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th JIFF] '파편' 파운드 푸티지, 조각으로 재구성한 과거
[22th JIFF] '파편' 파운드 푸티지, 조각으로 재구성한 과거
  • 배명현
  • 승인 2021.05.09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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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에겐 무기가 없는 걸?"

<파편>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해달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이 영화는 파운드 푸티지라고. 공포 영화 장르의 한 갈래인 파운드 푸티지, 그 자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할 것이다. 공포 영화인가.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겠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페이크 다큐멘터리인가. 어쩌면,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이 영화는 페이크 다큐멘터리이기도 하면서 아니기도 하다. 이 양립 불가능한 문장이 사용 가능한 영화이다. 이 형용모순 표현이 가능한 이유는 이 영화가 말 그대로 ‘찾아진 필름’이면서 동시에 ‘현재성’을 함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독인 나탈리아 가라샬데의 <파편>이 놀라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 전주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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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일상에서부터 시작한다. 평범한 가족의 모습이 스크린 위로 펼쳐지고 각 인물들의 소개가 시작된다. 감독이 어린 시절에 찍어 놓은 필름에 담긴 이들의 모습은 일상적이며 평범하고 동시에 가장 사적이다. 하지만 영화는 얼마 가지 않아 흐름을 끊어 버린다. 그리고 이전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굉음이 들려오고 사람들이 달려 나간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거대한 소리로부터 탈출하려 한다. 카메라는 마구 흔들리고 갈피를 잡지 못한다. 힘을 잃을 손은 그저 영상을 담기만 한다. 카메라의 시야는 목표를 찾기보다 그저 바라만 본다. 어딘가를 향해야 할지 모르는 커메라는 충격 그 자체를 담고 혼란 그 자체를 포착한다.

리오테르세로의 군수품 공장 폭발 사고라고 명명된 이 날의 사고는 그녀의 카메라 안에 기록되어있다. 기자나 역사가 혹은 권력자의 서기가 아닌 12살 소녀의 평범한 카메라 안에 말이다. 이 미시적 시각을 가진 기록은 덤덤히 그 이후를 담는다. 폭발물이 한꺼번에 폭발한 마을에 굴러다니는 폭약과 총알 그리고 탄두들. 사건 이후에도 이들은 평온한 일상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다. 각종 화학 물질이 공기 중에 떠다니고 마을 사람들은 고통받는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발물 옆에 누워 잠을 자고 밥을 먹어야 한다. 하지만 국가는 이 사건을 덮기에 급급하다. 이 마을의 아이들은 각종 화학물질에 대한 교육을 받고 누군가는 병에 시달리며 또 누군가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지만 시스템은 그 누구에게도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국가는 이 비극을 ‘사건’이 아닌 ‘사고’라고 기록한다.

그렇기에 이 사고에 대한 기록은 빛을 발한다. 그리고 아직까지 유효하다. <파편>은 과거에 이어 현재를 담는다. 누구보다 목소리를 높여 마을에 일어난 비극을 알리려 했던 아버지는 암에 걸렸고 또 마을에 거주한 많은 이들이 병에 걸렸다. 의사였던 아버지는 간단한 글도 읽기 힘들어할 정로도 상태가 좋지 못하다. 이 마을의 비극은 감독이 20년 만에 우연히 찾은 테이프들로 지구 반대편 세상에 알려질 수 있게 되었다. 이 영화가 파운드 푸티지 장르라고 명명되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발견된 테이프는 형식에서 완벽하게 파운드 푸티지 장르와 일치하며, 혼란과 비극을 담은 현실성에서 공포를 유발한다. 그리고 이때 나열되는 국가와 시스템의 부조리함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짓 같기에 이 영화는 모큐멘터리가 되어야만 한다. 가장 진실인 동시에 가장 진실 같지 않은 현재를 영화는 담고 있다.

 

ⓒ 전주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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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힘이 세다. 그리고 동시에 가장 약하기도 하다. 이 영화는 고발적인 동시에 도발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동시에 <파편>은 영화에 불구하다. 1995년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의 피해자들은 여전히 고통을 받고 있다. 국가는 ‘작업자에 일어난 불행한 사고’라고 말했고 당시의 많은 이들은 이 ‘불행한 사고’라는 사실을 그대로 믿어야만 했다. 물론 그 시기에도 주인공의 아버지는 불발된 탄을 보며 ‘무기로 민중에게 힘을!’이라 말했지만, 감독의 대답은 ‘하지만 민중에겐 무기가 없어요, 아빠.’였다. 이 대답에서 <파편>은 우리에게 영화에 대한 모종의 근원적인 대답을 요구한다. 영화는 진정 어떤 매체인가. 영화는 움직이는 이미지의 총체일 뿐인가. 그 답은 감독이 아닌 이 영화를 보고 나온 우리가 지금-여기에서 다시 대답해야 할 일종의 숙제이지 않을까. 우리는 과연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영화란 탐미적인 예술에 기반 한다고 답한다면 영화의 가능성을 우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반대로 영화를 현실의 연장이라고 주장한다면 우리가 그동안 보았던 탐미적 영화에게 보냈던 찬사들은 모두 허무해지고 마는 것일까. 나는 이 난제 앞에서 가끔 무력해지곤 한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 영화 '파편' 포스터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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