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안 펫졸드] '운디네' 새의 눈, 물고기의 눈
[크리스티안 펫졸드] '운디네' 새의 눈, 물고기의 눈
  • 이지영
  • 승인 2021.01.2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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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다층적 내러티브'에 대하여

베를린의 운터 덴 린덴(Under den Linden)은 알렉산더 광장부터 브란덴부르크 문을 잇는 긴 가도로, 도시의 동맥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18세기에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던 프로이센 제국의 위용에 걸맞은 국가의 권위를 나타냄과 동시에,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기능적인 면도 고려되었다. 운터 덴 린덴부터 베를린 왕궁, 네오바로크 양식의 베를린 돔 교회, 역사박물관, 오프레 극장이 이루는 조화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이상과 미학을 18세기에 다시 소환한 결과물이다. 이는 제국의 도시계획 프로젝트를 이끈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1781-1841)이 주도한 독일 신고전주의 건축과 도시 계획의 정수를 보여준다.1)

 

ⓒ 엠엔엠 인터내셔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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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역시 한 생명체와 같기 때문에, 외관도에서 시대별로 지어진 건물을 나타내는 다양한 색깔처럼 질곡의 세월을 얼룩덜룩하게 반영하고 있다. 1950년대 동독 사회당이 베를린 궁을 철거하고 21세기에 다시 복원되기 전까지, 도심 한가운데에 큰 빈터가 폐허처럼 남아있게 된다. 영화에서 플라스틱 모형으로 세공해놓은 이미지를 보여주듯, 89년 몰락 직전의 사회주의 도시였던 시절을 지나, 90년대에는 베를린이 다시 도시 개발의 수술대 위에 오른다. 2002년에 독일 연방의회가 베를린 궁의 옛 형태를 복원하기로 의결하여, 결국 18세기 왕궁의 모습을 한 21세기의 미술관이 지어지게 된다. 운디네(파울라 베어)는 여기에 속임수가 있다고 지적하는데, "지금과 옛것이 다르지 않다는 것에는 속임수가 있으며, 이것은 마치 역사는 발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그녀는 주장한다.

수면 아래서는 모든 것이 차곡차곡 가라앉고 역사의 흔적은 아무도 모르게 축적된다. 단, 그 축적된 세월은 거대한 강을 통째로 들어서 물을 다 퍼내지 않는 이상, 가시적인 형태로 우리 눈에 드러나지 않는다. 반면 뭍에서는 새로운 기억이 생성되는 한편 어떤 기억의 일부는 통째로 사라지기도 하기 때문에, 절단된 기억을 환상통으로 앓는 이들이 생겨난다. 얼굴은 어딘가 익숙하지만 이름만 바꿔 등장한 '국가'가 이 환상통을 해결하고자 나서서 수술을 집도하고 신체의 일부를 인공적으로 이식하기도 하는데, 도시에서 살아온 모든 이들은 '지금과 옛것이 다르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모든 이가 그 사실조차도 잊어버리는 때가 오게 된다. 인공 이식한 다리의 이물감은 사라지고, 어느새 새로 생긴 다리가 간질간질한 것처럼 우리는 인공적으로 덧댄 역사를 오랜 시간 우리의 일부였던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 엠엔엠 인터내셔널

크리스티안 펫졸드 감독의 <트랜짓>(2018)도 그러했지만 90분의 러닝타임만으로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하다는 듯이, 영화 <운디네>는 풍부한 내러티브, 감정, 이미지를 아쉬움 없이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영화 자체의 내러티브 안의 여러 층의 내러티브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도 있다. (마치 <트랜짓>에서 영화 속 소설과, 소설 안의 문지기의 설화가 다층적으로 존재했던 것처첨) 심지어 이 영화는 운디네의 입을 빌려 베를린의 도시 계획·개발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훑는데도 그 내용과 형식이 결코 낯설거나 부자연스럽지 않다. 그 내러티브의 기능이 영화 속에서 형식과 완벽하게 조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연극의 한 모놀로그를 보는 것 같은 인물들의 긴 호흡의 대사는 마치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듣는 것처럼 아름답고 리드미컬하게 들린다. 관객들은 크리스토프(프란츠 로고브스키)와 같은 심정이 될 것이다. "어려운 말을 아주 멋지게 해"라고 우리는 감탄한다.

수백 년, 어쩌면 수천 년 동안 물과 육지를 드나들며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흥망성쇠를 지켜보았을 물의 정령의 눈을 우리는 차용한다. 그렇게 13세기 상인들에게는 축축한 습지에 지나지 않았을 이 땅에 고대 그리스의 이상이 담긴 도시가 형성되고, 파괴되고, 또 쇠락해 가는 사회를 선연히 그려볼 수 있다. 이를 지켜보고 있는 존재는 물 안에서 유영하는 메기 '군터'이다. 한국 영화 <메기>(2018)에서도 그랬지만 이 영화에서도 메기가 영물로 여겨지고 있는데, 50년 이상의 긴 수명, 현대인의 일상에서도 발견할 법하지만 실제로 마주했을 때 압도되는 크기와 물고기의 끔뻑이는 거대한 입이 두 영화에서 비슷하게 활용되고 있어서 흥미로웠다.

 

ⓒ 엠엔엠 인터내셔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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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네>는 연인들의 이야기이면서 한 사회와 국가, 근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다시 연인들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이 영화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진 마음의 흥망성쇠로도 읽을 수 있다. 영화에서는 물에서의 사랑과 육지에서의 사랑의 속성을 서로 대조하며, 물과 육지 사이의 상승-하강 운동, 그리고 육지 안에서의 좌우 운동을 대조한다. 뭍으로 올라온 운디네는 자신의 운명에 따라 다시 수면 아래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사랑할 이를 찾지만, 연인 요하네스(야콥 마트슈엔츠)는 끝내 그녀에게 헤어짐을 고한다. 그의 운명은 카푸치노의 거품처럼 예견되어 있는 듯하다. 이 둘은 베를린 도심에서 여러 차례 마주치고 헤어진다. 그들은 수평 운동을 하며 서로를 배회하는 관계이다. 남아 있는 것은 서로를 염탐하는 시선과 누구 때문인지 모를 심장 박동뿐이다.

어떤 이가 처음 마음속으로 들어올 때 연인들의 마음속에는 이상적인 사랑의 도시가 건설된다. 그러나 때로 그 도시는 외부의 충격으로 인해 심하게 파괴되고, 때로는 조심스럽게 허물어졌다가 다시 재건된다. 하지만 그 과정이 끝나고도 마음의 한 중심에는 아직도 텅 빈 폐허가 남아있다. 이 빈 공간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어떤 설계도와 철학을 가지고 채울 것인가? 그것이 앞으로 나의 정체성이 된다. 연인들은 아직 결정하지 못한 채 도시 주변부의 다른 부분만 손을 본다. 그런데 이때, 운디네 앞에 불현듯 크리스토프라는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어항 밖으로 운디네를 꺼내거나 어항 안에서 그녀를 보호해주는 것이 아니라 어항이라는 프레임 자체를 산산이 부숴버린다. 그들은 서로 육지도 물도 아닌 어떤 '습지'에 같이 누워있을 때 서로의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가장 강렬한 감정을 느낀다.

 

ⓒ 엠엔엠 인터내셔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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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프는 기꺼이 운디네와 함께 물 밑으로 잠수하고, 그녀가 물에 떠내려갈 때 그녀를 붙잡아 같이 상승해주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기꺼이 운디네의 강에 뛰어들어 상승-하강 운동을 감내한다. 뭍에서의 사랑은 운디네가 자신의 아파트에서 기차가 서로 스쳐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는 풍경처럼 찰나의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크리스토프는 운디네와 함께 그녀의 본질, 그녀의 삶의 시간 안으로 깊이 잠수하여 신화적 전설을 스스로 목격한다. 그러나 타인의 본질 안에서 둘이 영원히 행복하게 살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며, 끝내 어느 한쪽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어항이 깨질 때 운디네의 가슴에는 유리조각들이 박히고, 물로 들어간 크리스토프는 다리를 다친 채 의식을 잃는다. 정신을 잃은 연인에게 우리는 애타게 "Staying alive"라는 노래를 들려줄 수밖에 없다.

결국, 운디네는 운명의 끝에서 어떤 선택에 이르게 된다. 연인의 존재는 세상으로부터 감쪽같이 도려내어 지고, 그들의 사회적 기능은 비슷한 모습을 한 다른 노동자와 이민자들로 완벽히 대체된다. 이는 현대 건축의 실용적인 면모와 그 안에서 돌고 돌면서 서로를 대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한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운디네가 말했듯 현대 건축이론은 형식보다 기능이 우선이라고 했으나, 운디네의 기능을 대체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녀의 존재를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은 오직 크리스토프만이 잘 안다. 사랑했던 사람만이 부재하는 연인의 흔적을 따라다니며 그 존재를 홀로 앓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의 상실은 스스로 파멸적인 충동으로 이어지고, 영화 말미의 한없이 쓸쓸한 감정은 서서히 침잠하다가 부력으로 다시 위로 떠 오른다. 군터, 또는 운디네의 시선으로 마지막 장면을 처리한 것은 <트랜짓>에서 이미 보았던 감독의 스타일을 상기해준다.

습지대에서 제국의 수도로, '국가사회주의'에서 '사회주의'로, 그리고 다시 현대 자본주의 사회로 탈바꿈한 베를린의 유구한 역사와 함께, 우리는 도시 전체의 외관도를 새의 눈으로 조감한다. 그때 우리는 클래식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독일 민족 음악인 바흐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이런 준비운동을 마친 다음 운디네의 창에서 바라볼 수 있는 플라스틱 상자 같은 건물들의 외관을 바라보면 도시의 풍경은 전혀 색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18세기 사람들이 꿈꾼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 사회주의 국가가 염원했던 유토피아의 모습은 마음속의 심상 지도에만 새긴 채로, 허구적으로 복원된 과거와 영미식 실용주의 건축의 불협화음, 이를 바라보는 영화적 시선은 어딘가 공허하다. 그렇게 새의 눈으로, 또 물고기의 눈으로 영화는 베를린의 현재와 과거를 통시적으로 살펴본다. 이 세심한 시선만으로도 도시에 대한 감독의 남다른 애정을 엿볼 수 있었다.

1) 전진성, <상상의 아테네 베를린-도쿄-서울>, 천년의상상, pp.59-91

[글 이지영, karenine@ccoart.com]

 

ⓒ 엠엔엠 인터내셔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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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네
Undine

감독
크리스티안 펫졸드
Christian Petzold

 

출연
폴라 비어
Paula Beer
프란츠 로고스키Franz Rogowski
제이콥 맛쉔즈Jacob Matschenz
마리엄 자리Maryam Zaree
안네 라테-폴레Anne Ratte-Polle
엔노 트렙스Enno Trebs

 

배급|수입 엠엔엠 인터내셔널
제작연도 2020
상영시간 90분
등급 12세이상관람가
개봉 2020.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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