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 정도로 익숙한 '소리도 없이'
낯설 정도로 익숙한 '소리도 없이'
  • 선민혁
  • 승인 2020.10.28 00: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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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은 어떤 영화를 재미있다고 느낄까. '재미'란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각자 그것을 느끼는 지점이 다르겠지만 흔히 들을 수 있는 '요즘 극장에서 볼 영화가 없다,' '한국영화는 다 비슷하다.'와 같은 말들이 '새로움'에 대한 관객들의 갈증에서 나온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관객들은 뻔한 것에 질렸다. 그들은 더 이상 맥락이 부족한 감정의 과잉에 몰입할 수 없으며 관습적인 전개에 흥미를 느낄 수 없다. <소리도 없이>는 이러한 관객들을 위한 영화다.

 

ⓒ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소리도 없이>의 포스터와 줄거리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아무런 죄책감없이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는 두 주인공이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곤경에 빠져, 누군가에게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떠올렸다. 범죄를 일상적으로 행하는 두 인물이 우연히 곤경에 빠진다는 설정은 예상대로였지만, <소리도 없이>는 내 생각처럼 단순한 영화가 아니었다. 시체처리라는 범죄를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창복(유재명)과 태인(유아인)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죄의식이 있지는 않으나, 악의 역시 없다.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해야 하는 '직업'에 충실하여 맡겨진 일만 할 뿐, 더 큰 이익을 얻고자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또한 범죄자인 이들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선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다리를 저는 창복은 처리한 시체의 명복을 위해 머리 방향을 북쪽으로 놓아주고 기도를 해준다. 그는 부모가 없는 태인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일을 주는 것처럼 보이며 말을 하지 않는 태인을 변호하고 그에게 기도 테이프를 꼭 들으라고 당부하는 등 태인이 제대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진 것 같기도 하다. 또한 유괴한 아이를 데리고 있는 일은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태인은 마을의 노인을 챙겨주며 맡게 된 아이를 보호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더 나은 삶을 추구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그러나 고된 일을 도맡아서 하는 태인에게 고작 몇 만원을 일당으로 지급하는 창복의 모습은 태인을 이용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며 창복은 결국 돈을 받고 유괴한 아이를 데리고 있는 일을 맡는다. 태인이 더 나은 삶을 추구하고 있다고 보기에는 그가 동생과 함께 살고 있는 집은 쓰레기 더미를 연상시킬 정도로 정리가 안 되어있으며 태인의 동생은 오빠를 좋아하긴 하지만 아무런 교육을 받지 않고 있고 제대로 씻겨지지도 않은 채 방치되어 있다. 게다가 어찌됐건 이들이 직업으로 삼고 있는 일은 범죄 행위이다.

악당이라 하기엔 선하고, 정의롭다고 하기엔 악한 두 주인공에 대한 설정처럼 <소리도 없이>의 세계는 현실의 세계처럼, 단편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복잡한 세계의 사건은 인물들이 희망하고 관객들이 예상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늘 하던 대로 시체처리 하청을 하며 살아갈 수 있을 줄 알았던 창복과 태인은 내키지 않지만 거절할 수 없는 일을 맡게 된다. 일을 맡긴 김실장(임강성)의 말 대로 잠깐이면 끝날 일일 줄 알았으나, 다음 날 김실장은 처리해야 되는 시체로 그들 앞에 나타나게 되고, 김실장의 일은 누구에게도 인계되지 않아 창복과 태인이 알아서 해결해야하는 일이 되어 버린다. 전문가의 도움으로 일이 잘 해결되는 듯했으나, 뜻밖의 사고로 일은 완전히 꼬인다. 태인이 처음으로 정의감을 적극적으로 발휘하여 일을 바로잡고자 하고, 비로소 안정이 찾아온다고 느낄 때쯤, 그를 덮치는 건 이전보다 더 큰 혼란이다.

 

ⓒ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단 하나의 클리셰도 없는 <소리도 없이>의 세계에서, 인물들과 관객들이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른 영화들에서 본 듯한 뻔한 장면이 나오지 않고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하는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가는 전개가 있어서, <소리도 없이>는 단지 그래서 재미있는 걸까?

어디에서 본 것 같지 않은 이 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너무나 현실 같다. 평범하지만 각자 복잡한 사람들 사이에서 태연하게 일어나는 사건들과, 그 이후에 대하여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는 불확실한 세계는 영화가 아닌 현실을 보는 것 같아서 불편하다. <소리도 없이>는 그래서 조용하게 충격적이며 이 영화를 보는 것은 찝찝하고도 즐겁다. 이것이 <소리도 없이>가 매력적인 이유이다.

[글 선민혁, sunpool2@ccoart.com]

 

ⓒ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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