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쉽지만, 역시 아쉽다. 이 아쉬움은 익숙한 기시감을 꽤 억누르다 보니 느껴지는 답답함, 끝내 이것을 해소해주지 못한 영화의 한계에서 비롯된다. 제목 그대로 헛헛하다. 이 글은 필자 스스로 공허함을 채우는 행위의 결과물인 동시에 영화의 공백은 안으로 들어가는 궤도이다.
이층집, 전화기 그리고 살인마
이층집에서 발견된 전화기. 상징에 상징을 더한 상징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이층집은 대대로 주인공의 욕망을 실현해 주는 대표적인 공간이다. <하녀>(1960)에서 등장하는 이층집은 '하녀'의 욕망이 춤을 추듯 온 집안으로 활보하는 무대이다. 박 사장네 가족이 여행을 떠난 사이 술판을 벌이는 기우네 가족은 어떠한가. <기생충>은 반지하에 사는 기우와 그 식구들을 유명한 건축가 남궁현자가 지은 박 사장네 이층집으로 전원 취업시킨다. 두 영화의 집은 당대의 '부'를 상징하면서도, 극 중 인물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장소이다. 이와 반대로 <컨저링>(2013)에서 등장하는 이층집은 공포가 허락한 공간이자 '귀신의 집'으로, <유전>(2017), <사바하>(2019), <변신>(2019), <더 룸>(2019), <클로젯>(2020), <침입자>(2020) 등 최근에도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 속 이층집은 단순히 공포‧호러‧미스터리 등 장르적인 장치에 머무는 것이 아닌, 주인공들의 사정이 살점으로 붙어 입체적이면서 복합적인 장소로 의미가 구현되어 진다. 그리고 이러한 작품들은 '죽음'을 향한 욕망이 작품 기저에 넘실거리고 있어, 마치 비극의 전말을 폭로하듯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콜>의 이층집 또한 그러하다. 마치 연극 무대처럼 인물들의 주된 공간이며, 영화의 모든 사건이 이곳에서 발생한다. 엄밀히 따지면, 이층집은 시간에 따라서, 또 과거와 현재에 발생한 인과관계에 따라서 계속 변화하기에 여러 모습을 한 이층집이 존재한다. 이러한 변화를 이끄는 것은 '전화기'를 매개로 한 서연(박신혜)과 영숙(전종서)의 '욕망'이다. 서연은 영숙을 통해서 죽은 아빠(박호산)를 되살린다. 과거 아빠를 죽게 한 가스폭발 사건을 영숙이 막은 것. 그리고 서연 역시 영숙이 새엄마(이엘)로부터 살해당한다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그녀의 목숨을 구한다. 서로 상부상조한 듯 보이는 이 관계가 틀어지는 순간은, 영숙의 광기(새엄마로부터 억눌러진 욕망)가 폭발하면서부터다. 영숙은 반사회적 인격장애, 경계성 인격장애를 가졌다. 과거 정신병원에서 10년 정도 입원을 해 치료를 받았다. 새엄마가 영숙을 가두고, 퇴마의식을 한 이유에는 그녀의 정신병을 고치기 위해서다. 심지어는 영숙은 연쇄살인마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인물이다. 결과적으로 서연은 아버지의 목숨(행복한 가족)을 두고 악마와 거래를 한 셈이다.
서연과 영숙은 같은 공간에서 다른 시간을 공유한다. 그리고 욕망을 부여한다. 두 사람은 '금기'를 어긴 인물들이다. 두 사람은 '죽은 사람을 되살렸다는 사실'에 무감각하다. 이는 영숙이 단순히 사이코패스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서연 또한 어릴 적 자신의 실수로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을 왜곡해 엄마의 실수로 아빠가 죽었다는 거짓을 믿는, 자신의 죄책감을 엄마에게 떠넘기며 원망해온 인물이라는 점에서 정상의 범주를 벗어난 인물임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결국, 서연과 영숙의 심리게임이 아니라, '위반자(서연)가 얼마나 끔찍한 처벌을 당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콜>은 할리우드 슬래셔 영화들의 고루한 요소들을 가진다. 숲 속에 위치한 산장(이층집)-살인마(영숙)-살인도구(칼와 소화기, 넓은 의미에서 전화기까지)가 대표적이다. 특히, '전화기'는 서연과 영숙을 잇는 것이 아닌, 영숙이 서연을 지배하는 도구로 사용되는데, 이때 구조적으로 보면 영숙은 서연의 위에 위치한다.(시간은 과거임에도 불구하고) 서연과 통화를 하는 영숙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카메라가 다음 컷에서 서연을 담을 때, 어느 각도에서든 영숙이 서연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강력하게 뿜어낸다. 더욱이 영숙의 시선이 외화면 어딘가로 향하는 얼굴들은 이러한 느낌을 강하게 전달한다. 이런 점 역시 슬래셔 영화들에서 흔하게 보이는 표적을 향한 살인마의 시선, 즉 '살인마의 시점쇼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서연이 홀로 영숙과 대결을 펼치는 전개는 1970-80년대 할리우드 공포 영화의 대표적인 장르적 컨벤션이다.
과거에게 저당잡혀진 현재
그러다보니 <콜>은 시간을 활용한 SF 타임리프(Time Leap) 영화들과 섞일 수 없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시간'은 인과율의 지표로, '행동'(원인)-'행동에 따른 결과'를 나타내는 척도에 불과하다. 꿈을 매개로 시간을 공유한 영화 <시간이탈자>(2015)나 무전기를 통해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한 드라마 <시그널>(2016)이 유사하게 느껴지지만, 앞선 두 작품이 형사가 범인을 쫓는 이야기인 반면에 <콜>은 살인마가 살인을 벌이는 이야기다. 다만, 현재(과거의 미래)를 통해서 과거를 바꾸는 방식이 아닌, 과거를 통해서 현재가 계속해서 바뀌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는 과거를 상징하는 영숙과 현재를 상징하는 서연의 관계, 더 나아가 과거에서 현재로 향하는 시간의 방향이 살인마(과거)가 표적(현재)을 쫓는 방식으로 나타난 것까지.
여기서 문제는 '시간을 활용하는 방식의 효용성'이다. '죽은 사람을 되살렸다'라는 금기를 어긴 부분만 제외하면, '시간'의 쓸모는 점점 퇴색된다. 과거에서 벌어진 영숙의 살인행위는 현재라는 서연의 세계를 무너뜨리고 바뀌는 듯 보이지만, 그 행위가 결과적으로 어떤 질적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 점에서 더 확고해진다. 영숙이 과거든, 현재든, 심지어 미래에 있더라도 서연의 목숨을 쥐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콜>이 할리우드 슬래셔 영화들의 장르적 컨벤션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서연'의 비극은 바뀌지 않는다. 서연이 영숙과 맞서지 않고 도망치는 순간, 게임은 끝났다. 아니.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영화에는 '게임의 규칙'이라 부를 룰이 존재하지 않았다. 영화가 주는 긴장감은 스릴이 아니라, 영숙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공포감 때문이다.
그렇기에 <콜>은 공포적인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이층집의 내부를 변화시킨다. 이 같은 어트랙션을 발생시키는 CG는 작위적이고 이질적이다. 영화의 이야기로부터 더 멀리 밀어낸다. 이는 서연이 느끼는 공포감과 관객이 느끼는 공포감 또한 달라지게 만든다. 이층집 안에서 벌어지는 서연의 폐쇄적인 공포감은 전시될 뿐이고, 관객인 우린 영숙이 보여주는 몸짓과 표정에 압도된, 즉 캐릭터가 보여주는 기질적인 것의 공포감을 느낀다. 영화는 과거 많은 장르영화들의 이미지와 문법을 차용하면서도, 자신의 스타일로 변화하거나 뿌리를 두어 더 극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이는 배명현 기자가 아리 에스터 감독의 <유전>(2018)이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악마의 씨>(1968)를 경유하면서도 재해석과 변주를 통해 관객에게 공포심을 가져다주는 설명하는 글⑴에서 <콜>이 가지는 공백을 깊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콜>의 단순한 내러티브가 의존해야 하는 것은 결국, 캐릭터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빠른 편집이나 사건의 발생에 따라 현재와 과거가 변하는 효과는 큰 인상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장르적인 외피가 더 빛이 나도록 광을 내는 정도랄까. 물론, 이 영화에게 윤리적인 교훈이나 예술적 미학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여러 장르들의 조합으로 안정적인 완성도를 가지는 이 영화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은 좀 더 과감히 보여줄 수 있는 능동적인 태도다. 후반부에서 영화가 살짝 위축된 느낌이 드는 건, 영숙이 서연의 비밀을 폭로할 때, 지나치게 무력해질 뿐만 아니라, 애증의 관계인 엄마를 앞세워 영숙과의 대결을 마무리한 결말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도 스스로 이러한 결말이 별로였는지, 쿠키영상을 통해서 죽지 않은 영숙을 통해서 배드 앤딩으로 전복시켜버린다.
<콜>은 어딘가에(이층집의 숨겨진 공간쯤) 납치된 채 온몸이 묶인 서연의 겁에 질린 얼굴로 완전히 끝을 내는데, 오히려 이 과정을 결말부에 넣어 보여줘야 했다. 다시 말해서 영숙이 더 폭주하도록 방치했어야 하는 것이다. 서연이 자신의 엄마와 관계를 회복하는 결말이 클리셰라는 이유를 넘어서 '금기를 어긴 자'에게 일종의 면죄부를 준 지극히 신파적인 결말이 여러 장르들의 외피가 품어주지 못할 만큼 매끄럽지 않다. 더 나아가 박신혜의 얼굴보다는 전종서의 얼굴이 더 필요했던 이유도 분명 있다. 미디어에 많이 노출되지 않은 배우의 얼굴이 상대적으로 낯설기에 영숙이라는 캐릭터를 더 비밀스러운 인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조연 캐릭터를 소모하고 주연 캐릭터의 비중을 높인 연출은 문제가 없으나, 캐릭터들이 '살인마'와 '표적'이라는 틀 안에서 한정적으로 쓰인 탓에 능동적이지 못하다.
최근 선민혁 기자가 쓴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 대한 글⑵에서 "캐릭터가 잘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토익으로 치면 800점 이상이라고 할 만하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살아있다"며, 구구절절한 설명이나 플래시백 없이 관객들이 극 속 인물들을 추측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의 관점을 빌려 보았을 때, <콜>의 캐릭터들은 토익으로 치면 600점 정도이지 않을까. 물론, 배우들의 연기에는 900점 이상의 점수를 줘야 마땅하다.
숏과 숏의 충돌, 빛과 어둠의 대비, 변화무쌍하게 달라지는 공간의 감각적인 미장센, 여러 장르들의 조합으로 형성되는 그로테스크한 분위기 등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재미로 관객들이 모든 장면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힘을 가진 장르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는 이충현 감독의 말에는 수긍하나, 어떤 의미에서 영화는 아직 다 보여주지 못했다. 영숙을 조금 더 길게 보고 싶은 이유는 왜일까. <콜>은 서연과 같이 과거로부터 도망치는 신세다. 장르의 컨벤션 사용 이전에 영화 스스로 자신의 장르에 대한 고민이 결핍된 탓에 영화가 가지는 공백은 크다. 또 폭발하지 않고자 지나치게 억누른 탓도 있을 것이다. 잘 썼지만, 잘 싸우지 못했다. 필자에겐 그저 붉은색 가발, 붉은색 립스틱, 붉은색 원피스, 붉은색 패턴의 퍼코트를 입은 영숙이 웃으며 “나 이뻐요?”하는 장면이 꽤 오랫동안 잔상에 남을 뿐.
P.S.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점을 붙이자면, 엄마의 존재를 부정하고 죽은 아빠의 존재를 (되살려내기를) 욕망하는 서연의 모습은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 오이디푸스에 가깝다. 아빠가 되살아났을 때, 집의 모습부터 서연의 옷까지 바뀌는 과정은 '이 가족의 주체'가 아버지임을 확인해 볼 때, 전통적인 가족상에 가깝다. 이와 반대로 영숙은 부모가 없다. 새엄마가 영숙을 두고 “네 엄마꼴 나고 싶어?”라고 하는 것을 보면, 반사회적 인격장애는 유전이지 않을까. 새엄마와 영숙의 관계는 오컬트 장르에서 흔히 보이는 신부와 악령, 퇴마사와 귀신, 박사와 괴물, 의사와 환자쯤으로, 이들이 모녀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 묘하다. 두 인물의 가족형태가 대비되면서도 시간이 뒤바뀐 듯 전통적인 가족과 현대적인 가족의 형태가 각각 다른 시간대에 있는 점도 시간의 역전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요즘말로 뇌피셜정도.
(1) 배명현, [아리 에스터] 공포가 가져다 준 것
(2) 선민혁,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캐릭터가 올리는 고득점
[글 오세준, yey12345@ccoart.com]
콜
Call
감독
이충현
출연
박신혜
전종서
김성령
이엘
제작|제공 용필름, 넷플릭스
제작연도 2020
상영시간 112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0.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