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어보> 변화는 어렵다
<자산어보> 변화는 어렵다
  • 선민혁
  • 승인 2021.04.08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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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도

2시간 6분의 러닝타임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영화를 보았다. 극적인 전개가 이뤄지지 않아도 스토리와 소재가 매우 흥미로웠고, 흑백으로 표현된 섬마을의 아름다움은 영화적 감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된 <자산어보>의 주인공 정약전(설경구)처럼, 필자 또한 의지와는 관계없이 흑산도에 머무른 적이 있었다. 군 생활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때를 회고하는 일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 섬에 처음 들어갈 때의 기억은 생생하다. 목포에서 출발한 페리가 비금도, 도초도를 지나 흑산도의 선착장에 도착하였고, 눈앞에는 상상했던 모습과 일치하면서도 다른 모습이 펼쳐졌다. 흑산도에서 보이는 푸르고 넓은 바다와 이름 모를 작은 섬들이 아름다우면서도, 그것을 온전히 즐길 수는 없었던 순간이었다. 흑산도로 향하기 직전에도, 그곳에 도착했을 때도 설렘을 느끼지는 않았던 것 같다. 두려움이 더 컸다. 흑산도로 유배를 떠나는 정약전은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는 아우 정약용(류승룡)과 작별하며 섬에 들어갈 생각을 하니 새로운 곳에 대한 호기심으로 설레는 마음이 든다고 이야기한다.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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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에서 보내는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던 필자와는 달리, 약전은 유배라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의미 있게 사용하는 데에 적극적이다. 학자답게, 섬의 사회를 관찰하고 자신이 기여할 수 있는 바를 찾고자 하며 주변 사물에 호기심을 가지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는 섬에서 바다 생물에 매료되어 그것에 대한 책을 쓰기로 한다. 이를 위해 바다 생물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흑산도의 청년 어부 창대(변요한)에게 도움을 받고자 하나, 성리학을 공부하고 있던 창대는 사학죄인을 도울 수 없다며 거절한다.

약전은 홀로 하는 공부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창대에게 서로의 지식을 거래하자고 제안하고, 이것은 자신을 돕는 것이 아닌 거래이기 때문에 괜찮다는 말에 창대는 못 이기는 척 제안을 받아들인다. 이 둘은 스승과 제자가 되고, 점점 더 가까워진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양반과 상놈 등의 차별이 없고 임금도 필요 없는 백성이 주인인 나라를 꿈꾼다는 약전의 사상을 창대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약전은 창대에게 출세의 부질없음을 이야기하지만, 창대는 결국 자신은 <목민심서>의 길을 가겠다며 출세를 위하여 육지로 향한다. 약전은 거처를 옮겨 백성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될 <자산어보>의 집필을 계속한다.

약전은 당대의 학자들 중 가장 앞선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인물인 것으로 보인다. 양반도 상놈도 임금도 필요가 없는 백성이 주인인 나라를 꿈꾼다고 이야기하는 것, 물고기를 잘 알지만 시를 못 쓰는 것과 시를 쓰지만 물고기를 모르는 것이 다르지 않다고 창대에게 이야기하는 것 등 영화 <자산어보>의 많은 장면들이 이를 보여준다. 그런데 창대는 왜 이 달콤한 이야기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약전을 떠나 뭍으로 향했을까?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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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전의 주장이 창대에게는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창대가 여태껏 겪어온 세계가 약전의 사상이 유효하기 어려운 곳이기도 하지만, 약전이 보여주는 행동 또한 그의 사상에 대해 신뢰를 주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약전은 양반, 상놈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꾼다고는 하나, 자신이 양반으로서 누리고 있는 권리와 혜택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 그는 양반이기에 죄인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가거댁(이정은)의 집에 편안히 머무르며, 창대에게 ‘상놈의 자식’이라는 말을 꺼내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다. 그는 물고기를 잘 아는 것과 시를 잘 아는 것이 같다고 이야기하고, 창대와 자신이 서로의 지식을 거래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나, 둘 사이에는 명확한 권력관계가 존재한다. 약전은 자신이 원하는 물고기를 잡아 오라고 창대에게 요구할 수 있으며 화가 나면 그를 향해 물건을 던질 수도 있다. 약전과 창대 간의 거래는 서로 원해서 성사된 것이 맞으나, 그렇다고 해서 동등한 조건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는 없다.

영화 <자산어보>에서 약전이라는 캐릭터가 보여주는 행동이 그의 사상과 완벽하게 일치한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단지 선민의식을 가졌을 뿐, 다른 양반들과 다를 것 없는 인물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없다. 백성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자산어보'를 집필하는 행위, 마당을 청소하고 금전을 지불하는 등 가거댁의 집에 머무는 대가를 지불하려고 하는 모습, 여성의 역할 또한 남성과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한다는 가거댁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모습 등 영화에서 약전은 당대의 기득권 계층과는 분명히 차별화되는 의미 있는 행동을 충분히 보여준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집필을 하던 약전은 분명히 자신의 사상에 대한 진정성을 가지고 있었다. 시대에 대한 통찰력과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행동들을 했다. 그러나 시대는 약전의 사상을 받아들이지 못하였고, 영화에서 나타나는 약전의 모습 역시 그의 사상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변화는 어렵다.

[글 선민혁, sunpool2@ccoart.com]

 

자산어보

The Book of Fish

감독

이준익

 

출연

설경구

변요한

이정은

민도희

차순배

강기영

 

제작 (주)씨네월드

배급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제작연도 2019

상영시간 126분

등급 12세이상 관람가

개봉 2021.03.31

선민혁
선민혁
영화를 보는 것은 현실을 잊게 해주기도 하고, 더 자세히 보게 해주기도 합니다. 영화에서 발견한 흥미로운 부분들을 기억하고 공유하고자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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