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는 자동차 앞 좌석 두 남녀의 어깨 넘어 정면을 향한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영화를 지켜보는 관객뿐만 아니라 두 사람도 모르는 듯하다. 아뿔싸. WIFI가 터지지 않는 도로 위에서 휴대폰으로 지도를 확인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몇 분을 차 안에서 투덕거리다 간신히 목적지에 닿는다. 도착한 곳은 루이사(Lusia Pardo)의 부모님이 있는 고향인 광산 마을이다. 파코(Francisco Barreiro)는 여자친구인 루이사의 부모님을 뵐 생각에 긴장한 눈치다. 이어 루이사의 동생 가비노(Gabino Rodriguez)가 도착한다. 집 밖에서 잠시 외출한 부모님을 기다리는 상황. 어색한 침묵을 깨고자 가장 먼저 움직인 건 파코다. 그는 담배가 떨어졌다며 근처 상점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카메라'다. 파코가 담배를 사러 가기 전까지 카메라는 차 안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않고, 일종의 관찰자로서 극 안에 존재한다. (파코를 따라) 자동차 안에서 창문 너머로 향하는 프레임을 깨뜨리고 나오는 순간, 영화는 기지개라도 피듯 본격적으로 인물들의 몸짓을 담기 위한 시작을 알린다.
파코에게 벌어지는 웃음 터지는 하나의 헤프닝. 동네 어느 허름한 가게에 도착한 파코는 주인으로부터 방금 나간 한 남자가 마지막 담배를 사 갔다는 말을 듣는다. 곧장 그를 쫓아 담배를 사기 위해 흥정을 한다. 그는 파코에게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르며 두 갑을 살 것을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파코가 잔돈을 바꾸러 가게로 잠깐 간 사이에 자신이 팔 담배를 뜯어 한 대 피운다. 헐레벌떡 잔돈을 바꿔 온 파코는 그로부터 담배를 받고 '도대체 이게 무슨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지?'하고 현타가 온 듯 멍한 표정을 짓는다. 곧이어 관객인 우리의 실소를 터트리는 장면, 그 남자가 루이사의 부모님 집 안에서 나오며 파코에게 문을 열어주는 순간이다. 다름 아닌 그 남자가 루이사의 아버지였던 것. 아이러니하게도 극 안의 공기는 다시 또 어색함으로 짙어진다. 극 안의 온도와 극장 밖의 온도가 극과 극을 달리는 전개는 멈출 줄 모르고, 또 다른 상황을 낳는다. 파코, 가비노, 루이사의 아버지 세 사람은 저녁식사 후 술집으로 향한다. 이때 루이사의 아버지는 배우인 파코에게 갑자기 드라마의 한 장면을 연기를 보여 달라고 '무례한 요구'를 한다.
이때, 관객인 우린 영화가 설계한 현실과 환상 그리고 장르 언저리쯤에 위치한 경계 안에 갇힌다. 파코를 연기한 배우 프란시스코 바레이로는 실제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나르코스: 멕시코'에 출연한 인물이다. 여기서 영화는 파코라는 배우로 설정된 가상의 인물과 그 가상의 인물을 연기하는 실제 배우를 한 프레임에 담아내고자 시도한다. 쉽사리 지나치기 어려운 것은 결국 '그의 몸짓'이다. 여기에는 실제 배우의 몸짓, 파코라는 가상의 인물의 몸짓, 나르코스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의 몸짓이 한데 섞이면서 리드미컬하게 존재 시 된다. 이것은 마치 연극무대 위에 펼쳐진 독백처럼 오로지 그것만이 주인공이 되는 드라마로서 변모하도록 이끈다. 그러나 이 몸짓을 끌어낸 당사자가 순간 개입될 때, 영화는 순간 코미디가 된다. 아니. 장르영화로써 구축되어진다. 연기를 요구하는 루이사의 아버지는 연이은 파코의 거부에도 포기하지 않는다. 두 사람 사이의 형성된 묘한 긴장감. 두 사람의 관계는 마치 코미디 영화 속 젊고 아름다운 연인을 원하는 젊은 주인공, 그 연인의 양친과 대립관계를 연상케 한다.
다시 말해서, 영화 초반에 등장한 하나의 헤프닝을 시작으로 이어온 두 사람 관계는 고의적인 계략이 아닌 우연적인 사건으로 전진시키는 플롯 구조 안에 놓여있으며, 영화가 파코를 순진무구한 인물로 비추는 것, 즉 그가 애인의 아버지와 대립을 할 것처럼 상황이 세팅되어지지만, 너무도 당연하게 그 상황을 저버리고 그의 요구에 순응함으로써 웃음을 유발하게 하는, 자세히는 대립을 뛰어넘고 화해로 향하며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다. 재밌게도 여기까지가 영화의 전반부에 해당된다. 후반부에서 영화는 이제 외부의 사실이 아닌, 극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인 '소설' 속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루이사가 가비노가 읽고 있는 책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인지 묻는 순간, 영화는 곧장 방향을 틀어 소설을 보여주기 위한 내러티브를 쌓아 올린다. 중요한 건,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은 가비노, 여자 주인공은 루이사를 연기한 배우가 연기를 한다는 점이다. 적어도 관객의 시선에서, 가비노는 자신이 읽고 있던 소설을 루이자에게 전달하는 화자이면서 소설 속 주인공이며, 루이사는 청자인 동시에 역시 소설 속 주인공인 셈이다.
여기서 시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차이는 '가발 착용의 여부'이다. 그렇게 영화는 (느와르에 가까운) 소설의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후반부를 구성한다. 다만, 화자인 가비노가 소설을 다 읽은 상태가 아니기에 소설의 이야기는 완결되지 않은 상태로—루이사와의 대화를—끝낸다. 그렇기에 소설의 이야기는 영화 내에서 현재진행형으로 흐르고 있는 상태로서 존재하게 된다. 당최 소설이 '누군가를 찾는 중이다'라는 플롯만을 가질 뿐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남매였던 관계가 한순간에 낯선 두 남녀의 만남으로 이어지는 순간만큼은 이질적이기보다 매혹적으로 다가올 정도로 극의 질감은 이상하리만큼 묘하다. 이중 내러티브, 캐릭터의 변신 등 다양한 방식으로 낯섦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는 메타픽션적인 시각을 충분히 선사한다.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건 섬세한 배우들의 연기다. 단순하게 다가오면서도 그들의 몸짓 하나하나가—감독에 의해 혹은 배우 스스로—세밀하게, 단단하게 그리고 우아하게 조율됐다는 것을 영화의 매 시퀀스마다 느낄 수 있다.
<파우나>는 다작을 하기로 유명한 멕시코 출신 '니콜라스 페레다' 감독 작품이다. 제12회 전주국제영화제(2011)에서 열린 '니콜라스 페레다 특별전'을 시작으로 그의 작품들은 꾸준히 전주에서 소개되어져 왔다. 특별전 당시 영화평론가 로버트 퀼러는 그에 대해 "2007년 니콜라스 페레다의 첫 영화가 등장했을 때, 이는 새로운 세대의 영화감독들—예컨대 리산드로 알론소, 루크레시아 마르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알베르트 세라보다 젊은—이 과거의 영향을 흡수하면서 자신만의 고유한 목소리를 발전시키고 있었음을 알려주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제스처, 웃음, 침묵, 시선, 소리, 공간에서의 움직임 등 육체와 영화가 맺는 관계에서 볼 때, <파우나>는 그의 초기작인 <투게더>(2009)와 <페르페툼 모빌레>(2009)를 연상시키면서도 더욱더 견고해진 영화의 전체적 짜임새를 통해 감정적 긴장을 탁월하게 전달하는 작품이다. 어쩌면 <파우나>의 후반부 가비노가 루이사에게 자신이 읽다만 책을 건네는 장면은, 그것이 단순이 극 내의 모든 내러티브를 열린 결말로써 끝내는 것이 아닌 페레다의 시네마틱한 혹은 드라마틱한 영화의 현재진행형을 암시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글 오세준, yey12345@ccoa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