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하루키의 유령, 여성들의 영토
[Critique] 하루키의 유령, 여성들의 영토
  • 오세준
  • 승인 2020.12.1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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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을 중심으로"

<내가 죽던 날>을 보는 내내 '현수'(김혜수)를 보면서 무라카미 하루키(이하 하루키) 문학 속 수많은 주인공들이 떠올랐다. 이건 분명 묘한 경험이었다. 어떤 순간에는 현수가 현수로 보이지 않고, 정확히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어떤 인물―장편인지 단편인지 그 구분마저 혼란스러운, 어쩌면 하루키의 작품들 속 주인공들의 응집된 기이한 형태―로 보였다. 그러면서도 이 영화가 '하루키스럽다'라고 느낀 건 시작부터 확연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왜 몰랐을까?"라며 스스로 물음을 던져도 답을 내릴 수 없는 상태, 완치되었음에도 이유 없이 찾아오는 몸의 마비, 복귀 전 직장 상사로부터 위탁받은 일(미종결된 사건)을 대행하는 것까지. 불완전하고 결핍된 인물의 등장과 '사건'을 통해서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구조(일종의 보물찾기)는 하루키의 대부분 작품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다.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현수'(김혜수)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섬 속을 맴도는 하루키의 유령

이러한 특징을 제외하더라도 영화에서 사건의 중요한 배경 공간인 '섬'은 분명 하루키 문학에서 나타나는 '저쪽 세계'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하루키 문학에서 '현실'을 뜻하는 이쪽 세계와 현실이 아닌 다른 곳을 의미하는 저쪽 세계는 여러 작품에서 나타나는 주요한 키워드다. 보통 이쪽 세계는 치유하지 못한 상처, 이유 모를 상실과 결핍으로 아픈 채 살아가는 '나'라는 주인공의 공간, 저쪽 세계는 그러한 '나'가 상실과 아픔을 치유하고 결핍을 메꾸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대표적으로 <노르웨이의 숲>의 도쿄(이쪽)와 교토의 숲(저쪽),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의 도쿄(이쪽)와 이시가와 현(저쪽),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의 도쿄(이쪽)와 나고야(저쪽) 등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간을 구분 짓는 사건에는 필연적으로 '죽음'이 자리한다는 것이다. <내가 죽던 날>에서 형사인 현수가 세진의 자살(죽음)을 조사하기 위해 서울(이쪽)에서 가월도(저쪽)로 향하는 과정 또한 그러하다.

현수는 분명 이상하다. 그녀는 사건을 서둘러 마무리하면 어렵지 않게 복직할 수 있다. 그런데 사건을 마무리할 마음이 없다. 아니. 세진이 자살이라는 결론을 부정하려 애쓴다. 그녀는 세진의 주변 인물들을 만나러 다닌다. 그녀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녀는 왜 섬으로 오게 됐는지 사건을 까뒤집는 격이다. 현수는 세진에게 묘한 동질감을 가진다. 마치 자기 자신을 보는 듯한 이상한 감정. 섬에 있는 집에서 머문 세진의 CCTV 영상을 보는 현수의 모습은 흡사 자신을 보는 표정이다. 그렇게 세진이 사는 공간에서 깊게 잠에 빠지곤 하는데, 이와 반대로 서울에 있는 그녀의 집에서는 아무리 잠을 청해도 약을 먹고 나서야 간신히 눈을 감는다. 현수의 상실감은 세진의 존재를 통해서 조금씩 채워진다.

고등학생인 세진은 보호감찰이라는 명목으로 홀로 섬에 잠시 머물고 있지만, 실상은 경찰이 그녀를 통해서 그녀의 아버지가 저지른 사건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함이다. 그런 그녀가 시체로 발견되지 않은 채 죽었고, 아무도 책임지고 싶지 않기에 현수를 시켜 덮어버리려는 것이다. 현수가 응시하는 CCTV 속 세진의 살고자 하는 몸짓들. 그것은 현수로 하여금 과거 힘들었던 기억, 지금의 자신을 만든 기억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어쩌면 현수는 세진의 흔적들로 가득한 공간에서 머물며, 세진처럼 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세진이 스스로 죽음 택했다는 사실이 더 믿기 힘들어진 것이다. 이 때문에 그녀가 세진의 주변 인물들을 만나라 다니는 것도 "세진이 왜 죽었을까?"라는 물음에 함께 동조해줄 누군가를 찾기 위함이다.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세진'(노정의)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모든 것이 불확실한 세계에서 벗어난 현수는 비로소 세진의 세계 안으로 들어와 안식을 취한다. 현수는 끊임없이 세진이라는 기호를 소비한다. 그리고 의미를 찾는다. 세진이란 아이는 어떤 존재였을까. 이 물음의 끝에는 세진을 넘어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온다는 것을 깨닫는다. 무엇이 옳은지 알 수 없는 당혹감과 무기력감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세진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자기 자신으로 회귀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는 하루키의 장편소설 <노르웨이의 숲>에서 자살한 기즈키의 죽음으로 혼란에 빠진 채 삶과 죽음을 고민하는 '나'의 "죽음은 삶의 대극점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한다"는 말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이다. 적어도 관객의 눈에는 현수와 세진이 동일시되어 보이는 것. 이것은 감독의 몽타주 이전에 현수의 몸짓이 세진을 따라 움직였기에 가능한 착시다.

영화 후반부 현수가 친구인 민정에게 자신의 상태를 고백하는 장면이 있다. 자신이 잠을 잘 수 없다는 것, 정상적이지 못하다는 것, 불완전하다는 것, 스스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프다는 것. 자신이 살기 위해서 자해한 이유를 눈물을 머금고 말하는 현수의 얼굴은 차가운 고드름이 살짝 녹아떨어질 것처럼 위태롭다. 반대로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민정에 얼굴에는 '타인의 불완전함'을 포용하는 따뜻함이 슬프게나마 젖어있다. 그러나 이 고백은 현수가 자신의 내부에 잠재한 이유모를 아픔과 상처를 더는 외면하지 않고 바로 볼 수 있다는 데 큰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노르웨이 숲>에 등장하는 '깊은 우물'(고독과 상실)에서 무사히 빠져나왔다는 신호이며,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에 등장하는 하지메가 스스로 사악함을 가진 자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응과 같은 것이다.

자신의 결핍을 채울 수 없는 존재, 자신에게 끊임없이 고통과 상처를 주는 존재인 현수는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스스로 상처를 덜 줄 수 있을지.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하는 세진을 바라볼 때, 그녀 또한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하는 의식을 갖는다. 이때 CCTV 영상 속 세진은 마치 현수의 무의식처럼 존재한다. 현수가 CCTV 속 세진의 얼굴을 보면서 자신이 지난 1년 동안 봤던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결국, 세진을 보는 행위가 자기 자신을 보는 행위라 말하는 것이다. 영화 속 세진은 어떤 의미에서 현수의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오가는 존재이면서, 이쪽 세계의 현수를 치유하고 구원해주는 저쪽 세계의 존재다. <내가 죽던 날> 속 현수와 세진의 주변에는 그렇게 하루키라는 유령이 계속해서 맴돈다. 이처럼 영화 속에는 도시소설로서의 하루키, 성장소설로서의 하루키 등의 콘텍스트로 읽힐 텍스트가 섬을 둘러싼 바다처럼 넘실거린다.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순천댁'(이정은)과 '세진'ⓒ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밖'이라는 여성들의 영토

<내가 죽던 날>이 관객에게 좀 더 깊숙이 다가오는 것은 하루키 문학의 기질적인 것보다 '세진'이라는 인물을 다루는 방식에서 있어서다. 영화는 '세진'이라는 인물을 현수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보조적 존재로 등장시키지 않는다. 세진은 현수와 같으면서도 다른 '또 하나의 주인공'이다.

세진은 비루하다. 그녀는 가족이라는 이유로 아버지가 저지른 범죄에 연루됐다. 좋아하는 새엄마를 위해서 아버지가 숨겨놓은 장부를 경찰에 넘겼지만, 이것을 빌미로 경찰은 세진을 통해서 아버지의 사건을 더 파헤치기 위해서 보호감찰이라는 명분으로 섬에 가둔다. 더는 그녀에게 가족은 없다. 믿었던 경찰마저 섬을 찾지 않는다. 아무도 없는 곳. 그런 그녀에게 '순천댁'(이정은)이 손을 뻗는다. 순천댁은 세진을 보며 뇌졸중으로 사지가 마비되어 오랫동안 집 안에서 누워만 있는 조카 순정과 같은 처지라 생각한다. 살아있지만, 자유롭지 못한 현실. 순천댁은 결심한다. 순정의 주민등록증 발급을 '세진'을 위해서(세진의 사진을 넣어 위조하는) 쓰도록. 동시에 세진의 자살을 위장하는 것까지. 그렇게 세진은 순정이 되어 섬에서 나가 자유로운 삶을 찾는다.

세진의 드라마는 현수의 보물찾기 지도와 같다. 현수는 세진의 쪼개진 드라마의 파편을 수집한다. <내가 죽던 날>이 꽤 긴 호흡으로 느껴지는 건, 현수의 삶(A)과 세진의 삶(B)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섞이면서 하나의 드라마로 풀어지기 때문이다. 영화는 마치 'A*B=A+B'라는 식을 증명하려는 듯 천천히 하나하나 풀어낸다. 세진의 비극적인 존재는 절벽으로 떨어지고, 순정이라는 삶이 다시금 받아낸다. 이와 동시에 현수의 불확실함은 세진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선명해진다. <내가 죽던 날>은 제목 그대로 '죽음'을 말한다. 그러나 '죽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죽음을 감싸 안은 '삶'을 보여주고자 한다.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마치 영화는 인물들을 빌려 고백하듯 처연하고 애잔하다.

영화의 끝에서 현수와 세진이 한국이 아닌 낯선 땅에서 마주할 때, 이 결말을 충분히 받아들이면서도 의문이 들었다. "이 여성들의 이상(회복과 행복)은 왜 낯선 땅에서 이루어지는가?" 이것은 이상적인 결말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영화와 현실의 균열을 순순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반항심 같은 것이다.

현수와 세진을 보면서 떠오른 인물이 있는데, 하루키의 단편소설 <하나레이 해변>를 원작으로 한 영화 <하나레이 베이>(2018)의 '사치'(요시다 요)다. 그녀의 아들은 하와이에서 서핑하다 상어에게 다리를 물려 죽었다. 아들을 잃은 그녀는 이상하게도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모른다. 순식간에 떠나버린 아들. 홀로 열심히 키워온 아들. 어쩌면 이 상실감을 애써 부정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들과 좋지 않은 추억을 떠올리며 억지로 밀어내려는 것인지도. 그렇게 사치는 10년 동안 아들이 죽은 시기에 아들이 죽은 하와이의 하나레이 해변을 찾는다. 그곳에서 만난 아들 또래의 소년과 매해 자신을 따뜻하게 반겨준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그녀는 자신이 아들을 싫어했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자신의 곁에 아들이 없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슬프고 힘들다고 고백한다. 비로소 자신의 진심으로 토해낸 것이다.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현수'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하나레이 베이' 속 '사치'(요시다 요) ⓒ 디오시네마
영화 '하나레이 베이'의 '사치'(요시다 요) ⓒ 디오시네마

공교롭게도 세진도, 현수도, 사치도 '섬'이라는 공간 안에서 머문다. 또 그들은 자신들과 같은 처지에 놓인 여성들로부터 기꺼이 환대를 받는다. 그렇기에 그들은 섬에 머물 때, 편안히 잠을 잘 수 있고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을 수 있게 된다. 이로 인해 자신의 어두운 내면 깊은 곳까지 내려갈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 '섬'이라는 공간이 가지는 자연적인 환경 때문일까. <내가 죽던 날>과 <하나레이 베이> 속 도시의 이미지는 모두 정적이고 때론 격정적으로 흔들리며 차갑다. 이런 공간적 대비는 죽음과 삶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면서도, 일상과 비일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현실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두 영화의 섬은 <노르웨이 숲>에서 나오코가 삶의 상실감으로 도쿄를 떠나 도착한 교토의 깊은 산속에 있는 요양원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순천댁'과 '순정'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정상적으로 말을 할 수 없는 순천댁과 마비가 언제 풀릴지 모르는 순정. 이 두 사람은 '섬'을 떠나서 다른 공간으로의 그들만의 영토를 가질 수 없는 것일까. 이 물음은 섬 안에 고립됐다. 어쩌면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한 <버닝>의 '혜미'(전종서)처럼 '사라져야' 해결될 수 있는 것일까. 혜미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아프리카로 떠난 것처럼 앞서 언급한 영화들의 모든 인물들은 자신이 머문 공간을 기어코 떠나야 하는, 아니 떠나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해야 하는 운명에 놓인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영토를 찾아 나서는 개척자이면서 자신들의 영토를 떠나야 하는 이민자이다. <내가 죽던 날>과 <하나레이 베이>는 다행히도 이들이 자신들의 영토 위에서 안위하는 삶을 보여준다.(안타깝게도 나오코는 죽었고, 혜미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으며, 순천댁과 순정의 삶은 불투명하다)

영화의 마지막. 현수가 세진이 서로를 바라보는 숏-리버스 숏 사이에는 현수가 찾고자했던 무언가, 세진의 삶과 죽음, 세진을 감싸는 순정이라는 이름 등 두 사람의 관계를 결정짓는 요소와 관계의 정의가 두 사람의 얼굴과 표정을 통해서 채워진다. 영화 초반 섬을 깎아내릴 듯 거센 파도를 몰아쳤던 시커먼 바다는 끝에 이르러 노을빛에 바래서 밝고 맑게 빛이 난다. 섬에서 홀로 촛불에 의지해 밤을 지새웠던 세진과 밤과 낮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혼란스러웠던 현수. 이들은 바다의 이미지가 천천히 스크린에 스며드는 것처럼 그렇게 삶을 되찾아간다. <내가 죽던 날>은 세진과 현수, 세진과 순천댁 이렇게 서로 관계를 구축하는 것을 바탕으로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을 공존시킨다. 영화는 순천댁이 세진에 한 "생각한 것보다 인생이 길다"는 말처럼 과거에 대한 상처나 상실감을 치유하고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야 함을 진중하게 풀어낸 보기 드문 수작이다.

[글 오세준, yey12345@ccoart.com]

 

ⓒ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내가 죽던 날
The day i died : unclosed case
감독
박지완

 

출연
김혜수
이정은
노정의
김선영
이상엽

김정영

 

제작 오스카10스튜디오 , 스토리풍
배급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제작연도 2020
상영시간 116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0.11.12

오세준
오세준
《코아르》 영화전문기자 및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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