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파괴하지도, 공허하게 내버려 두지도 않는 그 시절의 <화양연화>
나를 파괴하지도, 공허하게 내버려 두지도 않는 그 시절의 <화양연화>
  • 이지영
  • 승인 2021.03.24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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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지난 세기를 추모하며

영화 <화양연화>(2000)가 4K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극장에서 재개봉하였다. 그리고 바로 작년 7월, 홍콩 국가보안법이 시행되었다. 수년간 격렬한 시위를 이끌어왔던 홍콩 민주화 진영의 단체가 줄줄이 해산했고, 데모시스토 당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 중 많은 이들이 국외 망명을 택했다. 지난 세기에 홍콩을 방문했었던 이들은, 지금의 홍콩이 자신이 보았던 그 시절의 홍콩 같지 않다고 한탄 어린 마음을 표한다. 아마도 이들은 오늘날의 홍콩을 보기 위해 직접 떠나기보다는, 왕가위 감독의 전성기에 아름답게 박제된 20세기 말 홍콩의 이미지를 기억 속에서 재생산하고 소비하지 않을까 싶다.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는 2000년대 초입에 이미 홍콩에게 다가올 아픔을 예견하고 있는 듯하다. 잠깐 동안 스쳐 지나간 홀가분한 자유의 '바람', 그 꽃다웠던 한 시절이 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그들만의 쓸쓸하고 고독한 감정을 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영화는 서서히 내리막을 걷고 있던 홍콩 영화의 전성기에도 이별을 고한다. 홍콩의 얼굴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두 배우는, 시대적으로나 영화사적으로 어두운 전망을 걷고 있는 한 나라의 정서를 연기하는 데 한 치의 모자람도 없다. '차우'와 '첸 부인'을 연기한 양조위와 장만옥 배우는 막 피어오르는 신인과 같은 풋풋함이 아닌, 중견 배우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이 절제된 감정, 그리고 배우로서 가지는 원숙미의 절정을 보여준다.

 

ⓒ (주)디스테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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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우(양조위)와 첸 부인(장만옥)의 만남은 바로 옆 하숙집에 살게 된다는 단순한 우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우연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차우의 부인과 남편 첸은 잦은 출장과 야근으로 자주 집을 비운다. 그렇게 배우자들을 멀리 보내고 남겨진 두 사람은 같은 아파트의 계단에서, 식당에서, 복도를 서성이다가 우연히도 서로를 마주치는 일이 생긴다. 그리고 또 우연한 기회로 서로에게 무협소설을 좋아한다는 공통의 취미가 있음을 알게 되며, 서로의 넥타이와 가방이 자신의 배우자가 선물해 준 것과 똑같다는 우연을 발견해낸다.

우연의 일치는 끝내 사건의 실마리가 된다. 여기서부터 두 사람은 모종의 이유를 찾기 시작한다. '그 사람들'은 처음에 어떻게 시작된 걸까?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이며, 왜 시작된 걸까? 한날한시에 같은 공간에 이사하여 들어온 것도, 똑같이 버림받은 처지가 된 것도 어떤 필연이 있었기 때문일까? 그다음부터, 우연은 우연이 아닌 것이 된다. 즉, 이들 사이에는 우연을 가장한 암호가 생긴다. 차우가 먹고 싶었던 검은깨죽을 첸 부인이 우연히도 부엌에서 끓이게 되어서 그가 맛있게 먹게 되며, 차우는 손 놓고 있던 무협 소설을 다시 쓰기 위해 구태여 방을 구하고 그녀를 무심하게 초대한다. 반드시 그를 위한 죽이 아니어도 되었고, 그녀를 위한 방이 아니어도 되었다는 듯이, 그들의 끌림과 제안은 기막힌 우연이라는 코드로 바뀐 채 유려하게 흘러간다.

 

ⓒ (주)디스테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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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들이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이처럼 암호화된 코드로 이루어져 있다. 장만옥 배우의 여러가지 치파오와 하이힐이 이를 잘 표현하고 있듯이, 겉보기에 이 코스튬은 형형색색으로 아름다우나 사실은 온몸과 마음을 조이는 압박감을 준다. 첸 부인은 하숙집 주인들이 밤새 마작을 한다는 핑계로 차우의 침실에서 하룻밤을 보내지만, 그 하룻밤은 결코 열정적이고 자유분방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치파오 때문에 불편하고, 긴장되며 갑갑한 시간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녀는 하이힐을 벗어 던지고, 고통스러운 한숨을 내쉰다.

영화는 감정의 진폭과 대사가 지극히 절제된 만큼, 연출이며 배우의 의상이 많은 것을 대신 말해준다. 특히 극의 한중간에서 초록빛과 붉은빛이 오묘하게 반반 섞여 있는 장만옥의 치파오 색깔은, 첸 부인의 내면이 흔들리고 있음을 미장센적으로 유려하고 아름답게 표현한다. 초록색은 일상의 공간, 남편의 부재의 공간에서 그녀가 자주 입던 옷 색깔이다. 그리고 늘 누군가를 기다리는 전화기 또한 초록 빛깔이다. 그러나 그녀가 결정적인 전화 한 통을 받고 차우의 방으로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가는 순간, 짙은 빨간색 외투, 강렬한 붉은 커튼, 붉은 방, 그리고 붉은색과 잘 어울리는 칸쵸네 음악은 이들의 감정의 진폭이 이전보다 커졌음을 대변한다. 결국, 이들은 “많은 것은 나도 모르게 시작되죠.”라고 서로에 대한 마음을 고백한다.

차우의 방은 둘에게 무슨 의미인가?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는 불륜하는 이들의 밀회 공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필자의 감상으로 이 공간은 남겨진 사람들이 홀로서기를 하여 떠날 준비를 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이 홀로서기의 시간은 그들이 결코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무게였을 것이다. 먼저 차우는 이 새로운 방에서 반쯤 잊고 있던 무협 소설가의 꿈을 다시 키운다. 그의 첫 독자인 첸 부인과 다듬어 가면서 그 순간만은 신문 편집 기자라는 신분을 모두 잊은 채, 작가라는 자신의 새 자아를 맞이한다. 그리고 소원대로 잡지에 소설을 싣는 데도 성공한다.

 

ⓒ (주)디스테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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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 부인에게도 차우의 방은, 남편을 떠나기 위한, 혹은 남편으로부터 정신적 독립을 준비하는 공간이다. 그녀가 차우의 소설 쓰기를 도와주었듯이, 차우는 그녀의 남편 역할을 대신 연기해주면서, 매번 가상의 상황임에도 가슴 아파하는 그녀를 다독여준다. 그리하여 시행착오를 겪어 더 강한 마음을 갖게 되도록 진심으로 도와준다. 이들이 서로를 의지하는 시간이 깊어질수록, 애초에 원인을 제공했다고 생각했던, 불륜을 저지른 배우자들은, 원래도 뒷모습 밖에는 나오지 않았으나 점차 조명으로부터 페이드아웃 된다.

사실 그들은 인생의 무대에서 그렇게 중요한 배역이 아니었다는 것임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오직 한 점의 허점도 용서하지 않는 스스로에 대한 잣대, 자신을 강하게 옥죄고 있던 치파오 같은 도덕 관념만이 강한 보호색으로 남아있던 것이다. 그 도덕 관념이라 함은, 그들과 우리는 달라야 한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남겨진 자들끼리 서로를 의지해야 했던 것은, 그 배우자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인간에게라면 주어지는 필연적인 고독을 감당할 준비가 않았기 때문이리라. 이들은 서로의 연약함을 잘 파악하고, 이를 해치지 않은 채 서로 보듬는 역할을 한다.

이제 상처가 아물어 갈 때쯤, 좀 더 적극적인 선택이 남아있다. 둘은 모든 걸 버리고 함께 이국땅으로 떠날 것인가? 차우는 떠날 준비가 되었으나, 첸 부인은 결국 남편을 떠나지 못한다. 그리고 차우는 그녀가 떠나지 못한다는 선택마저도 존중해주면서 '떠날 자신을 연기'하며 그녀를 돕는다. 잡았던 손을 놓자 허공을 맴돌다 팔을 부둥켜안는 떨리는 손, 차우가 떠난 빈방에 홀로 남아 그녀의 속눈썹이 작게 떨리는 모습으로, 장만옥은 첸 부인의 내면이 얼마나 요동쳤는지,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했는지, 그 내면의 여진을 보여준다.

 

ⓒ (주)디스테이션
영화 <중경삼림> ⓒ (주)디스테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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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깥으로 잠시 나가서, <화양연화>는 앞으로 다가올 중국의 문화대혁명, 그리고 캄보디아에서는 1970년대 악명 높은 크메르루주 시기가 오기 직전인 1962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대 혼돈이 초래되기 전에 자신의 터전에 남을지, 낯선 땅으로 피난해야 할지의 갈림길에서, 누구도 이 길이 옳다고 쉽사리 판단하지 못하는 시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영화 <중경삼림>(1994)이 모종의 자기애를 더하여, '파인애플 통조림의 유효기간' 같은 가볍고 경쾌한 감성으로 말했다면, <화양연화>가 묘사하고 있는 감정은 이제 좀 더 서늘하고 처연하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세월이 몇 년 흘렀고 두 인물은 가끔씩 서로를 찾아갈 만큼 그리워하지만, 각자의 터전에서 홀로서기를 한 채로 살아간다. 차우는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신전으로 가서 남모르는 비밀을 작은 구멍에 속삭인다. 이 장면은 두 사람이 서로를 생각하고, 기다림을 통해 사랑하는 방식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아주 작은 구멍에 뿌려진 기억의 씨앗은 아무도 모르게 자라서 몇 년 뒤 작은 수풀을 이룬다. 그러나 그 수풀은 생명력을 과시하면서 외벽을 갈라지게 하지도 않고, 그저 빈 폐허처럼 보이는 앙코르와트를 조금 더 생기 있게 만들어줄 뿐이다. 나를 파괴하지도, 그러나 공허하게 내버려 두지도 않는 기억의 씨앗이, 두 사람이 서로의 암묵적인 동의 아래 써 내려 가고자 한 <화양연화>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각자의 길에서 어떤 선택을 내렸든, 아름다운 시절을 공유했다는 것만으로 누군가를 그리워할 이유는 충분하다.

[글 이지영, karenine@ccoart.com]

 

ⓒ (주)디스테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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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花樣年華

In The Mood For Love

감독

왕가위

王家卫

Kar Wai Wong

 

출연

장만옥Man-Yuk Cheung

양조위Tony Leung Chiu Wai

반적화Rebecca Pan

손가군Paulyn Sun

 

수입 (주)엔케이컨텐츠

배급 (주)디스테이션

제작연도 2000

상영시간 99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0.12.24

이지영
이지영
평이한 문장이지만 사색을 담은 글을 씁니다. 투박하고 건조한 문장으로 읽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고 싶습니다. 글을 통해, 삶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진실의 일면에 다가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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