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 한 인간의 트라우마가 존재하기 위해선
'런' 한 인간의 트라우마가 존재하기 위해선
  • 배명현
  • 승인 2020.11.30 09: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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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고 싶은 사람은 없다"
ⓒ (주)올스타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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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는 당사자에겐 고통 그 자체이지만,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꽤나 흥미로운 부분이 있는 대상이다. 영화, 소설, 드라마 등 서사를 가진 많은 작품들이 트라우마에 기반한 인물들을 등장시키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충격을 받은 인간과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 그 인간의 고통이 어떤 경로를 통해 왜곡되는 가를 바라보는 것은 그야말로 흥미로운 일이다. 여기에 모종의 사디즘적 쾌락이 숨어있지만, 우리가 서사물을 볼 때 절시증이 기반이 된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뭐 그다지 새로운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어쨌든, 한 인물이 가진 트라우마가 왜곡된 형태로 발현될 때 그 상황을 보는 우리는 어떤 감각을 느끼게 될까. 중요한 것은 트라우마를 부리는 주동인물이 있다면 그 트라우마를 받은 피동인물이 있어야 '트라우마의 서사'가 완성된다는 점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그렇기에 <런>은 전형적인 트라우마 서사를 따라가면서 흥미를 유발하는 영화이다.

영화의 첫 신은 숨을 쉬지 않는 신생아로부터 시작한다. 아이는 인큐베이터에서 숨을 쉬는 쇼트로 바뀌지만, 그다지 희망적인 상황은 아니다. 엄마의 "아이는 괜찮은가요?"라는 질문에 아무도 답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 쇼트는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듯 보인다. 장애아를 가진 아이들의 어머니 모임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나온다.

 

ⓒ (주)올스타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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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에서 이미지의 움직임의 주체가 되는 것은 '휴지'이다. 눈물에 대한 직접적인 연관 관계로 등장하는 휴지는 사회의 통합적인 감정을 말해준다. 그동안 함께 살았던 '내 아이'가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면 그가 잘 할 수 있을까? 라는 그 모임의 공통된 걱정에 어머니들은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이 쇼트의 끝에는 스마트폰이 등장한다. 아까 등장한 아기를 걱정하던 엄마는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타인들의 눈물에 심드렁하다. 이 장면은 영화 내내 가장 이상한 장면이다.

그녀는 모임 장의 질문인 "아이가 대학에 가는 데 심정이 어떠세요"에 너무나 솔직한 답변을 하기 때문이다. "아이 때문에 데이트 한 번 못하고 제시간이 없었는데 이제 저는 자유에요" 하지만 이건 진심이 아니었다. 영화를 다 보기 전부터 눈치챌 수 있다. 그녀는 대학에 합격한 딸을 대학에 보내지 않는다. 절대로. 오히려 그녀는 딸에게 약을 먹여 다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것도 어린 유아기 이후 어느 순간부터. 그녀가 사회를 인지하고 타인과 대화하기 시작한 이후부터라고 예측할 수밖에 없다.

 

ⓒ (주)올스타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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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모임에서 엄마의 심드렁한 표정으로 돌아가 보자. 이때 상담사를 포함한 다른 어머니들이 난색을 표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대답 차체는 물론 어울리지 않는다. 다 같이 눈물을 흘리는 상황에서 누군가 저런 답을 한다면 분명 분위기는 싸해진다. 하지만 난색의 진짜 이유는 '이 공간 안에 존재하는 은폐된 욕망'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내 아이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고 있어 라는 은폐되고 발현되어서는 안 되는 욕망. 이들은 눈물과 휴지의 관계처럼 끈끈하게 유대 한다. 이들은 이 모임에서 함께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자신의 목적을 이룬다는 착각을 주문처럼, 스스로 걸고 있다. 그 때문에 이 대답을 듣고 난 후 그 누구도 그녀에게 비난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비난하는 대사조차 나오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재미있는 점은 이 장면과 결말부의 연결이다.

엄마의 트라우마는 딸에게 전달된다. 트라우마가 존재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주동은 피동의 존재에게 트라우마를 주입했고 이 주동과 피동이 영화의 중간 과정을 통해 역전된 것이다. 엄마는 자신의 아이를 잃은 트라우마를 유괴라는 형태로 발전시켰고 이것은 유전이 아닌 전달이라는 형태로 이어졌다. 이 둘은 혈육이라는 관계보다 더욱더 끈끈하게, 심지어 한 쪽이 없이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진정한 가족'이 되었다. 이 때문에 영화 초반에 대사로 등장하는 엄마의 거짓말은 더욱 힘을 받게 된다.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딸을 숨긴 것이 아닌 그녀는 존재하기 위해 딸을 그렇게 키운 것이라는 결론에 다가설 수 있다. 혼자라는 것은 애초에 그녀의 선택지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영화 결말부에 딸이 준비한 약을 보며 끔찍한 표정을 짓지만, 그녀는 영화의 시작, 그러니까 아이의 죽음에서부터 스스로 결말을 선택한 기묘한 인물이다. 우리는 한 인간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가 아닌, 그 트라우마는 어떤 이와 관계되어 있는지를 먼저 보아야 하지 않을까.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 (주)올스타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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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n

감독
아니쉬 차간티Aneesh Chaganty

 

출연
사라 폴슨Sarah Paulson

키에라 앨런Kiera Allen

 

수입|배급 (주)올스타엔터테인먼트
제작연도 2020
상영시간 90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0.11.20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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