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만원으로 극장을 대여하는 방법
[Essay] 만원으로 극장을 대여하는 방법
  • 배명현
  • 승인 2021.04.14 21: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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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에 영화를 본다는 것
일러스트레이션 '미노'

영화를 관람한다는 것은 오로지 '혼자'를 위한 일이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 영상에 집중하는 일에 더 이상 어떤 설명이 필요할까. 우리는 각자에게 허락된 일 인분의 자리에 앉아 영화를 관람할 뿐이다. 대화나 소음을 내는 행위 따위는 허락되지 않는다. 허락된 최소한의 공간을 소극적으로 활용하며 각자의 영화를 즐기면 된다.

불이 꺼지면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향 이외의 소리는 소음일 뿐이다. 암실에서는 무엇이든 영화에 방해가 된다. 일단 관람석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정신은 영화를 향하게 된다. 그 이외의 일이라면 머릿속에서 영화를 재구성하며 해석하려는 노력만이 있을 뿐이다. 종종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기에 문제가 되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같은 공간에서 '함께'와 영화를 보는 일은 종종 부담이 되곤 한다. 팝콘을 씹는 소리나 무례한 말소리 혹은 통화소리가 들려올 때. 혹은 핸드폰의 빛이 뜬금없이 눈으로 침범해 들어올 때가 그렇다. 누구나 경험해봤을 일들이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나의 영역을 침범당한 듯한 기분을 느낀다. 완연하게 유지되어야 할 실체적, 추상적 공간 모두 말이다.

그렇기에 영화관이 비어있다는 사실이 썩 마음에 들었다. 코로나는 영화관을 내게 만원에 대여하게 해주었고 그 넓은 공간을 오롯이 나 혼자 차지할 수 있게 했다. 마스크를 써야 한다는 점이 내내 불편하긴 했지만, 타인에 의해 원치 않는 형태로 기분이 구겨지는 것 보다 참을 만했다. 거대한 스크린과 고품질의 다채널 스피커가 러닝타임 동안은 나의 소유였다.

매주 그 순간을 즐겼다. 자리에 앉으면 나는 아무도 없는 풍경에 흡족해하며 다리를 양쪽으로 쭉 벌리고 양손을 팔걸이 위에 올려놓았다. 종종 영화를 보면서 문자의 답장을 하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하나의 영화를 상영하는 동안만큼은 온전히 혼자만을 위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영화관은 만원으로 살 수 있는 가장 싼 공간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모 평론가의 글을 읽었다. 이런 기간이 늘어나면 사람들 사이의 문화적 계급의 간극이 더 커질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극장의 스크린과 스피커는 일반적인 가정에서 구현할 수 없는 것이고 이는 영화를 생생하게 체험할 기회를 잃게 만든다는 것이 요였다. 나는 동의 할 수 없었다. 영화를 직업으로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야 영화는 삶에서 알파일 뿐이고 그것의 대체재를 찾기란 쉬울 거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러다 문득 이 기간이 너무 길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이것들이 직접 나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기대하던 영화가 촬영 중지된다거나 영화사가 어려워졌다는 소식은 먼 이야기였지만 영화관과 아르바이트생이 사라져가는 것은 촉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5층짜리 영화관을 아르바이트생 한 명이 처리했고 자주 가던 독립 영화관 하나는 아예 문을 닫아버렸다. 누린 건 나였지만 대가는 공간에서 일하는 이들의 몫이었다.

그 이후부터 나는 설핏 이상한 부채감을 느끼곤 했다. 사라진 유니폼과 친절을 대신하는 출입 명세서로부터. 팝콘 씹는 소리와 함께 사라진 청소용역노동자의 자리로부터 말이다. 내가 누린 자리의 값에 상응하는 사람들이었다. 영화관은 영화만을 위한 곳이 아니었다. 영화관이라는 명사에 가려진 서로 다른 맥락과 서사를 나는 그제야 알게 되었다. 나는 양쪽 좌석에 끼워진 띠지에 쓰여진 거리두기라는 단어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문화 계급의 따위보단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생계가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제 영화관이 미세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영화관에 사람들이 한두 명씩 늘기 시작했다. 아직 좌석띠지는 여전하지만 긍정적인 소식이 안팎으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개봉을 미루던 영화가 개봉하기 시작했고, 촬영이 재개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어제는 오랜만에 극장에서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들었고 청소용역노동자도 보았다. 이제는 비어있는 극장의 살풍경한 광경보단 불편한 이전의 모습이 절실해진다.

그렇기에 서두에 쓴 내용을 약간 수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영화를 본다는 건 오로지 나 혼자만을 위한 일은 아니라고. 아주 미세하지만 머무르고 있는 공간과 그 기반이 되는 영역에 서로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었다고. 물론 나는 곧 통화소리에 짜증을 낼 것이고 무례한 말소리에 주의를 줄 것이다. 나도 다리를 오므릴 것이고 양쪽 팔걸이는 포기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라면 매우 싸다고 생각한다. 극장과 영화계가 유지될 수 있는 비용과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생계를 위한 비용이 그 정도라면 나는 기꺼이 지불하겠다. 그동안 홀로 영화를 보며 너무 많은 이들에게 빚을 졌다. 영화는 홀로 보는 것이 아니었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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