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머 85> 잃어버린 환상
<썸머 85> 잃어버린 환상
  • 이지영
  • 승인 2021.01.12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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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패러디에 대하여

프랑스판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을 상상하고 영화관에 들어간 관객이라면, <썸머 85>는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이 영화가 퀴어 장르와 80년대 하이틴 로맨스의 클리셰를 조악하게 옮겨놓았다고 느낄 이유들은 충분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10대 소년이 쓴 회고록이자 자전적 소설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성인 관객의 시각으로 판단하기를 잠시 유보하고 나의 10대 때 노트를 돌아보며, 결국 나는 영화의 재판관이 아니라 변론인이 되기로 했다. 10대 시절은 많은 것들이 의미 있는 신호로 여겨진다. 특히 문학을 사랑하는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청소년들에게는 우연히 받은 아주 미세한 신호라도 존재 전체를 흔들 만큼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것이 장난처럼 던져진 무의미한 신호였다는 것에 그들은 큰 혼란을 느낀다. 청소년기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세계를 둘러싼 거대한 환상이 벗겨지는 과정이다. 그리고 환상을 믿었던 그 시절을 돌아볼 때, 때로 우리는 얼굴을 붉히기도 한다. 더는 이불을 차며 창피해하지 않고 그 시절을 돌아볼 수 있게 된 것은, 내가 언젠가부터 그 과거와 완전히 단절되었음을 깨달았을 때였다.

다비드(벤자민 브아장)는 알렉시(필릭스 르페브아)의 인생 속에 갑작스럽게 등장했다가 홀연히 퇴장하는 '선수'다. 알렉시와 다비드 사이의 감정은 무르익기보다는 예정에 없던 불꽃놀이처럼 터져버린다. 선수의 유혹하는 기술도 너무 뻔하고 서툴지만, 당하는 자도 만만찮게 서툴기 때문에 그는 속수무책으로 매혹당한다. 영화 전반부에서 이러한 장면들은 주로 감상적이거나 과하게 감각적으로 묘사된다. 알렉시는 이때를 회상하면서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밤을 보냈다'라고 쓰다가도,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라고 묻는 관객이나 독자를 약 올리기라도 하듯이 다음 장면은 과감히 생략해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하나의 거대한 환상을 쌓아 올리다가 돌연 그 중심에 있던 광원이 사라져 버렸을 때 소년이 겪는 좌절은, 마치 공들여 섬세하게 쌓아 올린 모래성의 세계가 와르르 무너지는 충격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감에 따라서 이러한 행복과 절망 사이의 낙차가 점차 줄어든다. 또한 행복을 느끼기까지의 역치와 불행을 느끼는 역치도 올라간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점점 행복을 느끼는 것에도 불행을 느끼는 것에도 무뎌져 간다.

 

ⓒ 찬란
ⓒ 찬란

알렉시가 겪은 최초의 충격 한가운데 있으며 낙차를 유발한 문제적 인물은 다비드이다. 알렉시가 그에게 반하는 전반부와 돌연 퇴장한 다비드의 부재를 그린 후반부는, 환상적인 시간이 끝난 후의 좌절과 환멸이라는 명암 대비를 나타낸다. 전반부를 장악하는 것은 한마디로 클리셰로 쌓아 올린 성이다. 알렉시가 보트가 뒤집혀 물에 빠진 가운데 다비드가 백마 탄 왕자님처럼 깜짝 등장하여 그를 로맨틱하게 구해주면서 시작되는 도입부에서는 숱한 삼류 드라마의 발단과 전개가 떠오른다. 주인공들이 놀이기구 위에서 아찔하고 어지럽게 사랑에 빠지는 씬을 보면서는 <우리도 사랑일까>(2011)의 인물들이 떠올랐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의 절제한 침대씬, <라붐>(1980)의 인용 장면은 부연할 필요조차 없을 것 같다. 쓰다 보니 이 영화는 클리셰를 빼고는 말할 수 없는 클리셰 덩어리다. 어느덧 노장이 되어가는 감독의 영화에서 이 클리셰들이 모두 우연히 들어갔다고 보는 것이 되려 무리인 해석이 아닐까? 감독의 저의를 모르는 채로 그저 짐작과 추론을 해볼 따름이다.

10대 후반은 모방 욕구가 가장 왕성한 나이다. 유치한 로맨스물을 보면서 감정 이입을 하기도 하고, 나와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을 영화와 소설 속 주인공에 대입하기도 한다. 다비드는 알렉시보다 성숙했으나 그 또한 어린 소년이었고, 댄스장에서 어린 연인에게 헤드폰을 씌우며 순간 충동적으로 <라붐>의 유명한 장면을 패러디한다. 이를 난데없이 당한 알렉시에게는 마치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 '소피 마르소가 된 듯한' 강렬한 경험인 반면, 바깥에 있는 다비드에게는 장난스러운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 그와 문학 선생과의 관계는 베를렌과 랭보의 모방 혹은 패러디였을 수도 있겠다.

우리가(필자를 포함하여) 이 장면을 보며 두근거릴 수밖에 없던 것은 아마도 'Sailing'이라는 매혹적인 노래를 함께 들으며 알렉시의 내면에 동화되고, 외부와 차단된 채로 그의 내면에 안전하고도 완전하게 들어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본인이 이해하는 만큼만 사랑할 수 있는 알렉시는 다비드가 이 노래를 그에게 들려준 의도를, 무덤 앞에서 춤을 춰 달라고 한 의도만큼이나 이해하지 못한다. 후반부에 언급하겠지만 그는 아무렇게나 성의 없게 던져진 이 난해한 일련의 퍼즐을 혼자서 풀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 난제는 소년에게는 가장 큰 시련으로 다가오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문제를 정작 던지는 자는 정작 아무런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 없이 아름다웠고, 아무 의도도 없이 매혹적이었기 때문이다.

 

ⓒ 찬란
ⓒ 찬란

영화의 이야기가 진정으로 시작되는 부분은 잃어버린 환상을 그리는 다비드의 죽음 이후이다. 아까 말한 아리송한 질문들을 던진 채로 믿을 수 없이 갑작스럽게 떠나버린 다비드를 애도하는 작업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는 나오지 않는 말을 해야 하고, 안 써지는 글을 써야 한다. 흥미로운 고대 이집트인들의 죽음, 개념화된 죽음이 아니라 육체로 현실화된 두려운 죽음을 마주해야 한다. 그는 한밤에 집을 탈출하여 담을 넘고 춤을 춰야 한다. 마치 신화 속에서 본인의 잘못으로 에로스를 잃어버린 프시케에게 엄청난 고난과 같은 신들의 형벌이 내려진 것처럼, 이 속죄는 소년에게 영영 끝나지 않고 끝나서는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고대 신화 속에서 다른 존재와 무녀의 신탁이 주인공을 돕듯이, 케이트가 알렉시를 돕는다. 케이트는 죽은 다비드를 애도하는 알렉시의 의식(여장)을 도우며, 그가 연인에게서 만들어낸 이미지를 사랑한 것일 수 있다는 신탁과 같은 전언을 준다.

그렇게 알렉시는 개념을 넘어서 물성으로 다가오는 죽음, 역겨움을 자아내는 육체의 죽음, 생각만으로도 미칠 것 같고 고통스러운 사랑하는 대상의 죽음, 그리고 쌓아올린 한 세계가 몰락하는 죽음을 피부로 체험한다. 다비드는 아버지의 죽음을 그보다 먼저 겪었을 것이고, 그 고통은 남겨진 알렉시에게로 전승된다. 다비드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합리적인 설명이나 그 어떤 섭리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을 것이며, 소년은 오토바이를 타고 전속력으로 달리면서 '당신에게 좀 더 가까이'라는 노래를 수도 없이 불렀을 것이다. 이것은 또다시 자신의 죽음을 수도 없이 상상하면서 죽은 다비드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알렉시에게로 오버랩된다. 그는 끝내 자신에게 알 수 없는 운명의 장난처럼 던져진 해결 불가능할 것 같던 숙제를 해치우고야 마는데, 'Sailing'이라는 노래가 다시 한번 연인의 무덤 위에서 흘러나올 때 영화는 절정에 이르러 간다. 홀연히 남겨진 이가 그동안의 모방과 클리셰를 넘어서 진정한 애도와 예술적 순간에 이르는 순간이 있다. 영화에서 이 순간만은 다른 어떤 것도 모방하지 않고 인용하지도 않으며, 헐벗고 알맹이뿐인 그 자체로 아름답다.

 

ⓒ 찬란
ⓒ 찬란

애도의 의식이 끝나고, 남은 법적인 뒤처리는 영화 도입부에서 소년이 의미심장하게 던진 심각한 질문에 비해 사회봉사 100여 시간으로 터무니없이 가볍게 끝난다. 그제야 수수께끼는 모두 풀리고, 관객들은 그가 어떤 중한 범죄도 안 저지른 채로 해변가 쓰레기 줍기 따위의 '가벼운' 벌을 받는 것에 안도한다. 이 때문에 허탈함을 느끼면서, 왜 그렇게 필요 없이 심오하게 서문을 열었냐며 타박하는 사람들도 여럿 보았다. 그러나 자신이 벌인 행동에 대한 사회적 책임보다도 소년에게 존재론적으로 다가온 자기 자신의 숙제가 훨씬 크고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는 것 역시, 과연 그 시절이기 때문에 이해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알렉시는 어느새 다비드가 그랬듯 능숙하게 예전에 만취했던 청년에게 말을 건다. 어쩌면 이제는 알렉시가 난해한 퀴즈를 던질 차례가 된 것 같기도 하다. 아버지의 죽음에서 다비드에게로, 다비드의 죽음에서 알렉시의 죽음으로... 'Sailing'의 유산은 계속 전승된다. 그러나 끝에 이르러 알렉시는 이제 옆에 누군가를 태우고서, 배를 뒤집지 않고 그야말로 항해하는 법을 배운 것 같다.

기대했던 것과 달리 <썸머 85>는 공들인 세공품이 아니라 키치한 모조품이었다. 그러나 영화는 많은 부분에 서툴렀지만 잠시 방심한 순간에 익숙하고도 그리운 어떤 감정을 건드린다. 영화는 어설프고도 날 것 그대로의 감정에 기대어 그것을 동력 삼아 흘러간다. 아쉬운 각본 속에서도 소년들의 미소와 관능은 빛이 나고, 죽은 이의 가슴팍을 치듯이 무덤 위에서 주먹질을 해대는 몸짓과 춤사위는 생생하게 살아있다. 사실 영화에서 애써 발견한 장점은 그뿐이었다는 말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것이 완벽하게 공들인 세공품이었다면 그것이야말로 소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아류작이 되는 지름길이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내게는 그 모든 진지하고, 섬세하고, 심각한 것들을 비틀어버린 감독의 유쾌한 태도였다고도 보인다. 성장기의 감정이 처음부터 완벽하고 성숙할 수는 없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각본이며 엘리오의 마지막 표정 연기까지 완벽했기 때문에 영화적이었다. <썸머 85>는 의도든 의도가 아니었든 그것에 실패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삶의 일면을 좀 더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글 이지영, karenine@ccoart.com]

 

ⓒ 찬란
ⓒ 찬란

썸머 85
SUMMER OF 85
감독
프랑수아 오종Francois Ozon

 

출연
펠릭스 르페브르Felix Lefebvre
벤자민 부아쟁Benjamin Voisin
발레리아 브루니 테데스키Valeria Bruni Tedeschi
멜빌 푸포Melvil Poupaud
이사벨 낭티Isabelle Nanty

 

수입|배급 찬란
제작연도 2020
상영시간 101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0.12.24

이지영
이지영
평이한 문장이지만 사색을 담은 글을 씁니다. 투박하고 건조한 문장으로 읽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고 싶습니다. 글을 통해, 삶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진실의 일면에 다가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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