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아무도 앞자리의 좌석을 발로 차지 않는다
[Essay] 아무도 앞자리의 좌석을 발로 차지 않는다
  • 이지영
  • 승인 2021.03.17 10: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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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고독, 코로나 시대의 영화 보기에 대하여
ⓒ 일러스트레이션 '박미희'

코로나 이전의 극장가를 회고하자면, 이미 너무 먼 시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하다. 그 머나먼 옛날에는IMAX스크린과 사운드를 제대로 누리기 위하여, 낯선 타인과 나란히 앉아 2시간 내외를 함께 보내는 '불편'을 감수해야만 했다. 좋은 자리를 선점하고도 주변 관객 때문에 나의 감상이 심각한 방해를 받았다고 불평을 하며 영화관을 나선 적도 종종 있다. 그럼에도 지금 돌아보면 기억에 남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몇 개 있다.

B급 코미디 영화를 보러 갔던 날, 남주인공의 나름 진지한 키스씬이 나오는 장면이었다. 맨 앞 블록 어떤 여자분이 그 순간을 도저히 참지 못하고 혼자 "풉"하고 웃음이 터지는 바람에, 다른 관객들이 다 같이 그녀를 따라서 웃었다. 디즈니 영화를 보러 갔던 날에는 주인공이 가족과 이별하는 가장 슬픈 장면에서, 옆자리에 있던 꼬마 관객이 어깨를 들썩이며 오열을 하는 장면이 귀엽고도 안쓰러웠다. 그런가 하면 다른 12세 관람가 영화를 볼 때였다. 퀴어 코드가 들어간 씬에서 "엄마, 왜 남자끼리 뽀뽀를 해?"라고 말하는 아이의 외침이 영화 대사보다 또렷하게 들렸다. 학부모님이 옆에서 다급히, 그러나 다정하게 "남자랑 남자도 사랑할 수 있는 거야"라고 작게 말해주던 속삭임이 생각난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를 주인공으로 한 국내 영화를 보던 날, 친일파 인물이 암살당하는 씬에서 근처 나란히 보고 계시던 할머님들이 동시에 일어나 기립 박수를 치시던 풍경은 아직도 기억 속에 살아있다. 영화에 대한 몰입을 깨고 내게로 넘쳐오던 인간의 군상, 지금은 다시 보지 못하는 그리운 모습들이다.

영화관에 간다는 것은 한때 데이트 신청이었고, 회사 동료들과 회포를 푸는 자리였으며, 나의 친애하는 영화 메이트와 아무개 감독전의 도장 깨기를 하던 좋은 나날들(Good old days)이었다. 영화관에 가는 길은 이제 홀로 빈 박물관을 서성이는 것처럼 쓸쓸하다. 영광스러운 옛 시절에나 빈틈없이 꽉 차 있던 영화관의 이미지는, 이제 집단감염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정작 두근대는 마음으로 극장 안에 한 발짝 들어서면, 인적이 별로 없는 쌀랑한 공기가 코끝을 스친다. 출퇴근 시간 지하철보다도 이곳이 차라리 안전함을 깨달으며, 역설적으로 우리는 점점 버림받고 있는 이 신전을 팬데믹의 피난처로 삼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객석에는 한 칸마다 테이프가 세로로 길게 붙여져 있어서, 오늘날 거리 두기의 풍경을 살뜰히 보여준다. 영화 시작 전 안내 화면에서는 "앞자리를 발로 차지 말라"는 경고보다는 "마스크를 벗지 마시오"라는 경고가 더 눈에 들어온다. 이제 극장은, 개인과 그가 홀로 대면하는 스크린, 이 둘만이 있어 영화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이상적인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거대한 스크린 속 아무도 마스크를 쓰지 않은 캐릭터들이 만들어내는 픽션은,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이제 신화나 전설과도 같은 인상을 풍겼다.

넓은 객석의 두 자리를 편하게 차지하면서도 나는 별반 만족스럽지 않았다. 타인의 부재는 더이상 특권이 아니기 때문이다. 타인의 헛기침 소리, 발의 잦은 움직임, 자기들끼리 조용히 속삭이는 소리 따위의 방해를 받지 않고 오롯이 영화에 집중할 수 있음에도, 나는 내심 어떤 이벤트라도 발생하기를 바랬다. 혼자서 실소가 터진 부분에서는 괜히 쑥스러워 하며 ‘왜 웃는 소리가 나지 않지? 나랑 유머 코드 맞는 사람이 아무도 없나?’ 하고 나도 모르게 두리번거렸다. 영화가 조금 늘어질 때는 중간에 지루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사람은 혹시 없는지 복도를 잠시 주시했다. 그러나 객석은 늘 한결같이 고요하다. 어둠 속에 한명씩 자리잡고 앉아있는 저들은 대체 누구일까? 이제는 영화 속 허구적 인물들만큼이나, 이 비정상적인 세상에서 나처럼 홀로 영화를 외롭게 보고 있을 이들이 신경 쓰인다. 불현듯 누군가 뒤에서 나 여기 있노라고, 너와 함께 영화를 보고 있노라고 내 의자를 발로 세게 차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글 이지영, karenine@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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