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 잔잔하고 치열하게
'미나리' 잔잔하고 치열하게
  • 선민혁
  • 승인 2021.03.12 1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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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행복을 바란다

<미나리>를 기다려왔다. 이 영화의 존재를 알고 나서부터 이 작품을 볼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랐고 빈번하게 들려오는 수상소식은 기대감을 키웠다. 유수의 영화제 및 시상식에서 검증된 작품성,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여러 부문 노미네이트가 유력하다는 이유뿐만 아니라 <미나리>를 기대하게 만드는 요소들은 충분했다. 이민 1세대의 삶이 궁금하기도 했고, 한국인과 한국어가 나오는, 미국 땅을 배경으로 한 미국영화라는 점이 흥미롭기도 했다. 그리고 잘 만들어진 '가족 이야기'를 극장에서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 판씨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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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에 대해 가지고 있던 기대가 관람 후 충족되었느냐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 하지만 <미나리>가 좋은 영화인지, 아닌지를 묻는다면, 고민할 필요 없이 좋은 영화라고 대답할 것이다. 고민이 필요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것이 <미나리>에는 너무 많다. 안정적인 카메라는 대부분 장면에서 시각적인 만족감을 느낄 수 있게 하며 플롯은 단순한 구조를 취하고 있음에도 군더더기가 없어 몰입을 방해하지 않고 스토리를 계속 궁금하게 만든다. 배우들은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훌륭한 연기를 펼친다.

<미나리>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정적이라고 할 만하고 직선형의 서사구조는 단순하다. 낯선 곳에 정착하려 하는 가족이라는 소재는 흔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미나리>에서는 뻔하게 예상가능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스토리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우리가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는 클리셰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양인 가족을 멸시하고 인종차별을 하는 서양인 악역이 등장하지 않으며 순자(윤여정)는 노인만이 가진 지혜와 사려 깊음으로 관객들이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전형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 어딘가 수상해 보이는 폴(윌 패튼)은 주인공 가족에게 악재가 되는 사건을 일으키지 않는다.

<미나리>에는 과한 것이 없다. 영화는 캐릭터를 과장하여 관객들에게 감정을 강요하는 일을 하지 않으며 작위를 통해 스토리를 쉽게 풀어나가려고 하지 않는다. <미나리>의 목소리는 절제되어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밋밋하다고 할 수는 없다. 자극적인 요소의 등장과 극적인 전개가 이뤄지지 않으면서도 긴장감이 지속해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 판씨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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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땅보다, 캘리포니아보다 낯선 아칸소에 자리잡고자 하는 주인공 가족에게 노골적인 차별이나 일방적인 적대감을 드러내는 이들이 직접 나타나지는 않지만, 영화는 곧 그런 장면이 나타날 것만 같은 분위기를 거두지 않는다. 수컷 병아리가 폐기되는 연기를 바라보며 아들에게 그러니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던 제이콥(스티븐 연)의 농사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하면서도 시련들이 끊이지 않고, 이 농사가 실패하면 안 된다는 것을 영화는 계속해서 상기시킨다. 뛰면 안 되는 데이빗(앨런 S. 김)의 건강은 무리 없어 보이면서도 위태롭고, 제이콥과 모니카(한예리)의 관계는 끈끈해 보이면서도 순자의 합류 이후에도 멈추지 않는 이들의 갈등은 가족 해체 위기라는 가능성을 지속시킨다. '보이는 것보다 무서운' 숨어있는 불안들이 이 가족에게는 계속해서 남아있는 것이다.

이들의 정착기는 이러한 불안들과 싸워나가는 과정이며 그래서 잔잔하게 흘러가는 이 영화는 치열해 보인다. 보이지 않는 두려움인 불안과는 어떻게 싸워야 할까? 가족을 이끌어 나가는 제이콥과 모니카는 이들이 한국을 떠나게 만들었던 것이기도 한 '꿈'을 통해 그것을 이겨내고자 한다. 그런데 낯선 땅에 이미 도착한 제이콥과 모니카가 꾸는 꿈은 서로 다르다. 제이콥의 경우 자식들에게 가장으로서 자랑스러울 수 있도록, 새로운 땅에서 성공을 해내는 꿈을 꾼다. 계속해서 늘어날 한인들에게 한국의 농작물을 판매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방해하는 시련들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제이콥의 입장에서는 이 꿈이 있어야,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존재하고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니카가 꾸는 꿈은 공동체 그 자체이다. 가족이 존재하고 유지되는 것 자체가 중요한 모니카는 제이콥이 주장하는 이 땅의 가치에 대해서 공감할 수가 없다. 데이빗에게 언제 필요할지 모르는 병원이 가까이에 없는 데다가, 연대를 기대할 수 있는 한인 커뮤니티마저 없기 때문이다. 다른 꿈을 꾸고 있는 제이콥과 모니카는 서로의 불안을 해소시켜줄 수 없고, 결국 이별을 결정하게 된다.

 

ⓒ 판씨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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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가족은 해체되지 않는다. 순자로 인해 '보이지 않아서 더 무서운' 숨어있는 불안이 농작물을 저장해둔 창고가 불타는 모습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숨어있다가 실체를 드러낸 불안은 눈에 보이기에 덜 무섭고, 이를 마주한 제이콥과 모니카는 힘을 합쳐 이겨낸다. 사건이 종료된 후 찾은 냇가에는 미나리가 무성하게 자라있다. 순자가 미나리를 가족들을 먹이고자 심었는지, 판매를 하고자 심었는지를 알 수 없지만 어떻게든 그것은 잘 자란 것이다. 각자 다른 꿈을 꾸며, 서로를 해치기도 하면서도 어떻게든 함께 살아나간 치열한 역사의 이 가족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글 선민혁, sunpool2@ccoart.com]

 

ⓒ 판씨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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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
Minari
감독
정이삭
Lee Isaac Chung

 

출연
스티븐 연
Steven Yeun
한예리Ye-ri Han 
윤여정Yeo-Jong Yun
앨런 김Alan S. Kim
노엘 조Noel Cho
윌 패튼Will Patton
스콧 헤이즈Scott Haze

 

제작 Plan B
수입|배급 판씨네마
제작연도 2020
상영시간 115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1.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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