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카> 폭설처럼 내린 나의 불행에게
<아이카> 폭설처럼 내린 나의 불행에게
  • 이지영
  • 승인 2021.04.06 10: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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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타>의 윤리적 태도와 비교하여

세르게이 드보르세보이 감독의 <아이카>를 본 관객들은 영화가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1999)를 쉽게 떠올릴 것이다. 실제로 최근에 올라온 <아이카>에 대한 대부분의 평들은 너도나도 <로제타>를 언급하고 있다. 두 영화 모두 사실주의적 핸드헬드 카메라 기법을 사용하면서, 밥벌이 때문에 고단한 몸을 쉴 틈이 없는 여성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한다. 뿐만 아니라 노동자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가지는 윤리적 문제에 집중하는 두 작품은, 세대를 달리하면서도 명확한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작품에서는 공통점 그 이상의 극명한 대비점 또한 발견할 수 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로제타'(에밀리 드켄)는 가난이라는 광활한 진창에서 스스로의 의지로 탈출하고자 하는 인물인 반면에, '아이카'(사말 예슬리야모바)는 마치 가축처럼 희생당하기 직전까지 아이카는 출구 없는 감옥에서 쫓겨 다니는 인물이다. 초반의 <아이카>의 핸드헬드 기법은 <로제타>에 비할 바 없이 흔들리고 멀미를 유발하며, 카메라를 컨트롤하려는 의지조차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로제타> 이후 22년이 흐른 모스크바에서 가난은 어떻게 한 여성의 인간성을 말살하는 감옥이 되었는가?

 

영화 <로제타> ⓒ 아이 엠(eye m)
ⓒ 디오시네마

<로제타>에서 영화의 초반은 '엄마처럼 살지 않을 것이다'라는 로제타의 강력하고 초인적인 의지, 투쟁을 보여주었다. 예컨대 남에게 비도덕적인 경로로 얻은 식량을 버리기 위하여 로제타는 엄마와 치열하고도 처절한 몸싸움을 벌인다. 이때 소녀는 철인이거나 윤리의 투사처럼 보인다. 그런데 병원에서 아이에게 젖도 물리기도 전에 아이를 두고 창문을 넘어 도망치는 아이카를 보면서 우리는 반대의, 어떤 분노에 가까운 감정을 느낀다. 이 여자는 무슨 생각으로 도망치는 것인가? 아이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를 불편한 감정으로 지켜봐야만 한다. 로제타가 끝내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려고 하는 몸싸움은 눈물겨웠으나, 아이카가 피를 흘리면서 닭털을 뽑고 있는 현장을 볼 때는 '인간이 돈을 벌기 위해 저렇게까지 살아야 하는가?'라며 회의적인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육되고 벌거벗겨지는 닭들은 바로 아이카의 자신의 처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서서히 알게 되면서 보는 이의 심정은 망연해지고 만다. 영화 내내 그녀는 헐떡이며 피와 땀을 쏟아내고 모유를 고통스럽게 쥐어짜낸다. 그녀의 육체는 살아있으나 살아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카메라 아래서 쉴 틈 없이 착취당한다.

<아이카>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또 하나 있다면 그것은 여러 층위로 나뉜 계급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이다. 그리고 이들은 상대방의 계층에 대해 나의 인생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먼저 세차장에서 아이카가 구직을 하러 돌아다니는 동안, 외연적으로도 부유해 보이는 사람들은 지루하게 앉아서 세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들이 밖으로 나가는 순간부터 차는 눈때문에 바로 더러워질 것임이 틀림없으나, 그럼에도 이들은 돈을 내고 차를 빛나게 닦는다. 반대편에서는 한없이 밖에서 눈을 치우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이 아무리 치워내도 하늘에서 끝도 없이 내리는 눈은 도로를 다시 덮을 것이다. (눈을 치울 때에도 이들을 지휘하는 '마름' 역할을 하는 이는 백인인 것에 주목하자) 이런 눈이 주는 무의미함 속에서 두 계층이 살아가는 방식은 적나라하게 대조된다.

그렇다면 모스크바는 22년 전 로제타가 살아간 벨기에보다도 꿈도 희망도 없는 곳인가? 불행 중 다행히도 도시의 음지에서는 아이카에게 연민을 느끼고 자신의 공간과 마음을 내어주는 타인이 있다. 그렇다면 아이카는 이들에게서 구원을 찾을 수 있을까? 그녀가 타인으로부터 받는 선의는 크게 조건부로 받는 선의와 대가 없이 베풀어 주는 선의로 나뉜다. 서성이는 아이카에게 일자리를 주겠다고 먼저 명함을 내민, 빨간 차를 탄 상류층 여자가 전자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녀가 베푸는 호의는 어떤 특정 조건을 만족했을 때 받을 수 있는 것이며, 아이카의 유독 딱한 사정을 봐주는 법이 없이 금세 유효기간이 만료되고 마는 선의이다. 여자 의사 또한 그녀의 목숨을 구할 정도로 절실한 치료를 해주지만, 그녀의 도움 또한 작게나마 대가를 필요로 한다. 이에 반해 주인공이 우연히 들어간 동물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청소부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신의 공간과 따뜻한 차를 내어준다. 이는 <로제타>의 리케가 어떤 오묘한 호감과 호의를 가지고 로제타를 자신의 공간으로 초대했던 것을 연상하게 한다.

 

ⓒ 디오시네마

그러나 이들 사이는 서로가 서로를 대체할 수 있는 노동자라는 점에서 이들의 우정은 위태롭다.(또는 <로제타>의 서사를 알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진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에서도 적나라하게 그린 바 있지만, 일자리를 서로 차지하기 위한 자본주의의 최하류 계층끼리의 육박전은 계급 간의 투쟁에서도 볼 수 없는 더 절박하고 처절한 감정을 자아낸다. 이들은 자신의 일자리를 되찾기 위해 악다구니로 달려들고, 때로 비슷한 처지의 누군가를 낭떠러지로 밀거나 등에 칼을 꽂기도 한다. 이런 긴장을 가진 것도 잠시, 아이카의 구원자는 정말 고맙게도 거짓말처럼 화면에서 퇴장한다. 우리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웃고 흥얼거리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다. 결국 아이카는 자신이 싸워서 쟁취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떨어진 선물처럼 주어진 일자리에 감격한다. 그리고 남의 불행을 자신의 행운처럼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쯤 되면 극한의 상황에 부닥친 이들에게 연대와 윤리를 요구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은 아닌지 자문하게 된다. 철저하게 자본주의화된 사회는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약간 누군가를 먹잇감으로 삼는다는 약육강식의 원칙을 충실하게 따르기 마련이다.

현실이 주는 부조리는 아이카가 일하게 된 동물 병원 안에서 최절정에 이르고 만다. 골방에서 홀로 모유를 짜내어 걸레물에 버리는 아이카와, 옆구리가 찢어진 채로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는 닥스훈트. 여기에서 어미 개가 더 인자하고 모성 가득해 보이는 아이러니는 극의 페이소스를 극대화한다. 이쯤에서 돌아볼 때, 다르덴 형제가 최소한 같은 인간이라는 선상에서 고민했던 노동 조건의 문제를 드보르세보이 감독은, 동물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는 인간 조건으로 한층 더 끌어내리고 있다. 성공과 실패 여부를 떠나 스스로 생사의 기로를 선택할 수 있는 자(로제타)와, 그런 선택조차도 못한 채 착취당하다 남에게 '도살'당할 처지인 자(아이카). 혈육이 자기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는 자와, 자신을 포함한 온 일가족과 함께 도살장으로 같이 끌려갈 처지인 자. 두 인물의 불행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런 창구 없는 감옥에 갇혀 있는 자는 결국 아이카이다.

 

ⓒ 디오시네마

영화는 사실주의 기법을 후반부에서도 끝까지 고수하면서 플래시백 하나 없이 오직 인물의 대사만으로 아이카에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점차 밝혀간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야 그녀는 아이를 낳게 된 연유를 고백한다. 그리고 고백 하나만으로, 우리는 그동안 아이카에게 가졌던 의구심을 한순간에 거두어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헌데 그녀는 왜 자신의 불행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가? 이런 딱한 사정을 말했다면 누군가 그녀를 더욱 측은히 여겨 상황이 더 나아지지는 않았을까? 이 사실을 마지막까지 감췄다는 점에서, 우리는 주인공이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한지를 엿볼 수 있다.

관객들은 이제 하혈을 하면서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재봉 기술로 창업하기'라는 낡은 책이 그녀에게 갖는 의미를 깨닫는다. 그녀가 카자흐스탄에서 모스크바에 이주해 왔을 때 어떤 부푼 꿈을 좇아서 왔는지, 스스로의 능력을 얼마나 믿고 있었는지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닥친 임신이라는 불행을 그녀는 그저 덤덤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는 마치 불행을 폭설과 같은 자연재해처럼 어쩔 수 없는 것, 그때그때 치우면 되는 것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 그녀는―남들의 시선에서는―비겁하게 도망가고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지어낼지언정, 자신의 운명을 비관하거나 의지를 꺾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노동 안으로 침잠하고 최후의 심판을 유예하면서, 그녀는 스스로의 운명을 구제하고자 한다.

아이카는 모스크바라는 도시를 온통 헤매고 다니다가 끝내 돌아와야 할 곳, 즉 아이가 있는 병원으로 돌아오고야 만다. 아무리 제 운명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돌고 돌아 다시 처음 그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은 비극을 암시한다. 아이의 울음소리에 못 이겨 젖을 물리고 엄마와 아이의 살과 살이 맞닿는 순간, 그녀의 운명은 더이상 치우고 말면 되는 자연재해가 아니게 된다. 양가적인 감정이 그녀를 휩싸고, 최후의 5분 동안에 그녀가 눌러둔 모든 양심과 가책, 어미로서의 애처로움, 비극성이 봇물 터지듯 터져 눈물이 되어 흐른다. 영화는 집요할 정도로 최후 마지막 순간까지 여성의 몸을 있는 대로 쥐어 짜내면서 보는 이를 탈진하도록 한다. 이처럼 <로제타>와 <아이카> 모두 극한의 상황에 인물을 몰아넣고 최후에 인물들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추적하는데, 그들이 무덤덤하게 숨기고 있던 인간성, 아니 '인간스러움'은 최후의 바닥에 살아있던 양심이 경련하는 듯이 발현되는 듯하다.

[글 이지영, karenine@ccoart.com]

 

아이카

Ayka

감독

세르게이 드보르체보이Sergei Dvortsevoy

 

출연

사말 예슬라모바Samal YESLYAMOVA

 

수입 달빛공장

배급 디오시네마

제작연도 2018

상영시간 114분

등급 12세이상 관람가

개봉일자 2021.03.25

이지영
이지영
평이한 문장이지만 사색을 담은 글을 씁니다. 투박하고 건조한 문장으로 읽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고 싶습니다. 글을 통해, 삶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진실의 일면에 다가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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