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의 아내' 불안과 불신에 관한 두 개의 영화, 두 개의 시나리오
'스파이의 아내' 불안과 불신에 관한 두 개의 영화, 두 개의 시나리오
  • 배명현
  • 승인 2021.04.01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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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노감독의 시도에서 찾은 새로운 이야기들"

'구로사와 기요시'는 역시 이번에도 불안에 관한 영화를 찍었다. 다만, 이번 작품은 기존의 그것들과는 다르다. 영화는 과거를 배경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 사실을 증명하듯 감독은 최근 국내에서 진행된 GV(Guest Visit, 관객과의 만남)에서 <스파이의 아내>에서 특히나 중요한 것이 '과거'라고 말했다. 현대를 배경으로 하면 아직 결정되지 않은 사건과 윤리적 문제들 때문에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없지만, 이미 판단이 완료된 과거의 사건을 다루게 된다면 선과 악의 문제가 결정되어 있었기에 모호함을 해결할 수 있다고 설명하며 말이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플롯의 흐름이 복잡하지 않은 대신 당대를 판단하는 기준과 시선의 엄격함이 느껴진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결말을 알고 제작하는 영화였기에 특별한 경험이었다고,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한다는 결말이 중요했다고 말한다. 영화도 그런 특별함을 반영하는 듯 기존의 모호함 대신 보다 명징한 상징과 미장센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사실이 영화를 단순하다거나 나이브하다고 결정짓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명확한 역사적 사실을 가반이 된 이 영화는 사실 사이의 가상, 가상 사이의 진실을 포착한다. 그리고 이때 미묘하게 드러나는 인물들의 표정과 감정선을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스파이의 아내>는 독법이 중요한 영화이다.

 

ⓒ 엠엔엠 인터내셔널

영화의 외피(역사적 사실)를 벗겨냈을 때, 드러나는 인물들은 얼굴과 표정으로 당대의 시대를 은유한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시대를 살아가면서 개인의 자유를 억압받는 것을 중점적으로 다루려 했다. 이를 반영하듯 영화는 시대를 대표하는 세 명의 인물을 등장시키고 이들은 서로 다른 이해와 상황으로 다루어지며. 개인과 사회라는 구조를 은유한다. 앞서 말한 감정선과 인물들의 표정은 이 은유를 읽어내는 독법 중 큰 비중을 차지한다.

독법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소설적'이라는 느낌이 다분하다. 영화가 가진 영상의 총체라기보다 소설에 가까운 '묘사'에 중심이 된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마 추측컨대 시나리오를 작업한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그의 영화 <아사코>(2019)와 마찬가지로 그는 인물을 다룰 때, 소설적인 묘사의 방식으로 다룬다. 그의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영상을 소설로 만들어 놓은 것만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특히, 얼굴의 표정과 작은 손짓, 동작들의 미세한 움직임을 보고 있노라면 소설적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이번 시나리오도 류스케의 방식으로 작동하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촬영은 분명 기요시의 방식이지만, 인물들이 작동하는 방식은 류스케의 방식이다.

두 감독의 만남은 인물들을 재미있는 지점으로 데리고 간다. 특히 영화 속 영화는 이 인물들을 추동하게 하는 하나의 도구로써 완벽하게 작동한다. 30년대 범죄 영화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는 이 영화(이하 작은 영화)는 총 세 번에 걸쳐 등장하게 된다. 영화 초반 가족들에게 보여줄 때, 중반 회사에서 시사회를 진행할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토코'(아오이 유우)가 군인들 앞에서 신문을 받을 때. 이 작은 영화는 사토코의 남편인 '유사쿠'(타카하시 잇세이)가 '감독'한 것으로 그가 만주에서 731부대를 조사한 증거를 위장하기 장치였다. 이 거짓을 위해 꾸며진 작은 영화는 총 두 번 기능을 발휘한다. 한 번은 만주에서 국가를 속일 때 마지막은 사토코를 속일 때다.

 

ⓒ 엠엔엠 인터내셔널

하지만 재미있는 점은 이 영화가 마지막에 상영되기 전부터 '사토코'는 '유사쿠'가 자신을 속일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유사쿠가 자신에게 모종의 비밀을 밝히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불안을 느낀다. 그렇기에 그녀는 유사쿠가 가지고 있던 비밀문서를 금고에서 꺼내 '야스하루'(히가시데 마사히로)에게 전달한다. 이때부터 그녀는 말을 바꾸기 시작한다. 이전까지 나라와 자국민을 희행해 얻는 정의가 무슨 소용이냐 묻지만, 이후부터 그녀는 '후미오'(반도 료타)를 희생시킨 후, 자신과 남편의 행복을 위해 움직인다. 그녀를 바꾼 건 그녀 혼자 집에서 본 작은 영화였다.

'사토코'는 처음엔 스파이의 아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만 후반에 가까워지자 스스로를 스파이의 아내라 칭한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기만하면서 자신의 사랑에 대한 믿음을 지키려 한다. 하지만 그의 남편인 '유사쿠'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건 개인이다. 자신의 신념과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성취를 영화 내내 끌고 간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아내마저 희생(?)시킨다.

'이 희생'은 영화에서 가장 의문스러운 부분이다. 유사쿠는 사토코에게 미국으로 따로 떨어져 가야 한다고 설득한다. 증거물을 나누어 가져 가야 안전하다고 말하며. 하지만 결국 드러나는 사실은 증거는 온전히 자신이 챙긴 뒤, 사토코는 작은 영화를 챙겼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마지막에 “훌륭해”라고 외치며 쓰러지는 장면이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까지 속았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받아들이며 기절해버린다.

하지만 이 기절은 남편의 거짓을 깨달았다기 보단, 자신이 믿고 있던―남편이 자신에게 거짓을 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느껴지는 충격으로 보인다. 이때 한국어로 번역된 'お見事'는 칭찬할 때 쓰이는 구두어(口頭語)의 역할을 하지만, 특히나 퍼포먼스나 예술 작품을 대상으로 할 때 쓰이는 단어이다. 사토코는 자신을 작은영화 안의 주인공이자 남편이 짜놓은 현실 각본의 주인공을 완벽하게 성공시켰다.

 

ⓒ 엠엔엠 인터내셔널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의문은 '그렇다면 유사쿠가 사토코를 속이기 위해 처음부터 짜놓은 덫인가 아니면 그가 스파이―물론 그는 자의로 움직인다는 점을 들어 스파이임을 부정하긴 했지만―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인가. 전자라면 분명 파렴치한이 되겠지만 후자라면, 최소한 아내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진짜 증거를 주지 않았다고 해설 할 수도 있다. 재미있는 점은 이에 대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자신도 모른다"고 답한다. 인간의 양면성을 살리기 위해 일부러 애매하게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감독의 답을 조금 더 이어가자면, 이 장면 이후 곧바로 연결되는 '유사쿠가 배를 타고 떠나는 씬'도 본래의 각본에는 호화 유람선을 타고 떠나는 장면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영화의 예산 문제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관객들이 해석한 환상씬 혹은 사토코에 대한 인사가 아닌 일본이란 국가 자체에 보내는 인사였으며, 예산의 부족으로 작은 배를 사용했다고 한다. 약간은 김빠지는 대답이긴 하지만 그는 해석의 다양성보다는 감독이 겪는 현실적 문제를 적극적으로 어필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이후 사토코는 정신병원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녀는 말한다. "저는 미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건 제가 미쳤다는 사실을 증명하죠. 이 나라에서는요" 패망이 확실해진 나라에서 그녀는 모든 희망을 버린다. 그리고 그날 밤 폭격이 시작되고 폭격당한 일본을 바라본다. 이때 카메라가 잡는 대상은 폐허가 아닌 사토코의 얼굴이다. 그녀의 얼굴은 폐허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준다. 감독은 이 장면을 들어, 무엇을 보았는지 보다 '보다'라는 그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본래의 각본에는 고베의 공습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전쟁을 어떻게 보았고 어떻게 느꼈는지를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고 한다. 과연 기요시다운 대답이었다. 영화 내내 유사쿠는 만주에서 보았던 것을 말하고, 사토코는 자신의 남편이 가지고 온 증거를 본 뒤 달라졌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한 야스하루만이 자신의 망해가는 조국에 충성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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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끝까지>(2019) '요코'(마에다 아즈코) ⓒ 부산국제영화제
사토코(아오이 유우) ⓒ 엠엔엠 인터내셔널

사토코는 해변을 달리며 눈물을 흘린다. 이때 영화는 끝났어야 했다고 한다. 관객인 나조차 이제 영화가 끝나겠다고 생각을 했다. 이것만으로 영화로서 충분히 완결성을 가져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본래 각본에는 존재하지 않은 그 이후의 이야기들을 만들었다. 그는 블랙아웃 스크린에 자막을 띄우며 구체적인 사실인 마냥 유사쿠의 생사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감독은 '이후'를 말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패망하긴 했지만 지금까지 사토코라는 인물이 견딘 시간을 통해 희망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현재를 살고 있기에 이 희망은 증명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 자막은 심지어 촬영할 때에도 계획에 없었지만 편집을 할 때 넣었다고 한다. 글 서두에 적었던 감독의 특별한 경험이 어떤 의미였는지 두드러지는 지점이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지구의 끝까지>(2019) 이후 과거로 돌아왔다. 그는 여전히 개인을 다루고 있었지만 이번 작품에서 보여준 과거는 사회와 개인의 결부가 컸다. 결말이 정해진 상황에서 개인에게 매몰되지 않으며, 동시에 주인공에게 희망을 발견할 여지를 주었다는 것은 역시 그가 명작들을 만들어 낸 거장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
ⓒ 엠엔엠 인터내셔널

스파이의 아내

Wife of a Spy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Kurosawa Kiyoshi

 

출연

아오이 유우Aoi Yu
타카하시 잇세이Takahashi Issei
히가시데 마사히로Masahiro Higashide
반도 료타Ryota Bando
츠네마츠 유리Tsunematsu Yuri
미노스케Minosuke
현리Hyunri
사사노 타카시Sasano Takashi

 

배급|수입 엠엔엠 인터내셔널

제작연도 2020

상영시간 116분

등급 12세이상관람가

개봉일 2021.03.25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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