르적으로 적확한 플롯과 이미지로 복무하고 있었고 이를 통해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만드는 데 탁월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와 '로만 폴란스키'의 두 영화 <혐오>(1965)와 <악마의 씨>(1968)를 어떻게 배합할 것인지 다시금 의문이 들었다. 이 질문을 이 자리에서 모두 해결할 순 없겠지만, 조금이나마 영화를 보기 전에 '예습'을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영화 '쳐다보지 마라' 스틸컷
ⓒ 영화 <쳐다보지 마라> 스틸컷

먼저, <쳐다보지 마라>를 복기해보자. 영화의 시작은 비가 내리는 강을 촬영하며 시작한다. 비와 강. 물의 이미지. 물로 가득 찬 스크린은 액화된 빛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다음은 닫힌 창을 비춘다. 그리고 카메라의 시야를 들어 올리며 무언가가 상승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심지어 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통해 우리는 비가 그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쏟아져 내리는 비 다음으로 배치된 상승하는 이미지. 그리고 비가 오는 동안과 그친 지금 사이의 '시간'. 그 시간 사이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 두 쇼트의 충격은 궁금증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두 쇼트 사이에 잃어버린 시간 사이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는 시작한다. 이제 이 영화가 답할 차례이다. 무엇이 하강을 할 것이고 무엇이 상승할 것인가. 그리고 그 결과로 만들어질 충돌은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말이다.

빨간 우비를 입은 소녀가 보인다. 그리고 곧 이 소녀는 물에 빠져 죽고 만다. 이때 물에 빠진 소녀와 대비되는 인물들은 소녀의 부모들이다. 니콜라스 뢰그 감독은 노골적일 정도로 반대로 상호작용하는 이미지를 배치해 의도적인 충돌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이 충돌은 영화 후반으로 갈수록 격해지고 위험해진다. 영화적 긴장이 고조되고 결국 폭발한다. 이 충돌을 에드가 라이트가 모를 리 없다. 절대로. 그는 이번에 모종의 충돌을 준비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공개된 내용으로 <라스트 나이트 인 소호>를 유추를 해보자, 로그라인은 이렇다. 패션 디자인에 열정적인 소녀는 모종의 방법을 통해 60년대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시대에 자신이 우상으로 삼은 슈퍼스타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곧 수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시간이 무너져 내린다. 먼저 두 인물이 어떤 방식으로 충돌할지가 그려진다. 특히나 판타지성이 짙은 이 로그라인은 인물의 충돌뿐만 아니라 시간의 충돌까지 그려진다. 현재와 60년대의 충돌. 그리고 그 시간성 사이에 붕괴되는 이미지와 서사. 특히 이 충돌을 다루며 매개가 될 혹은 상징성을 가질 그 모종의 존재가 궁금하다. 니콜라스 뢰그가 하강과 상승 그리고 물과 불을 이용했다고 한다면, 에드가 라이트는 과연 무엇을 가져갈까.

 

ⓒ 영화 <혐오> 스틸컷

이 두 인물의 충돌을 그릴 때 연상되는 영화는 당연 (감독이 직접 참고했다고 말한) 폴란스키의 <혐오>이다. 남성혐오와 불안정한 정신을 가진 주인공 카롤이 두 남성을 살해하는 것이 내용의 전부인 이 영화에서 주목할 점은 인물의 내면 심리 묘사와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힘이다. 전자는 물론 카메라와 편집이 만들어낸다. 신경질적 외부인물들을 통해 유발되는 주인공의 스트레스를 우리는 카메라를 통해 접하게 된다. 그리고 이 인물이 긴장상태에 빠지게 될 때 카메라는 인물과 거리를 좁힌다. 그리고 절정인 광기의 상태에 도달했을 때 그 거리가 극적으로 좁아지며 관객과의 거리가 최소화된다. 그러나 시점을 1인칭으로 바꾸진 않는다. 거리가 최소화되기는 하지만 인칭 시점에는 거리를 둔다. 감독은 이 캐릭터를 만든다. 그리고 이 캐릭터는 철저하게 외부의 인물이라는 사실을 공고히 한다. 우리는 카롤이라는 인물에 공감하지 않는다. 그녀는 철저하게 관객과 유리되어 있다. 그녀 삶의 부분을 우리는 관람하지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다른 장르 영화에서 시점쇼트가 등장하는 것과는 달리 이 고전적 사이코스릴러 영화에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관객과 거리가 생긴다.

이것을 '공포영화'의 장르적 규범이란 타인의 공포를 관람하는 것이라고 규정했을 때, 관객은 철저하게 사디스트적인 취향을 가진 존재가 된다. 일견 동의할만하다. 공포물의 즐거움은 안전한 객석에 앉아있는 우리들이 타인의 고통을 '안전하게' 관람하는 데서 오지 않는가. 하지만 최근 공포의 이야기는 다르다. 오늘의 공포영화를 찍는 감독인 로버트 애거스,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 트레이 에드워드 슐츠, 아리에스터의 영화는 다르다. 그들의 영화 또한 공포를 관람하긴 하지만 그 공포를 겪는 인물의 자리엔 우리가 대입된다. 이 감독들의 공포는 우리의 공포와 공명한다. 이런 점에서 에드가 라이트는 <혐오>에서 공포를 대상화하는 캐릭터가 아닌 심리적 공황을 가져올 확률이 높다. 그리고 영화의 절정에 등장하는 환상성을 가져올 것이라 감히―시간적 환상과 유기적으로 시각적 환상과 정신적 공황을 연결시킬 듯하다. 로만 폴란스키의 <혐오> 공식 트레일러 1분 30초 참고―예측해본다.

 

물론, 로만 폴란스키가 공포를 안전하게 관람하게만 하는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니다. 그의 대표작 <악마의 씨>는 오컬트 걸작의 계보를 이야기할 때 꼭 들어갈 작품인 동시에 인간으로부터 느낄 수 있는 미지의 공포를 다루며, 타인의 공포가 아닌 우리의 공포를 다루었다. <악마의 씨>는 내가 안다고 믿었던 사실이 거짓으로 드러났을 때, 그리고 그 거짓을 마주하는 서사형식의 기틀이 되었다. 이때 발생되는 공포는 소름이다. 절실하게 믿었던 것에 대한 배신과 낯섦이란 근원적 불안은 인간의 생존 차체를 붕괴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곧 현대 사회를 의미한다. 과거 친숙한 존재였던 이웃은 현대에 낯선 이들이 되었다. 그리고 이 낯선 이웃들은 '소름 끼치는 낯섦'이야말로 오늘날 이웃의 기묘한 본질이라 말한 종교학자 애덤 코츠코의 지적은 현대의 공포 영화를 이야기할 때 특히나 의미심장해진다.

이와 비슷하게 지젝 역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의문은 이것이다. 저 소름 끼치는 이웃은 뭘 원하는 걸까? 대체 뭘 얻어내려는 걸까? 왠지 분명한 이유로 지금 저렇게 행동하는 게 아니라는 경험, 그래서 이상하다는 혐의를 결코 지울 수 없을 때, 이웃과의 조우는 섬뜩해진다" 오늘의 공포를 찍는 감독들의 영화를 다시 살펴보자.

로버트 애거스 감독은 <더 위치>(2015)로 가족이란 존재의 두려움을 다루었고, <더 라이트하우스>(2019)로 직장에서 만난 이에 대한 근원적 불안을 다루었다.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 감독은 <팔로우>(2014)로 누군가와 나눈 성적 교합을 통해 전파된 성병에 대한 은유를 말했다. 트레이 에드워드 슐츠 감독은 <잇 컴스 앳 나이트>(2017)를 통해 노골적으로 이웃과의 소름끼치는 조우를 다루었다. 아리 에스터 감독의 <유전>(2018)은 노골적으로 <악마의 씨>를 경유했고 <미드 소마>(2019)는 이러한 미지와 조우하는 서사를 극단까지 밀어붙여 새로운 경지에까지 이른 명작이다. 이 영화들의 스토리를 복기하며 <라스트 나이트 인 소호>의 로그라인을 떠올려보자. 자신이 동경하던 인물과의 조우 그리고 미처 알지 못했던 당시의 사람들과 만남을 통해 붕괴되는 개인의 서사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이렇게 애드가 라이트 감독가 <라스트 나이트 인 소호>를 제작하며 참고한 영화를 통해 맛보기를 진행해 보았다. 나의 예상이 적중하면 좋겠지만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미리 예습했다는 점으로 더욱 <라스트 나이트 인 소호>를 재미있게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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