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케어' 실패한 악당과 성취한 악당
'퍼펙트 케어' 실패한 악당과 성취한 악당
  • 배명현
  • 승인 2021.03.02 12: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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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서사적 문제 속에서도 빛나는 하이스트 여성 버디무비"

어딘가 찝찝하다. <퍼펙트 케어>를 끝까지 보고 영화관을 나오는 순간까지 이런 기분을 버리고 나올 수가 없었다. 왜일까. 나는 그 점에 대해 고심해보았다. 단순히 이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완성도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다. 이 영화를 잘 만들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캐이퍼 무비의 장르적 특색인 짜릿함을 극대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르의 목적'을 잘 살린 영화가 아니다. 그러나 서사의 설득력이 빈약하다.

 

ⓒ TCO(주)더콘텐츠온 ,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 TCO(주)더콘텐츠온,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악당을 주인공으로 한 만큼 이 영화는 빌런이 매력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 주인공이 빌런으로서 성립하는 동시에 매력이 있는가에 대해 나는 약간의 의문이 든다. 물론 말라 그레이슨을 연기한 '로저먼즈 파이크'는 이번에도 멋졌다.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었고 또 역할에 적확한 카리스마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왜인지 그것이 전부인 것만 같다. <퍼펙트 케어>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영화는 서사보단 인물에 집중한다. 은퇴자들의 건강과 재산을 케어해주는 척하며, 뒤에서 작당모의를 하는 모습은 살짝 맛보기로 끝나버린다. 영화는 초반에 인물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만 뭔가 미흡하다. 설정만 보여주고 말았다. 이건 완성도의 문제이다.

나는 예열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서사 작품은 초반이 가장 중요하다. 관람자든 감상자든 독자든, 초반에 흥미를 이끌어 결말까지 데려가야 한다. 이 영화가 캐이퍼 무비인 만큼 인물의 능력을 보여주는 초반 맛보기는 그래서 중요하다. 이때 이전의 영화들을 답습한다면 전형적인 클리셰가 되어버리지만, 효과적으로 사용하면 에드가 라이트 감독의 <베이비 드라이버>(2017) 오프닝 시퀀스가 된다. 관객을 영화 안으로 데려다 놓는다. 그런 점에서 <퍼펙트 케어>는 전형성은 벗어났지만 왜인지 예열이 되지 않은 상태로 본론이 시작되는 느낌을 준다.

영화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제니퍼(다이앤 위스트)를 억지로 요양병원에 옮기기로 한다. 이야기의 중심으로 다가갔지만 왜인지 설득력이 부족하다. 영화 초반에 우리는 법정에서 보여준 말라의 '말빨'을 경험하긴 했지만 왜인지 조금 급하다고 느껴진다. 이 조급함에 대한 느낌은 곧 확신이 된다. 제니퍼가 사실은 마피아와 연관이 되어 있다는 지점부터 말이다. 심지어 마피아가 동원한 변호사마저 말라의 몇 마디에 힘을 잃는다. 판사는 그야말로 무능해 보인다. 이 지점에서 연관해서 바라볼 수 있는 건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회에서 소외당한 노년층마저 돈벌이의 도구가 되어버리는 합법적 시스템과 그에 대한 분노를 일으키게는 만든다. 하지만 그 분노는 이야기가 진행되며 곧 이상한 곳으로 튄다.

이후부터는 타이트해져야 할 긴장감이 떨어진다. 러닝타임에서도 서사적인 설득력도 마찬가지이다. 제니퍼가 사실은 마피아 로만 루네프(피터 딘클리지)의 엄마라는 설정이 나오고부터 이야기는 힘을 잃는다. 겉으로는 평범해보이는 은퇴자가 사실은 마피아의 엄마이고 보석들을 숨기고 있었다? 그래,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영화가 핍진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 이후 마피아가 보여주는 허술함이 아쉽다. 그레이슨은 먼치킨처럼 사건들을 마음껏 주무르고 다니지만, 거대 조직을 가진 마피아는 왜인지 힘을 쓰지 못한다. 그 이후로는 아쉬움이 더 눈에 띈다. 특히 전반부에 깔아둔 긴장이 인물의 자존심과 집착으로 광기로 연결되어야 하는데 이전에 깔아둔 배경의 연결고리가 약하다 보니 인물의 행동 동기가 어설프게 보인다.

 

ⓒ TCO(주)더콘텐츠온,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 TCO(주)더콘텐츠온,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인물의 행동을 무조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원래 빌런은, 특히 광기에 빠진 빌런은 '이해할 수 없을 때' 살아난다. 그리고 오히려 그 점에서 서사의 적확성이 드러난다. 허먼 멜빈의 소설 <모비딕>에서 선장 에이브 허브가 광기 하나로 선원을 몰살시킨 대서사를 복기해보자. 여기서 중요한 건 에이브 허브의 광기 이전에는 모비딕에게 먹힌 다리와 그가 이전에 겪었던 공포와 분노 그리고 트라우마 등 복합적인 '배경'이다. 그레이슨의 행동 동기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레이슨이라는 빌런은 영화 속에서 관객과 거리를 벌리며 홀로 달려 나간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의 후반부에서 긍정성을 보았다. 그레이슨이 뽑힌 이빨을 우유병 안에 넣고 치과로 달려가는 시퀀스에선 그녀의 이후가 궁금해진다. 관객은 본능적으로 행해질 복수를 기대한다. 어떻게 성사시킬 건지와 얼마나 통쾌하게 성취할 것인가. 그러나 감독은 방향을 튼다. 복수를 성공 시킬 수 있는 틀을 완성했고 그녀의 손에는 총이 들려있지만 그녀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다. 오히려 마피아의 동업제안을 받아들인다. 이로서 그녀는 안티 히어로가 된다. 그녀는 단순한 악인이 아니다. '돈'을 위해서 움직인다. 그녀는 돈이 아니었다면 제니퍼를 가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그녀의 선택은 여기서 다시 한번 흥미를 생성해낸다. 복수를 성사시키지 않는다. 일종의 '중립적 악인'인 것이다. 이는 다시 이야기를 초반으로 복귀하게 한다. 영화 초반에 관객에게 주지한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이 행위가 일어날 수 있도록 만든 건 시스템의 불완전성 그리고 그 빈틈을 노리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빈틈은 '완벽한 돌봄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토대가 된다. 이는 이들의 행동에 합리성을 쥐여줄 수는 없지만 행동의 동기를 만들어준다. 때문에 이 영화는 순환하게 된다. 빌런인 그레이슨은 죽었지만 문제의 총체이자 근원인 시스템은 바뀌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한 빌런의 죽음에서 끝나지만 동시에 다른 빌런의 탄생을 예고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후반부가 전부인가? 그렇지는 않다. 나는 이 여성빌런이 전통적 여성상이 만들어낸 빌런에서 벗어났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 점에 매우 신경을 쓴 듯, 영화 초반부부터 주인공의 입을 통해 직접 이야기한다. 영화는 초반 법정 싸움이 끝난 뒤, '남자가 여자에게 당했다'는 점을 비꼬며 한 방 먹여주는 씬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인물은 남성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레이슨과 '프랜'(에이사 곤살레스)은 오로지 둘 만 있으면 되는 레즈비언 커플이다. 이 인물의 성을 바꾸어도 캐릭터의 동기가 성립한다.(다만 앞서 말했듯 설득에 미흡했을 뿐) 이런 여성 빌런은 과거 <미저리>(1990)나 <하녀>(2960)에서 보여준 전통적 여성상을 기반으로 한 빌런과는 괴를 달리 하고 있다.

게다가 결말은 어떠한가. 남성이 주인공의 배에 칼을 꽂지 않는가. 이에 대한 해석은 분분할 수 있지만 나는 이렇게 주장하고 싶다. 지금까지 수많은 서사에서 여성은 빌런이 아니었다. 여성 빌런이 극소수인 이유는 남성의 적이 될 수 없다는 보수적인 시선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선 무능한 남성이 자신의 무능력으로 인해 그 어떤 합법적 가해성을 이루지 못한다. 때문에 그는 비합리적이며 가장 원시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말 그대로 루저 남성은 그레이슨보다 나은 게 없다. 그래서 폭력을 동원한다.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적을 가해할 수 있는 방법은 자폭뿐이었다. 그의 분노의 방향은 자신에게도 돌아온다. 물론 여기에는 그레이슨의 행동을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는 설정과도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전자의 문제에 더 손을 들어주고 싶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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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CO(주)더콘텐츠온,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퍼펙트 케어
I Care A Lot
감독
J 블레이크슨
J Blakeson

 

출연
로자먼드 파이크
Rosamund Pike
에이사 곤살레스Eiza Gonzalez
다이앤 위스트Dianne Wiest
알리시아 위트Alicia Witt
피터 딘클리지Peter Dinklage

 

수입 조이앤시네마
배급 TCO(주)더콘텐츠온 ,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제작연도 2020
상영시간 118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1.02.19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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