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th JIFF] '이리로 와' 열차로부터의 이행과 견인
[22th JIFF] '이리로 와' 열차로부터의 이행과 견인
  • 오세준
  • 승인 2021.05.06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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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축 위를 달리는 열차, 그것의 움직임은 왠지 모르게 시선을 이끈다"

영화의 시작은 기차 안 어느 창문을 비춘다. 달리는 기차 안에 존재하는 감독의 카메라는 색을 지웠다. 콘트라스트와 그림자가 강조된 스크린. 관객인 우리의 눈을 이끄는 것은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열차의 움직임이 아닌, 오로지 빛이 닿는 창문 밖 풍경―그마저도 풀 무더기, 잎이 풍성한 나무, 낙석방지망으로 덮인 울퉁불퉁한 산 절벽―뿐이다. 시간이 지나 철크덕철크덕 들리는 소리에 잡음이 섞인다. 자잘한 돌멩이들이 구르는 소리, 곡괭이질 소리 등 토목공사에서나 들릴 법한 소리들이다. 그러더니 화면은 안개가 피어오르는 숲과 공사 현장이 위아래로 분할되더니, 컷이 바뀌자 숲에서 길을 잃은 듯 보이는 한 여성을 비춘다. 이어 검은 화면 위에 영화 제목이 순식간에 나타난다.

 

ⓒ 전주국제영화제

<이리로 와>는 <우주의 역사>(2009), <어둠의 시간>(2016) 등을 통해 태국 현대사를 정치·심리적 시선으로 파헤쳤다는 평가를 받아온 아노차 수위차꼰퐁 감독의 신작이다. 감독은 태국 중부 깐짜나부리에 있는 '죽음의 철도'를 극 안으로 끌어온다. '죽음의 철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태국~미얀마 간 철도는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도중 미얀마를 점령한 일본군이 인도까지 침공하기 위해 건설을 강행한 철도이다. 깐짜나부리의 험준한 산악지형을 따라 이 철도를 건설하다가 10만 명이 넘는 포로 및 노동자들이 희생됐다고 한다. 오프닝 시퀀스 이후, 영화는 이곳에 위치한 제2차 세계 대전 기념관인 죽음의 철도박물관(Death Railway Museum)을 방문한 네 명의 젊은이, 그리고 이들과의 관련성이 확실치 않은 또 다른 숲속의 한 여성을 비춘다.

그러나 영화는 특정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인물들의 대사 또한 현격히 적다. 영화는 서사를 진행시키는 것이 아닌, 동시성(Simultaneity)을 표현하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때, 영화가 동시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쓰는 질료로는 철도박물관을 찾은 네 명의 극단 배우들과 (여행을 온 것으로 추측되는) 숲속에 위치한 두 여성이다. 두 그룹에는 공통적으로 단발머리의 여성이 존재한다. 이 여성의 존재는 두 그룹을 연결하는 매개로 작용한다.

초반 영화의 전개는 이러하다. 숲속 텐트에서 잠을 자고 있던 한 여성은 폭죽소리에 잠에서 깬다. 그러고는 함께 온 친구(단발머리의 여성)가 사라졌음을 깨닫는다. 영화 초반 철도박물관이 공사 중인 것을 확인한 극단 배우들은 하천에 위치한 숙소로 자리를 옮겨 술판을 벌인다. 나머지 친구들이 술에 취해 잠든 사이 단발머리의 여성은 한 친구와 ―"연극 언제까지 계속할 거 같아?"라는 질문을 던지며―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불확실성, 즉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나눈다. 그 순간 하천 너머로 폭죽이 터진다. 그다음 컷에서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밤이 아닌 낮, 숲속에서 친구를 찾는 것인지 아니면 숲속을 빠져나가기 위함인지 알 수 없는 한 여성이 이리저리 헤매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과율의 법칙을 한껏 무시한 이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두 그룹이 있는 공간에서 '폭죽이 터졌다'는 사실뿐.

 

ⓒ 전주국제영화제
ⓒ 전주국제영화제

단벌머리의 여성이 숲속을 돌아다니는 장면을 위로, 동시에 단벌머리의 여성이 침대에서 깨어나는 모습을 아래로 분할하여 스크린에 비춰질 때, 어쩌면 숲속에서 발생된 모든 일들은 단발머리의 여성의 꿈이 아닐까 하는 가능성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 추측은 금세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 채 사라진다. 숲속을 돌아다니던 한 여성이 갑자기 남성으로 변하고, 방콕으로 돌아온 극단 배우들은 하천에 있었던 일을 세트장에서 그대로 재현한다. 영화는 일종의 반복적인 몸짓을 언어로 사용하여 극을 이끌어간다. 이 언어는 그리고 '변화하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 쓰임을 다 한다. 한 여성이 남성으로 변화하였지만, 그녀(혹은 그)의 몸짓은 숲으로 출발하기 직전의 장소로 자연스럽게 회귀하는데, 이것은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에 대한 무감각함 더 나아가 영화 전체에 어떤 질적 변화를 만들어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더불어 극단배우들의 모든 장면들은 하천과 세트장이라는 공간의 차이만 존재할 뿐⎯그들이 보여준 하천에서의 모습이 설령 세트장에서 선보이기 위한 연습일지라도⎯결국, 관객의 입장에서 모두 '영화를 위한 연기'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이리로 와>는 스토리텔링으로서 영화의 관습을 철저히 거부한다. 영화는 서로 다른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한 화면에 구현시키고자 부단히 노력하는데, 조금 더 고민을 해야 하는 것은 감독이 동시다발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이미지들이 어디 위에 놓였냐 하는 부분이다. 영화로 잠시 돌아가서, 극단 배우들이 세트장에서 하천에서 있었던 일들은 재현할 때(연극으로 선보여질 때), 카메라는 돌연 방안에 위치한 창문으로 향한다. 창문에는 달리는 기차의 정면에서 볼 수 있는 풍경, 끝이 보이지 않는 철도가 수직선으로 깔려 있다.

여기서 롱테이크(long-take)로 찍힌 이 시퀀스는 영화의 모든 이미지가 달리는 열차 위에 놓여있다는 것을 확인하도록 한다. 이것은 첫 문단에서 언급한 영화의 첫 번째 시퀀스의 연장이며, 극단 배우들이 깐짜나부리로 기차를 타고 갔다는 것까지 생각해보면 영화가 보여준 모든 이미지는 철로 위를 달리는 기차 위에 놓여있거나, 적어도 기차를 경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영화 끝에 스크린이 잠시 어두워지면서 나타나는 오래된 동물원의 아카이브 이미지는 영화 중반 동물흉내를 냈던 극단 배우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결국에는 영화의 운동이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오간다는 것, 그 운동이 달리는 열차의 움직임을 통해서 발현되거나 동시성을 보여주고자 하는 영화의 콜라주가 '변화에 대한 인식'을 거부하는 것까지, <이리로 와>는 불명료함을 기질로 여러 실험을 감행하고 있다.

영화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이 누군가의 꿈일 수 있다. 혹은 불꽃놀이와 함께 벌어진 하나의 소동극. 영화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열차는 달리고 있다'는 사실, 또 영화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은 이 달리는 열차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글 오세준, yey12345@ccoart.com]

 

ⓒ 영화 '이리로 와' 포스터
ⓒ 영화 '이리로 와' 포스터

 

오세준
오세준
《코아르》 영화전문기자 및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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