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에덴' 어떤 방식으로 보아야 할지
'마틴 에덴' 어떤 방식으로 보아야 할지
  • 배명현
  • 승인 2020.11.04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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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자' 재능을 타고 등장해"
ⓒ 알토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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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시대의 어둠과 혼란의 사이에 '마틴 에덴'(루카 마리넬리)이 등장한다. 배의 일꾼으로 살아가는 그에게 어느 날 등장한 구원적 아름다움이 등장한다. 그녀의 이름은 '엘레나'(제시카 크레시). 첫눈에 사랑에 빠진 마틴 에덴은 그녀와 똑같은 생각과 품격, 품위를 가지기 위해 노력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쓴다. 하지만 그녀는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란 에덴에게 독서만으로 도달하기 어려운 높이에 있다. 부르주아로 태어난 그녀는 부와 지식 모든 걸 가지고 있다. 그리고 부를 통하여 그렇게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 둘은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마틴은 계속해서 책을 읽으며 세상에 눈을 뜬다. 그리고 사유하고 생각한다. 그러다 마침 작가로서의 삶을 살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그의 글은 세상을 담는 리얼리즘이다. 자신이 태어난 프롤레타리아의 삶을 그대로 쓴다. 죽음과 가난이 날것 그대를 옮겨 적고 어둡고 음습한 사실 그대로를 담는다. 그 때문에 세상은 그의 글을 좋아하지 않는다.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소설에서 안위를 얻으려 하고 웃음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예술을 지속해서 밀어붙이다 타협을 하고 만다. 그리고 결국 등단한다.

이때부터 영화는 예상치 못하게 2부로 넘어간다. 로맨스 장르인 척하던 영화는 2부에서부터 본색을 드러낸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 그리고 개인과 전체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2부가 시작되면서 1부의 이야기 또한 변화되기 시작한다. 사랑에 빠져 글을 쓰기 시작한 마틴 에덴이 아닌, 배움을 통해 변화되는 에덴이 아닌, '본래의 에덴이 사회화되면서 얼마나 불행해졌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그를 계몽 시키려 했던 부르주아 엘레나는 얼마나 오만한 인간이었는가. 그리고 마틴의 글을 받아주지 않았던 출판사들은 진실에 눈을 돌린 얼간이들에 다름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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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은 문학적 인정을 받은 이후 완벽하게 망가진다. 부를 쥐고 부르주아가 되지만, 붕괴된 자아로 인해 사회 안에서 배회하게 된다. 어떤 틈에도 끼어들지 못한다. 부르주아의 틈에도, 프롤레타리아의 틈에도. 그는 계속해서 개인에 관해 이야기 하지만 사회는 그렇지 않다. 부르주아는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해 아이러니한 발언만 할 뿐이며 프롤레타리아는 눈과 귀를 닫고 ‘전체’에 매몰된다. 진정한 개인주의자인 마틴 에덴은 그 둘의 틈새에 떨어져 썩어간다.

어디에서도 구원받을 수 없는 마틴 에덴은 영화 중간중간 삽입되는 필름 푸티지로 은유된다. 돌출된 이미지. 실제 고전 필름을 떠올리게 만드는 영상에서 관객은 모종의 애수를 느낀다. 이 애수를 통해 당대의 혼란과 노스텔지어를 관객은 주입받는다. 이 감정으로 인해 관객은 카틴 에덴의 삶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되고 그가 마치 실제 인물인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 배가 침몰하는 쇼트와 마틴 에덴이 눈물을 흘리는 쇼트로 이루어진 몽타주인 것은 그 때문이다.

사회가 혹은 개인이 타고난 성정을 바꿀 수 있을까. 이 영화는 그에 대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예술가로서의 성정을 타고난 마틴 에덴은 그 누구도 바꾸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당대 최신 이론인 진화론과 연결지어 개인에 대해 설명하고 설득하려 한다. 하지만 그 역시도 누구도 설득시키지 못한다. 그는 틈에 끼어 있기 때문이다. 누구도 그를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그는 부르주아도 프롤레타리아도 아니게 되어버렸다. 그는 홀로 죽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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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말의 희망은 남아있다. 원전인 소설에서 주인공은 자살로 끝나지만, 영화는 그를 죽음까지 몰로 가지는 않는다. 영화는 관객에게 선택을 남겨두었다. 20세기 초 이후 벌어진 두 차례의 대전과 공황, 그리고 크고 작은 전쟁과 학살 이후를 사는 우리가 판단한다. 어떤 방식으로 그를 보아야 할 것인지. 영화는 비극 끝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길 바라고 있다. 소설을 다시 쓰려는 감독의 의도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 우리가 담지해야 할 현재의 비극을 반추해보아도 좋지 않을까.

영화는 이상하리만치 필름의 질감을 따라간다. 특히 어두운 장면을 담을 때 선명하게 드러나는 노이즈가 그것을 증명한다. 당시대를 담으려는 장치가 엿보이는 점이다. 또한 핸드헬드로 거칠게 담은 쇼트 또한 날것 그대로를 담아 당 시대의 불안을 잘 살리고 있다.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담는 얼굴 또한 마찬가지이다. 불안한 눈동자와 시선을 포착한 카메라는 관객에게 영화가 담은 감정을 잘 전달해준다.

화면 구성과 씬의 연결 또한 옛 고전 영화를 떠올리게 만든다. 고전 로맨스 영화에서 차용한 씬과 질감으로 인해 영화에는 기묘한 핍진성이 생겨난다. 이 힘으로 영화는 끝까지 달려간다. 관객을 사로잡는 이 힘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 영화 '마틴 에덴' 포스터
ⓒ 영화 '마틴 에덴' 포스터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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