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마더'의 반복을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
[Critique] '마더'의 반복을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
  • 오세준
  • 승인 2021.02.0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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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모리 타츠시'의 카메라가 담은 빛에 대해서

2021년을 맞이해 첫 시작으로 '어떤 작품을 이야기하면 좋을까' 고민하다 자연스럽게 <마더>(2020)가 떠올랐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이 작품을 쓰도록 부추겼다. 1) 지난해 부천국제영화제에서 선보인 <바보 타로>(2019)와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마더>는 <일일시호일>(2018) 이후 국내에 처음 소개된 오모리 타츠시 감독의 신작들이라는 점. 2) 두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일본 내 만연한 사회적 문제를 담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면서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 점. 그리고 <마더>를 <코아르 2020 BEST10>에 썼던 단평으로 그치고 싶지 않은 아쉬움까지 포함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로부터

2년 전 배명현 기자가 내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어느 가족>(2018)의 마지막 장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당시 <어느 가족>은 <세번째 살인>(2017) 이후 다시 가족영화로 돌아온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신작이면서, 제71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국내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는 작품이었다. 당시에 난 그에게 어떤 대답을 했는지 또렷이 기억나지 않지만(아마 형편없는 말을 했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그의 질문'은 꽤 오랫동안 내 뇌리에 남았다. 이후 영화를 다시 볼 때마다 '그가 왜 그 장면에 주목했는지' '그의 질문이 향하는 답은 무엇인지' 고민하곤 했다.

 

ⓒ 티캐스트
유리(사시키 미유) ⓒ 티캐스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러하다. 쇼타가 오사무를 바라보며 조용히 "아빠"라 속삭이는 모습을 지나, 친부모가 있는 집으로 돌아간 유리가 아파트 복도에서 홀로 놀고 있는 모습. 이때, 두 가지 생각이 상충한다. 먼저 그녀를 오사무 가족에게 불린 '린'의 모습으로 본다면, 그녀가 문턱에 올라 어딘가를 바라보는 시선 끝에 닿는 빛에는 가족 모두가 옹기종기 모여 밀개떡을 먹은 따스한 추억이 있을 것이다. 반면에 '유리'로 보게 된다면, 그녀가 겪은 일련의 사건과 별개로 친부모로부터 무관심과 학대가 이뤄진 담장 안으로 다시 갇히는 비극적인 결말로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후자보다는 전자에 더 마음이 쓰이는데, 그것은 영화가 오사무 가족을 통해 보여준 따스한 정취 때문일 것이다.

흥미롭게도 유리의 시선이 닿은 빛은 감독의 이전작인 <아무도 모른다>에서 아키라의 시선이 닿은 '빛'과 맞닿아있다. 두 빛은 영화 속 주인공들에게 '그렇게 가족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비춘다. 그리고 그 빛은 내게 아이들이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직조했다. 적어도 <마더>를 보기 전까지 나는 그랬다. 앞서 언급한 <코아르 2020 BEST10>에서 나는 <마더>에 대해서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가족영화와 정반대에 위치한 작품이다"라고 언급했다. 여기서 '정반대에 위치했다'는 말의 의미는 히로카즈의 작품들이 끝에 이르러 주인공들의 유대를 통해서 '다시 가족'으로 회귀하는 것과는 달리 <마더>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족'이란 공동체를 의심하고 허물어내기 때문이다.

 

'오모리 타츠시'의 카메라

영화는 첫 장면부터 본심을 드러낸다. 학교를 마치고 집을 향해 길을 오르던 중 '슈헤이'(군지 쇼)는 자전거를 타고 내려오는 엄마 '아키코'(나가사와 마사미)를 만난다. "학교는?" 이라는 질문에 아무 말이 없는 슈헤이. 아키코는 그의 왼발에 난 큰 상처를 보고 혀로 핥으며 해맑게 미소를 짓고는 "나도 땡땡이 쳤어"라고 말한다. 그녀는 다시 자전거를 타고 내려가고, 슈헤이는 그녀를 따라간다. 분명 이상하지 않은가. 아니. 이 시퀀스를 보면서 관객인 당신은 어떤 감정이 들었는지 무척 궁금하다. 아키코는 아들이 왜 다쳤는지 묻지 않는다. 걱정하지도 않는다. 상처를 치료해주지도 않는다. 분명 그가 걸을 때마다 상처가 쓰라릴 텐데 자전거에 태우지 않고 유유히 홀로 가버린다. "가자!"라는 말 한마디만 남긴 채. 그런데 슈헤이의 반응도 이상하다.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엄마에게 달려가 서러움을 보이지도, 뒤늦게 눈물을 쏟을 법한데도 어떠한 표정도 짓지 않는다. 엄마의 반응에도 무덤덤하다. 무심하게 가버리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부리나케 달려갈 뿐이다.

이후 영화는 두 사람이 수영장에 놀러 온 상황을 보여준다. 과감하게 다이빙을 하는 아키코. 수영장 관계자가 "다이빙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주의한다. 이때, 그녀는 슈헤이에게 "해봐, 뛰어"라고 곧장 말하는데, 그는 분명 다이빙을 해선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엄마의 말에 따라 물속으로 뛰어든다. 이 장면에서 신나게 웃고 있는 사람은 아키코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물리적으로 보여준다. 어느 신사를 지나는 두 사람. 아키코는 자전거를 타고 빠르게 이동하고, 슈헤이는 그 뒤를 뛰어 따라간다. 슈헤이가 잠시 멈춘다. 그는 잔디밭에서 공놀이를 하며 놀고 있는 한 모자(母子)를 바라본다. 익스트림 롱 샷(Extreme Long Shot)으로 찍힌 이 장면에서 슈헤이와 아키코의 떨어진 거리와 그 옆에서 서로 공을 주고받는 한 엄마와 아들의 거리가 단번에 비교가 된다. 여기서 슈헤이가 잠시 멈춰 선 이유가 쉼 없이 달려온 탓에 힘들어서인지, 아니면 공놀이를 하는 그들이 부러워서인지는 알 수 없다.

 

ⓒ 영화 '마더'(2020) 제작위원회
ⓒ 영화 '마더'(2020) 제작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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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마더'(2020) 제작위원회

다만, 그가 멈춰 선 이유에는 관객이 비교적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며 공을 주고받는 모자(母子) 사이의 거리와 멀찍이 떨어진 아키코와 슈헤이의 거리의 차이를 목도해야 하는 감독의 목적이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즉, <마더>의 카메라는 '아키코와 슈헤이 사이의 정확히 가늠할 수 없는 거리감'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거리감은 앞서 언급한 장면에서 느껴지는 감정, 정확히는 어느 가족영화에나 나올 법한 화기애애한 가족의 이미지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마더>를 볼 때면 거부당하고 있다는 불편함에서 비롯된 감정의 출처를 뜻한다. 조금 더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이후 영화는 아키코가 슈헤이를 이용하여 그녀의 부모, 동생, 그녀의 전남편에게 돈을 받아내는 모습, 슈헤이를 집에 홀로 남겨두고 파칭코와 호스트바로 놀러 가 돈을 흥청망청 쓰는 모습, 돈이 떨어질 때면 다시 슈헤이를 그녀의 부모와 동생에게 보내 돈을 받아내는 모습 등 아키코와 슈헤이 가족이 살아가는 방식을—엄마인 아키코가 살아가는 방식에 더 가까운—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마더>의 스토리는 총 세 번의 분기점(플롯 포인트)을 맞이하는데, 그중에서 두 번은 아키코가 남자친구인 '료'(아베 사다오)와 헤어지는 결말로 끝이 난다. 그리고 이 결별은 슈헤이의 삶이 더욱더 비루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키코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인물이다. 그녀는 전형적인 일본형 니트족(NEET,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이다. 그녀가 하는 일은 오로지 (슈헤이를 이용해) 타인에게 돈을 뜯어낼 궁리만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남에게 빌붙는 것이다. 중요한 건 슈헤이가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엄마인 아키코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슈헤이의 자주성은 엄마의 선택에 의해서 부서지고, 그들의 관계는 수직적인 형태를 이루게 된다. 그가 학교에 가서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삶이 엄마인 아키코에 의한 결정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아키코의 삶이 남자친구인 료의 선택에 결정될 때, 슈헤이의 삶은 보호자도, 아빠도 아닌 엄마의 애인이라는 남자의 삶에 끌려갈 뿐이다.

그렇다면 감독의 카메라는 자기 아들을 방치한 무책임한 엄마'만'을 담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감독의 카메라는 (스스로 자처하여) 점점 불행해져만 가는 아키코의 삶 속에서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의 슈헤이를 포착하곤 한다. 이때, 카메라는 슈헤이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관찰하기만을 택한다. 롱테이크로 집요하게 그를 담아내거나 흔들린 상태로 묵묵히 그를 따라갈 뿐이다. 그러다 보니 그의 감정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이를테면 아키코와 료가 섹스를 시작하는 순간, 태연하게 침대를 떠나 화장실 욕조로 자리를 옮겨 잠을 청하는 그는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같이 사는 게 어떠냐는 아빠의 물음에 "엄마랑 있는 게 좋아"라는 그의 대답은 진심일까. 슈헤이는 마치 알에서 깨어난 새가 자신의 눈앞에 있는 대상을 부모로 생각하여 무작정 따르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한편으로 그가 진심으로 엄마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엄마를 위해서' 기꺼이 무슨 일이든 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감독의 카메라는 다큐멘터리적인 시선으로 슈헤이를 담아낸다.

 

ⓒ 영화 '마더'(2020) 제작위원회
ⓒ 영화 '마더'(2020) 제작위원회

영화는 첫 분기점을 지나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시점을 보여준다. 엄마의 키를 훌쩍 넘어선 '슈헤이'(오쿠다이라 다이켄)와 료와의 임신으로 태어난 딸 후유카의 모습을 비춘다. 이 남매는 아무도 없는 강변에서, 에어컨 환풍기들이 자리한 건물 골목 사이에서, 다리 위 어딘가에서 머물며 하루를 보낸다. 다행히 사회복지사 '아야'(카호)의 도움으로 아키코 가족은 작은 방 한 칸과 생활보호 보조금을 지원받고, 슈헤이는 대안학교를 다닐 기회를 얻는다. 여기서 이 기회가 결국에는 엄마의 선택으로 무산되지만, 다른 의미에서 '이 기회가 처음부터 실패한 것'이었음을 생각해볼 수 있는 장면이 있다. 슈헤이는 아야에게 이 일을 왜 선택했냐고 묻는다. 아야는 "나도 너희랑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어. 매일 같이 맞고 살았거든. (...) 어른이 된다는 건 즐거워. 많은 걸 배울 수 있거든. 그리고 네가 원한다면 엄마랑 따로 살 수도 있어"라고 말한다. 이때 침묵을 유지하는 슈헤이의 얼굴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희망'을 발견한 얼굴로 비치지 않는다.

우선 아야와 슈헤이가 '비슷한 환경'이라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다. 또 학대 여부를 떠나서 슈헤이는 엄마를 떠나고 싶은 것일까. 아야가 슈헤이에게 주는 기회(국가의 지원)의 끝에는 가족으로부터의 탈출, 개인이라는 독립된 존재로 사는 삶을 사는 것이지만, 정작 슈헤이에게 그러한 삶이 어떤 삶인지 감도 오지 않는 눈치다. 두 사람의 이해관계에 따른 차이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시퀀스가 있다. 슈헤이와 후유카가 놀이터에서 놀다 집으로 들어온다. 카메라는 건물 정문을 지나는 두 사람을 포착하고 복도를 지나 집으로 가는 모습까지 담는다. 이어 료가 건물 안 정문 맞은편에 있는 자판기를 이용하기 위해서 집에서 나온다. 그 순간 아키코가 한 늙은 남자랑 팔짱을 낀 채 건물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문 너머로 자전거에서 내리는 아야가 보인다. 료는 아키코를 때리기 시작하고, 아야는 이를 목격한다. 료가 아키코를 집으로 끌고 간지 30초 정도 지나자 슈헤이와 후유카가 다시 정문 쪽으로 급하게 나온다. 두 사람을 만난 아야는 건물 안으로 들어와 집 문틈 사이로 아키코가 료에게 맞는 모습을 지켜본다.

감독의 집요한 롱테이크로 이뤄진 이 시퀀스가 보여주는 것은 무엇일까.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아야. 그녀는 료에게 맞고 있는 아키코를 구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그 건물 안에 사는 모든 사람들도 아야와 같은 위치에 머물러 있다. 영화 내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경찰까지. 생각해보면 아키코의 부모와 동생, 슈헤이의 아빠를 포함해 영화 속 '어른'이라 불릴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방관자에 불과하다. 아야가 슈헤이와 관계 맺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녀가 스스로 방관자임을 자처하며, 교육적인 지원이 결국에는 슈헤이의 선택이 아니라 엄마의 선택으로 언제든지 무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슈헤이에게 엄마(가족이자 보호자)는 자신을 보호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울타리이자, 부모이면서 절대자다. 학교 교육을 받지 않은 그에게 가족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경험이 가능한 유일한 세계다. 이와 반대로 엄마에게 슈헤이는 아들이면서 소유물이고, 돈을 벌어다 주는 유일한 수단이다. 아야는 이 같은 아키코와 슈헤이 사이의 성립관계를 알지 못한다. 아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시퀀스에서 감독이 '자판기'를 중심으로 복도에 드나드는 인물들을 포착할 때, 아야가 폭력이 벌어지는 아키코의 집으로 들어가지 못할 때,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가족을 제외한 누구도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시퀀스는 영화의 모든 풍경을 집약적으로 함축 시켜 놓았다. 카메라의 초점이 자판기를 향해 있는 이유는 자판기처럼 인물들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고정된 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감독의 카메라는 이 하나의 해프닝이 불가항력적인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는 듯 인물들의 관계 속에서 발생되어지는 한계를 냉담한 시선으로 포착해낸다. 이러한 다큐멘터리 리얼리즘은 이미지의 환상성이나 스펙터클을 배제함과 동시에 사건과 인물을 주시하게 하면서 현실과의 알레고리로서 작동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 영화 '마더'(2020) 제작위원회
ⓒ 영화 '마더'(2020) 제작위원회

흥미롭게도 슈헤이와 아야의 이해관계에 따른 이러한 차이는 슈헤이와 관객 사이에서 발생하는 차이와 비슷하게 다가온다. 아야는 일종의 엄마에게서 벗어나길 바라는 관객 마음의 분신이다. 이 분신이 지니는 한계, 즉 관객이 가지는 감정은 영화의 외부에 존재하며, 관객은 결코 스크린 안으로 손을 뻗을 수 없는 점이다. 그리고 감독 오모리 타츠시 또한 관객의 위치에서 비단 다를 바 없다. <마더>는 2014년 일본 사이타마 현 가와구치에서 발생했던 조부모 살해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감독은 이 사건을 영화로 가져오면서 스스로 관찰자이자 방관자임을 자처한다. 그의 카메라가 익스트림 롱 샷과 롱테이크, 핸드헬드로 인물들을 담아내는 이유가 그러하다. 감독은 관객에게 아키코와 슈헤이를 보며 '가족이란 무엇인가' '엄마란 어떤 존재인가'와 같은 물음에 답이 아닌,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상황들을 나열하며 끝까지 인물들을 마주하고 볼 수 있도록 인내심을 요구한다.

<마더>에는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따뜻한 가족'의 이미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시시포스의 돌처럼 관객에게 아키코와 슈헤이 가족의 파국적인 삶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앞서 말한 인내심이란 결국 무겁게 다가오는 영화의 수많은 이미지들을 반복해서 밀어낼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

 

'가족'이라는 환상을 뜯어내기

아키코와 슈헤이 가족은 모든 것을 잃었다. 슈헤이가 기껏 얻은 일자리도 아키코가 료를 돕기 위해 사장실에 있는 돈을 훔치면서 망쳐버렸다. 슈헤이도, 관객인 우리도 허망할 따름이다. 이 가족에게 행복은 잠시도 쉬어가지 않는다. 강변이 흐르는 어느 다리 위. 후유카가 멀찍이 걸어가고 아키코와 슈헤이는 뒤에서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 이제 두 사람은 이 다리를 건너면 더는 돌아올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아키코는 슈헤이에게 말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죽여줄 수 있냐고. 그러면서 "네가 안 하면 아니면 후유카는 죽어"라고 협박에 이르는 말을 뱉어버린다. 슈헤이는 멈춰서 갈등한다. 어쩌면 엄마는 이제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살인을 저지르기로 대답을 뱉은 그는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을 자처한다. 안타깝게도 슈헤이는 조부모를 살해한다. 그가 받은 형량은 징역 12년. 엄마인 아키코는 징역 2년 6개월, 집행 유예 3년.

 

ⓒ 영화 '마더'(2020) 제작위원회
ⓒ 영화 '마더'(2020) 제작위원회

시종일관 아키코, 슈헤이 모자(母子)를 관찰했던 감독의 카메라는 끝에 이르러 인물들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아야는 교도소에 수감 중인 슈헤이를 찾아가 묻는다. "왜 모든 걸 짊어진 거야?" 그는 여기(교도소인 동시에 엄마에게서 떨어진 곳)에서는 밥을 수 먹을 있고, 책도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이유가 전부가 아니라 생각한 아야의 되물음에 이윽고 그는 "전 엄마를 사랑해요. 달리 어쩌겠어요? 엄마 혼자는 절대 못 살 텐데" 이 답은 관객인 우리가 납득하기 힘든 이유이지만, 그가 '모든 걸 짊어질 충분한 이유'가 된다. 반대로 재판 전 진실을 요구하는 변호사의 물음에 아키코는 "조부모를 죽이란 말 한 적이 없다" "그 애는 가끔 거짓말을 해요"라고 말하는데, 이 답은 '그녀가 모든 것을 짊어지고 싶지 않은 충분한 이유'가 된다. 이러한 극명한 대비는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끝까지 지켜내고자 했던 것은 부모가 아닌 아이였고, 그 안에는 엄마를 향한 '맹목적 사랑'이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그리고 영화 마지막에 아키코를 찾아간 아야가 "슈헤이가 엄마를 사랑한데요"라고 말한다. 이 장면에서 드는 몇 가지 생각은 슈헤이의 진심을 통해서 아키코가 속죄하기를 바라는 감독의 생각이 엿보인다는 점, 그 진심이 아야를 통해서 전달될 때, 이 사회가 여전히 타인의 돌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 결말은 감독의 이전 작품인 <바보 타로>와 함께 생각해 볼 만하다. 영화는 소외된 아이들의 모습을 통한 일본 사회의 잔혹함을 재현한다. 영화는 주인공들이 다리 위에서, 또 강가 주변을 맴돌고 있는 모습(사회 저변)을 통해서 열려있는 세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억압된 자유를 보여준다. <마더> 속 아키코와 슈헤이 또한 마찬가지다. 감독이 꾸준히 보여주는 건 사회 네트워크의 사각지대의 풍경이다. 그 기저에는 가난하고 안전하지 못한 사회에 대한 인식, 여전히 사회 안으로 귀속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깔려있다.

좀 더 <마더>의 결말에 대해서 곱씹어보자. 아키코가 슈헤이에게 자신의 부모를 죽여 달라고 했을 때, 아키코와 그녀의 부모와의 관계는 더는 가족으로 존속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녀는 자신의 부모를 죽이기를 결심했고, 그 같은 반인류적인 행위를 자신의 아들에게 떠넘겼다. 그녀의 얼굴에는 '오로지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는 단호함이 서려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더는 친족의 존재 이유가 결여되어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녀의 모습은 마치 짝짓기를 끝낸 암컷사마귀처럼 카니발리즘적으로 보인다. 정작 보는 이를 더 고통 속으로 빠지게 만드는 장면은 기어코 슈헤이가 자신의 조부모를 죽이는 장면이다. 엄마의 말을 거스를 수 없는 아들이 자아낸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다. 하지만 아키코와는 반대로 슈헤이는 자신의 가족이 살아남기 위해서 이 같은 만행을 저지른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우선적인 할 일은 오로지 엄마를 위해서, 후유카를 위해서 어떤 일이든 해야 하는 가족의 존속 의무이다.

 

ⓒ 영화 '마더'(2020) 제작위원회
ⓒ 영화 '마더'(2020) 제작위원회

"후유카는 저처럼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면회를 온 아야에게 가장 먼저 후유카의 안부를 묻고, 엄마를 사랑하기에 이 모든 일을 다 짊어질 수 있었으며, 책을 읽을 수 있기에 교도소의 삶이 나쁘지 않다고 말하는 슈헤이. 그런 그를 보자니 빛이 침투할 틈조차 주지 않는 아주 깊숙한 구렁텅이에 빠진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그의 태도가 어떤 이유로든 가족을 부정할 수도 긍정할 수도 없는 양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태도는 관객 스스로 '가족'에 대한 생각을 검열하도록 만드는데, 그것은 관객이 가지는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이나 무의식 속에 새겨진 자기가 속한 사회집단이 정한 표준적인 부모 자식 관계의 틀을 의심하도록 밀어붙인다. <마더>는 궁극적으로 실패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기보다는, 아키코와 슈헤이의 관계를 통해서 가족의 의미를 해체시키는 반복적인 운동을 일으키고자 하는 데 몰두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아키코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하얀빛이 쏟아지는 창가를 향한 그녀의 얼굴은 그 빛으로부터 거부당하는 듯하다. 아니. 빛을 마주할 수 없거나, 빛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녀의 눈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슈헤이가 만든 가족 안에서 여전히 머물고 있다. 슈헤이가 아야에게 말한 "엄마를 사랑한다"는 말이 그 증거다. 반대로 그녀가 과연 아들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설령 사랑이었다고 해도, 그 사랑이 자신의 부모도, 자신의 자식도 파멸로 이끌었다는 사실은 피해가지 못한다. 그녀의 미성숙함은 오로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이기적인 인간이기를 자처했다. 그녀는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엄마의 모습을 회피하면서도 근본적인 의미에서 사회의 마지막 안전망인 가족의 의무와 책임 또한 일방적으로 거부한다. 그녀가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은 가족이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그녀는 영영 가족이란 빛을 볼 수 없는 장님이 되었다.

<마더>는 분명 가족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족답다'라고 느낄 법한 이미지는 찾기 힘들다. 결정적으로 슈헤이가 엄마인 아키코의 부탁으로 조부모를 살해했을 때, 그 사건이 집에서 이뤄졌고 그 공간에서 아무렇지 않게 잠을 청하는 아키코의 모습에서 부모와 자식 관계의 존재적 의미는 상실했다.(다만, 여기서 아키코를 사회가 요구하는 가정에 헌신하는 아내로서, 혹은 천사 같은 엄마로서의 모습으로부터 해방된 상태 혹은 폭주한 상태로 봐야할지는 의문이다) 여기에 아키코의 남자친구인 료는 후유카가 자신의 딸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은 듯 자신이 불리한 상황이 되면 떠나버린다. 슈헤이의 대리아빠로서, 후유카의 아빠로서 역할이 아닌, 아키코의 연인으로서만 존재한다. 더군다나 이들은 사기와 도둑질로—경제적 이익을 위한 비인간적인 행위—생계를 이어가는데, 이러한 삶의 비윤리성이 경제적 원인에 기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영화 '마더'(2020) 제작위원회
ⓒ 영화 '마더'(2020) 제작위원회
ⓒ 영화 '마더'(2020) 제작위원회

더불어 이 가족영화에 등장하지 않은 또 하나는 '집'이다. 이 공간의 부재는 영화의 서사와도 연관을 짓는데, 서사적 발전은 아키코의 행동으로 '집'을 잃고 길거리로 내몰리는 상황을 보여주는 반복을 통해 주어진다. 이로 인해 영화가 보여줄 수 없는 것, 어쩌면 감독의 의도로 인해 보여주기를 원치 않는 것은 '가정'이라는 공간이다. 고레에다의 모든 영화 속 인물들이 집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한자리에 모이는 모습을 중첩하여 보여준다면, <마더>는 집이라는 공간을 벗어나는 모습을 중첩하여 보여준다. 마치 가족(family)에서 가족적인 것(familiar)으로 변모되어져 가는 양상이다. 영화의 모든 이미지들은 침식작용과 같은 영화의 반복적인 해체 운동으로 흙이 퇴적할 수 없는 가혹한 영토 위에 놓여있다. 그리고 이 응집하지 못한 이미지들은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를 통해서 스크린과 관객 사이에 거리감을 형성하고, 자연스럽게 '소외 효과'(alienation effect)를 발생시킨다.

<마더>는 처음부터 끝까지 흐트러짐 없이 한 가족을 목도한다. 영화 내에서 벌어진 온갖 악행은 가족이라는 사슬을 헐겁게 하려는 듯 굴지만, 끝에 이르러 그 사슬은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왜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이 물음은 또 다른 사슬이 되어 스크린을 향한 관객의 몸을 묶어놓는다. 어쩌면 영화가 끝나도 그 사슬이 풀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이유는 '정상적인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 때문일 것이다. 계획적으로 실타래를 엉키게 만들려는 이 영화의 정체가 단순히 실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을 재현하고자 함이 아닌, 사회적이든 정치적이든 혹은 개인이 스스로 이상적 가족 모델을 만들든 억압적으로 가족을 규정하려는 시도에 대한 견제에 있다.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아키코와 슈헤이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혹은 정체 모를 이상한 것—으로부터 초래되는 비극적인 사건들로부터 맞설 수 있는 의기(意氣)를 가지는 것이다. 어쩌면 아키코에게 닿지 않은 '그 빛'이 영화의 끝에 머문 우리의 얼굴로 향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글 오세준, yey12345@ccoart.com]

 

ⓒ 영화 '마더'(2020) 제작위원회
ⓒ 영화 '마더'(2020) 제작위원회

마더
MOTHER 
감독
오모리 다츠시
Ohmori Tatsushi

 

출연
나가사와 마사미
Nagasawa Masami
오쿠다이라 다이켄Daiken Okudaira
아베 사다오Abe Sadao
카호Kaho
군지 쇼Sho Gunji

 

제작 영화 '마더'(2020) 제작위원회
제공 넷플릭스
제작연도 2020
상영시간 127분
등급 15세이상관람가
공개 2020 11월 3일

오세준
오세준
《코아르》 영화전문기자 및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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