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리얼리즘 이후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리얼리즘 이후
  • 배명현
  • 승인 2021.03.22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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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여기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하는가"

우리는 돈이 만능인 사회를 넘어 신이 된 사회를 살고 있다. 가격표가 붙지 않은 것이 우리 주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전까진 상품이라 여겨지지 않은 것들조차 상품의 영역으로 치환한 뒤 가격을 매기고 있다. 위 문장에서 사라진 주어는 물론 자본주의이다.

이 자본주의는 시스템을 넘어선 하나의 세계관이다. 때문에 우리에겐 어찌할 도리가 없어 보인다. 우리가 자연이란 상태를 바꾸려 하고 싶어도 능력의 부족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처럼, 자본주의라는 세계관 또한 우리는 컨트롤 할 수가 없다. 누구나 문제에 대해선 인식하고 있지만, 누구도 바꾸자고 할 수 없는 이유는 이 능력의 부재에 있다.

왜인가. 인간의 대뇌피질로는 그 존재를 예측할 수도 없고 조종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주식 시장이 불황일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한강 물 온도'라는 농담이 웃기게만 들리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심지어 이 세계에서는 인간의 가치가 돈으로 환원되고 이 가치에 따라 모든 것이 나뉘게 된다. 현대만큼 평등과 자유를 말하는 시대도 없지만, '종래의 계급 사회와 얼마나 달라졌는가'를 물어본다면 약간의 회의적인 생각이 떠오른다. 앞서 이야기했듯 돈은 신이다. 그리고 우리는 신을 파악하고 조종할 능력이 없다.

 

ⓒ 영화사 진진
ⓒ 영화사 진진

그렇기에 나는 현재를 이렇게 요약하고 싶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없다. 여기에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존재한다" 하지만 나는 이 질문에 되물어보고 싶다. "그렇다면 팔지 않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는가" 여기에서 들리는 대답은 거의 대부분 인간성내지는 도덕적 관념들이 대부분이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반윤리적, 반도덕적인 행위와 실천들을 보아왔다. <나는 나를 해고 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드는 영화이다.

내용의 전부이자 핵심을 관통하는 이 제목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노동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노동을 하지 않으면 상품사회에서 우리는 죽고 만다. 인간은 상품이자 기호가 되었기 때문에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재화조차 노동을 대가로 얻은 돈으로 구입 해야만 한다. 우리가 노동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는 이유이다. 설사 해방된다 하더라도 불노소득을 취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 해방은 죽음을 의미한다. 해고는 노골적인 살해에 가깝다. 그 당연한 귀결로 사직은 자살을 의미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 '정은'(유다인)은 살해와 자살 사이에 놓여있다.

 

ⓒ 영화사 진진
ⓒ 영화사 진진

정식 절차를 밟아 입사했지만 정은은 모종의 이유로 인해 자리에서 밀려난다. 그녀는 본사에서 매우 유능했지만 새로 부임한 곳에서는 무능하다. 그녀는 자신의 능력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공간에 배치되어 있다. 7년간 근무했던 회사에서 하청업체로 떠밀려온 정은은 자신의 일을 구하려 노력한다. 이 행위는 일종의 발악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 표면적인 전출일 뿐이고 이는 스스로 퇴직을 하라는 기업의 논리이니 말이다. 하지만 정은은 계속해서 자신의 일을 찾으려 한다. 일 년을 버티면 다시 복귀를 시켜주겠다는 약속에 맞춰 그녀는 최선을 다한다. 경험 없는 육체노동을 수행하려 하고 배우려 한다. 하지만 이 노력은 하나의 전투에 가깝다. 단지 일을 배우고 수행하려 하는 것이 다가 아닌 성차별과 본사의 압박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다.

전기를 다루면서 비싼 작업복조차 자신의 임금을 통해 구매해야 한다는 것, 지불되어야 할 임금이 부당한 차등에 따라 지불된다는 것, 거기에 인원수를 맞추라는 압박 등 정은으로 하여금 이곳에서 일하는 이들은 더욱 힘들어진다. 원래 있던 노동자가 새로 발령받은 노동자 때문에 피해를 받는 것처럼 그려지는 서사는 현실의 거울 역할을 한다. 본사와 하청이라는 권력관계를 드러내며 이 영화는 개인의 노동이 한 권력 아래서 얼마나 비참해질 수 있는지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 영화사 진진
ⓒ 영화사 진진
ⓒ 영화사 진진
ⓒ 영화사 진진

우리로부터 멀리 있지 않은 이야기이다. 그래서일까 영화에서는 개인의 노력으로는 극복하기 불가능한 구조가 두드러진다. 영화의 목적이 이 구조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지만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 그리고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포기한 것들을 이 영화는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이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당연히 켄 로치 감독의 <미안해요, 리키>(2019)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영화와 엮어보고 싶다. <브이 포 벤덴타>(2005)와 <칠드런 오브 맨>(2006)말이다. 전자의 영화는 80년대 자본주의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상상'을 할 수 있는 세계라면 후자의 영화는 자본주의의 '대안조차' 상상할 수 없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브이 포 벤데타 이후에 탄생한 영화가 <칠드런 오브 맨>이지만, 현실의 자본주의는 오히려 공고해졌다. 이제 우리에겐 그 대안을 상상하는 능력마저 거세되어버린 것이다.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프레드릭 제임슨과 지젝의 말은 그렇기에 더 암울하게 들려온다.

우리에겐 상상력이 거세되었지만 그 세계에서 저항을 하려는 노력들이 간간이 보이고 있다. 이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도 그 반발 중 하나이다. 대안 자체를 '상상'하고 있지는 않지만 '생성'하려 하고 있다. 이는 세계와 타협을 하여 '상생'을 하려는 것이 아닌 분노를 '생성'해내려는 작업이다. 부조리하다는 인식 자체가 사라진 지금, 우리에게 이 인식 자체를 떠올리려 도화선에 불을 지피려는 영화인 것이다. 여기에 반문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일종의 선동영화인가. 그렇지는 않다. 이 영화는 현실이라 불리는 수만 가지 현상 중 매우 일부만을 축약해 보여주고 있는 것뿐이니 말이다. 선동과 문제를 직시하게 하고 이야기를 발화하게 하려는 것은 전혀 다르다.

 

ⓒ 영화사 진진
ⓒ 영화사 진진

그렇기에 이 영화는 기업 vs 개인이나 혹은 권력의 상위층에 있는 개인 vs 개인의 구도가 아닌 세계 vs 개인의 구도로 보아야 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이 개인의 몰락과 고통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는가에 대해 말이다. 이 구조는 결코 어쩌다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다. 우리가 이 사회에 구성되어 있는 그 자체가 현재의 체제를 작동하게 하는 이유인 만큼 우리의 함묵적인 합의와 역략의 부족이 불러온 결과이자 동시에 원인인 것이다. 우리를 추동하게 하는 것이 경제학에서 이야기하듯 개인의 욕망이고, 홉스가 이야기했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면 이 이야기는 결코 종식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부조리를 경험한다고 해서 자연적으로 사회가 바뀌지 않는다. 이제는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든 자본주의는 우리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가장 원초적인 시스템이자 우리의 불문율이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정은이 마을에 불을 들어오게 하며 ―마치 안개와 어둠속에서 희망을 제시하는 듯― 끝을 맺지만 나는 그 결말에 대해선 의문을 가지고 있다. 희망을 찾으려는 노력 끝에 희망이 찾아오리라는 결말은 진정한 '대안 없음'을 방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의 결말은 다시 한번 우리의 능력의 부재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였지만 끝 맛은 씁쓸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였지만 한발자국 더 나아가는 영화가 한국 영화에도 나오길 기대한다. 이 영화 이후 다시 노동과 구조 그리고 세계관에 관한 영화가 얼마나 더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 영화사 진진
ⓒ 영화사 진진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I Don’t Fire Myself
감독
이태겸

 

출연
유다인
오정세
김상규
김도균
박지홍
원태희
이주원
최지혜

 

제작 홍시쥔, 아트윙
배급 영화사 진진
제작연도 2020
상영시간 111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1.01.28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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