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도 없이' 고약한 농담
'소리도 없이' 고약한 농담
  • 배명현
  • 승인 2020.10.31 15: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 (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소리도 없이>는 기묘하다. 영화는 일반적인 범죄 스릴러 장르로 시작해 개그 혹은 휴먼 영화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관객을 익숙한 광경 속으로 끌어들인 뒤, 예상치 못한 지점으로 데려다 놓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우연성은 그야말로 고약한 농담이다. 관객들에게도 영화 속 인물들에게도 말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것은 우연이다. 정확하게는 ''우연'이 어떻게 작용하는가'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태인'(유아인)과 '창복'(이재명)이 계란을 파는 데에서 시작한다. 이들은 계란을 파는 동시에 시체를 처리한다. 하지만, 곧 새로운 작업을 지시받는다. 11살 아이 '초희'(문승아)를 데리고 있을 것. 조직 내 실장이란 사람이 다른 일을 벌이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며칠이면 끝날 것 같았던 일은 다른 사건과 엮여 미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의 아빠가 돈을 준비하지만, 이때 과하게 긴장을 한 창복이 계단에서 미끄러지며 죽고 만다. 이 사실을 모르는 태인은 아이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

그렇다면 이 우연은 어떻게 적용되는가. 이들의 유괴는 의도치 않은 일이었다. 영화 포스터에서도 나왔다시피 계획에 없던 유괴범이 되었다. 예상치 못한 일의 주어짐과 만남, 그리고 그 결과를 통해 일어나는 얽힘. 우연이란 말이 함의하듯 인과관계를 물을 수 없지만, 이 영화에서 '우연'이 적용되려면 나름의 탄탄한 기반을 깔아두어야 한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우연으로 시나리오의 빈약함을 해소하려 한다는 문제를 제기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리도 없이>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연'이 작용하기 전, 복선을 깔아둔다. 그리고 그 복선을 기억할 수 있도록 악센트를 준다. 영화는 친절하다.

 

ⓒ (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이 우연성이 먹히는 것은 작품의 시작부터 깔아놓은 온도가 무겁기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연은 계속해서 일어난다. 태인이 없는 틈을 타 도망을 가던 초희는 경찰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술에 취한 채 웃는 남자를 보며 초희는 도망을 가고, 태인과 만나게 된다. 주변을 순찰하던 순경이 태인의 집에서 수상함을 느끼지만 태인과의 격투 끝에 쓰러진다. 놀랍게도 다음날 태인의 집에 찾아온 두 명의 빌런을 퇴치하게 되는 것도 이때 쓰러진 순경이 깨어났기 때문이다.

이들의 불행이 우연의 작용과 적용으로 인해 증폭되는 과정을 관객을 목격하게 된다.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행위를 하게 되는가. 그러나 이 행위는 어떤 악의 근거하여 벌어지는가. 결과는 분명 악하지만, 이들은 얼마나 악한가. 이 질문은 이들이 악하지 않으며 선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들의 악이 정말 악이라면 이들의 악을 어떻게 규범화시킬 것이며,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 것인지를 영화는 관객에게 질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행위의 근거가 되는 지점이 우리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이 일을 시작했다. 사람을 맞아달라는 일도 처음엔 거절했다. 악한 사람이 악을 벌인 것이 아니라, 일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다.

 

ⓒ (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 (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 (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 (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이 영화가 사실적이지만 이질적으로 다가오는 이유에 대해 생각한다. 먼저 태인과 창복. 두 인물의 관계는 모호하다. 대안가족이라고 부르기에도 아니라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우연성이 잘 드러날 수 있도록 인물들의 관계를 떨어뜨려 놓았다. 영화는 핍진성을 일부러 제거한 뒤, 이를 토대로 관객을 웃긴다. 창복이 통화를 하며 '죽어가고 있습니다'처럼 비현실적인 대사를 전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른 같은 아이와 아이 같은 어른. 말 한마디 하지 않지만 왜 그가 말을 하지 않는지 나오지는 않는다(기도를 하면 말을 할 수 있다고 나오지만 과연...)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창복의 죽음 이후에 명확해진다. 창복이 죽은 후 영화는 창복이 없어도 괜찮았다는 것처럼 흘러간다. 여기서 영화의 아쉬운 지점이 드러난다. 창복이 정말로 영화에서 필요한 존재였다면, 그의 죽음 이후에도 그의 존재가 드러나야 한다. 그를 갈망하여야 한다. 하지만 누구도 그러지 않았다. 그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의 공백은 허무해진다.

결말부에서 초희는 고민한다. 자신을 데리고 온 (정장을 입은)태인을 보고 뭐라고 한 것일까. 영화는 관객에게 들려주진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결말은 아니다. 관객에게 들려주지 않는 한 마디로 영화적 의미를 성취는 것은 이미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2003, 감독 소피아 코폴라)에서 이루었다. 진짜 엔딩은 자신의 터로 돌아간 창복이다. 이후 창복에겐 또 어떤 '우연'이 적용될까. 또 어떤 방식으로 작용할까. 이 문제를 생각하기란 여간 쉽지 않다.

 

ⓒ (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 (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