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머 85' 그 시절 여름의 기억과 재생성된 인칭의 합치
'썸머 85' 그 시절 여름의 기억과 재생성된 인칭의 합치
  • 배명현
  • 승인 2021.01.04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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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의 두 가지 프레임 카메라 그리고 글쓰기.

프랑수아 오종은 지금-여기에 80년대의 세월을 가져온다. 시절을 눈에 담고 기분을 현재로 가지고 와 기어코 관객에게 청춘을 마주하게 한다. 이 서툰 소년들은 10대 특유의 치기를 기반으로 감정적 육체적 생동감을 태운다. 그리고 이 소진으로 발생하는 연기는 스크린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되는데, 이 연기는 미묘하게 감정을 건드린다. 최루탄 영화라고 일컫는 신파영화란 말이 아니다. 오히려 <썸머 85>는 '1인칭 시점'을 묘묘하게 이용해 관객의 감정적 동요를 막는다.

 

ⓒ 찬란
ⓒ 찬란

'건드린다'와 '막는다'는 단어 때문에 형용모순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이 둘을 잘 구별해야 한다. 오종은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35년 전 읽은 소설 <내 무덤에서 춤을 춰>를 읽고 영화화를 결정했다는 그는 이 소설을 17살에 읽었다. 영화에서 등장한 소년들의 나이와 거의 비슷하다. 그는 모종의 감정적 동질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는 영화화라는 작업을 35년 동안이나 붙잡고 있었을 리가 없다. 이건 추측이고 논리적 비약이다. 이건 논증이 아닌 영화에 대한 태도 그리고 설득의 영역이다. 작품을 사랑하는 이유는 논리를 뛰어넘는다.

그가 그토록 사랑한 작품에 대해 오종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자신의 모든 연출이 스며들어있다고. 그래서일까. 특히나 돋보인 부분은 1인칭과 3인칭을 오갈 때 느껴지는 '끈적함'이다. 끈적한 시선. 영화에서 1인칭 시점을 논하는 것이 우스운 일이 될 수도 있지만 지금 이 영화를 이야기하기 위해선 그 조소를 감당해야만 하겠다. 먼저 영화는 1인칭이 거의 불가능하다. 왜? 1인칭으로 영화를 만들었을 경우, 영화가 아닌 게임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FPS(First-person shooter)를 상상하면 쉽다. 1인칭으로 보았을 때 보이는 것이라곤 '내' 손에 들린 총뿐이다. 흔히 영화에서 1인칭적인 시선을 보여주기 위해 어깨와 뒤통수에 살짝 걸친 앵글은 엄밀히 이야기 하자면, 3인칭이다. 누군가 영화 안에서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이 존재해 그가 보는 시선을 스크린으로 옮기는 것이다. 하지만 오종이 이것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그는 이 인칭의 문제를 이번 영화에서 교묘하게, 그리고 영리하게 풀어놓았다.

두 소년의 키스 장면으로 기억을 돌려보자.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당긴 두 소년의 옆모습이 관객 앞에 펼쳐진다. 세상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이 두 사람은 끈적하게 키스한다. 그리고 이 장면 이전에 이런 대화가 오간다. "엄마는 어떻게 하고?" "괜찮아, 주무셔" 이 두 소년은 오직 두 사람뿐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우리는 투명인간으로 빙의해 키스 장면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이것뿐인가. 성관계가 끝난 후 나신의 상태로, 그것도 엉덩이골 사이를 엄지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는 은밀한 행동까지 우리는 본다. 심지어 낚시 가게에서 엄마가 손님을 대하는 와중에도 두 소년은, 엄마가 고개만 돌리면 보일 공간을 두고도 키스를 한다. 엉덩이를 만질 정도로 농밀한 데, 이를 가게 안 사람들은 볼 수 없다. 그리고 오히려 이 둘은 이 순간을 관음적으로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 판단은 '투명인간'이 존재하기에 글을 쓰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다.

 

ⓒ 찬란
ⓒ 찬란

그런데 이 영화에서 프레임은 두 개가 존재한다. 하나는 앞서 이야기한 투명인간-카메라인데 다른 하나는 지금부터 이야기할 1인칭-글쓰기이다. '알렉시'(펠릭스 르페브르)는 소설을 쓴다. 다시 이야기한다. 알렉시는 소설을 쓴다.(영화 안에서도 '소설'같이 쓴다는 대사가 등장한다) 소설은 1인칭이 가능하다. 소설에서 1인칭은 주인공의 내면에서 발화고 기억되는 이야기의 언어적 풀이이다. 이 영화는 소설을 기반을 한 장면들이 대부분이다. '다비드'(벤자민 부아쟁)의 죽음 이후를 다루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두 소년이 등장하는 장면은 회상일 수밖에 없다. 소설 속 이야기라는 것이다.

두 형식의 충돌은 인칭이란 문제를 재미있게 만든다. 소설 안에서는 분명 1인칭으로 쓰였을 것이다. 물론 소설은 영화 안에서 내용을 관객에게 보여주지도 않거니와 읽히도록 만들지도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소설은 '무덤 위에서 춤을 춘 죄'를 심판하는 판사와 교육 담당관에게 읽힐 변명문일 것이라고. 변명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감정적 호소, 그러니까 설득이 목표이고 이때 가장 필요한 건 3인칭 적 거리두기가 아닌, 인물의 감정에 빠져들 수 있는 주관적 시선이다.

1인칭 소설을 영화화할 때 영화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오종은 분명 이것을 고민했을 것이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이 전에 설명한 장면들(키스신 등)을 바라보는 시선이 폭력적인 장면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고민한 흔적이 역력히 보인다. 이는 영화 안에서 알렉시의 내래이션이 깔리고, 두 소년이 성관계를 가지는 신에서 특히나 두드러지는데. "문 뒤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설명하지 않겠다. 모두가 궁금해할 것이지만 말이다. 하긴, 모든 사람은 문 뒤에서 일어나는 일을 궁금해한다" 이 순간 카메라는 두 소년의 뒤를 따라가기를 멈추고, 괜히 벽을 쳐다보다 고개를 위로 올린다. 그리고 다음 장면은 관계 후, 이불로 몸을 감싼 소년을 비춘다. 이 장면에서도 은밀한 몸동작이 이어지긴 하지만, 분명 가장 강렬한 순간은 피해간다.

 

ⓒ 찬란
ⓒ 찬란

오종은 선택을 해야 했을 것이다. 1인칭으로 가야 할 것인가 기존의 영화적 방식에 따라 3인칭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영화적 문법 혹은 카메라의 시선을 만들어 낼 것인가. 그는 두 번째 방식을 채택하긴 하지만 소설을 '재현'하려 한다. 그의 3인칭 카메라가 두 소년을 훼손시키지 않으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몰래 숨어 절시증 혹은 관음증적 시선으로 보는 것이 아닌(누군가는 이 노력이 실패했다고 분석할 수 있겠지만) 최대한 다른 인물을 배제한 온전한 두 사람을 담으려는 노력이 작용한다.

노르망디 해변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두 소년의 교감은 끝내 죽음으로 끝나지만, 영화의 끝은 새로운 만남을 제시한다. 무덤 위에서 춘 춤으로 인해 사회봉사를 명받지만 이것은 죄에 대한 사함이 아닌, 새로운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다리가 된다. 심지어 이전까지 능동적으로 인물을 찾아 나서는 데 주저했던, 알렉시가 먼저 타자를 찾는다. 이는 쾌락적 충동성이 아닌, 실제로 다비드를 이해하고 내면화한 행동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인간의 행동을 긍정할 수 있도록 만드는 오종의 시선에 대한 고민이 이 영화를 만들어 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글의 끝에서 여름날의 소년의 새로운 만남, 그다음을 상상한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 찬란
ⓒ 찬란

 

썸머 85
SUMMER OF 85
감독
프랑수아 오종
Francois Ozon

 

출연
펠릭스 르페브르
Felix Lefebvre
벤자민 부아쟁Benjamin Voisin
발레리아 브루니 테데스키Valeria Bruni Tedeschi
멜빌 푸포Melvil Poupaud
이사벨 낭티Isabelle Nanty

 

수입|배급 찬란
제작연도 2020
상영시간 101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0.12.24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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