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록시마 프로젝트' 시선으로부터, 점진적으로
'프록시마 프로젝트' 시선으로부터, 점진적으로
  • 오세준
  • 승인 2020.10.27 04:2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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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프록시마 프로젝트'(Proxima, 프랑스‧독일, 2019, 107분)
감독 '앨리스 위노코'(Alice Winocour)
ⓒ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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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교적 국내에는 덜 알려진 프랑스 감독 '앨리스 위노코'는 단편영화 <키친>(2005), 첫 장편영화 <어거스틴>(2012)에 이어 두 번째 장편영화 <메릴랜드>(2015)까지 연이어 칸영화제 초청과 더불어 국제 비평가 부문 심사위원(2016)으로 활동하는 등 '칸'이 인정한 여성 감독 중 한 명이다. 자신의 작품을 직접 쓸뿐만 아니라 데니즈 겜즈 에르구벤 감독의 <무스탕: 릴리의 여름>(2016)으로 세자르상 각본상을 받으면서 시나리오 작가로도 꽤 입지가 있는 편이다. 그래서일까.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 <프록스마 프로젝트>는 코로나19 여파로 흥행성적은 그렇다 해도, '유수 영화제 수상작, '에바 그린의 뛰어난 연기'(팜므파탈적인 모습에서 벗어난 연기 변신)나 '남성중심인 우주개발산업에서 여성을 그려낸 이야기' 등 단편적인 평가 정도로 받아들여진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와는 별개로, '이 영화가 보여주는 방식'에 대해서 분명 언급되어짐에 마땅한 필요성을 느꼈다.

<프록시마 프로젝트>는 일곱 살 딸 '스텔라'(젤리 블랑)를 둔 '사라'(에바 그린)가 유럽우주국 '프록시마' 프로젝트의 대원으로 선발되어 첫 우주 비행을 준비하는 과정을 그린다. 영화는 남편과 별거 중인 한 여성이 완벽한 엄마가 되는 동시에 완벽한 우주비행사가 되는 모습을 그리는 보여줄 듯 굴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 이 영화를 보기 전 예측되는 모습을 -육아와 일, 이 둘의 양립 사이- 보여주는 영화의 시작은 영화의 타이틀 'PROXIMA'가 뜨기 직전에 '본심'을 드러낸다.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운 '스텔라'가 방을 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는 얼굴의 클로즈업은, 곧장 사라가 스텔라의 방을 나와 집 베란다로 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얼굴의 클로즈업으로 이어진다. 이때 분리 병치된 두 장면은 공통적으로 인물들의 눈이 위를 향하는 시선을 담는데, 사라의 시선은 자신이 곧 도착할 '우주'를 보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딸의 시선은 방을 나가는 엄마의 얼굴 쪽을 가리키는 것인지, 방 천장을 향하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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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스텔라의 불명확한 시선'이 사라의 명확한 시선으로 이어지는 이 시퀀스는 묘한 질감이다. 왼쪽에 위치한 스텔라의 얼굴이 오른쪽을 향하는 것과 오른쪽의 위치한 사라의 얼굴이 왼쪽을 향하는 두 장면은 분명 위를 향하고 있지만, 서로를 향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두 사람이 교차하는 시선은 엄마와 딸의 관계를 상기시키는 다분한 성질과는 별개로 관객이 다른 공간에 위치한 두 사람이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도록, 즉 '두 사람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전달한다. 여기서 '연결'은 두 가지 의미로 1) 시점숏에 따른 관객과의 시선 공유 2) 몽타주가 주는 지속성을 가진다. 또한, 이 시퀀스에서 감독이 '딸이 자는 모습을 바라보는 엄마의 얼굴'을 담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단순하게 신파적인 감정을 유발하지 않기 위함을 수 있으나, 감독 스스로가 '모녀의 이상적인 관계'를 관찰하는 카메라(관객의 입장에서 전지적 시점)를 배제한다는 점과 사라와 스텔가 '함께한다'는 동일시의 부정을 가진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2.

사라가 유럽우주국 '프록시마' 프로젝트의 대원으로 선발되는 행사에서 딸 스텔라는 지루한지 혼자서 우주 전시장을 돌아다닌다. 우주선은 무엇인지, 지구 밖에서 우주선은 어떻게 도킹(결합)하는지, 달은 어떤 곳인지 등을 소개하는 기계음이 보이스오버로 들리는 전시장에서 스텔라가 마주하는 건 거대한 우주선 모형과 로켓이 우주로 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대한 화면이다. 이때 스텔라의 얼굴은 무표정이다. 스텔라의 시선에서 보여지는 전시장에 모든 것은 거대하고 이질적이다. 이 어린아이가 느끼는 우주 그리고 우주로 향하고자 하는 엄마의 꿈은 이해할 수 없는 세계, 호기심을 유발하지 않는 무감각한 세계다. 이 장면을 통해서 스텔라가 엄마를 바라보는 시선 안에는 어떤 감정이 자리하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스텔라에게 사라의 세계는 엄마의 세계 이전에 어른의 세계이면서 타인의 세계이다. 스텔라에게 사라는 자신의 엄마이지만, 엄마의 꿈은 자신과 마치 지구와 달처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맴돌고 있을 뿐, 가까워질 수 없는 것에 불과하다.

 

ⓒ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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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위노코는 이처럼 '딸의 시선'을 통해서 사라의 꿈을 조망한다. 관객인 우린 분명 감독의 눈으로 사라를 보고 있지만, 언제부터인가 '스텔라의 눈'을 통해서 사라를 관찰하게 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스텔라의 감정을 유추하게 된다. 슬픔일까? 불안감일까? 이러한 스텔라가 가지는 알 수 없는 감정의 출처가 관객과 공유되어진 상태에서, 사라는 카자흐스탄에 있는 훈련시설로 떠난다. 이때, 사라는 훈련장에서 제공된 액션캠을 든다. 그녀는 자신의 방을 찍고, 훈련장 주변을 조깅하는 순간에도 목에 걸어 두고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을 촬영한다. 스텔라의 시선에 이어 사라의 시선이 관객의 시선으로 들어오는 순간이다. <프록시마 프로젝트>는 세 가지 시선을 가진다. 감독, 스텔라, 사라. 이들의 시선들은 '몽타주의 조직자'인 감독에 의해 관객인 우리의 시선 안에 머문다. 이 조직은 각기 다른 공간 안에 있는 인물들을 연결 짓기 위한 수단으로, 앞서 언급한 '지속성'에 해당한다.

<프록시마 프로젝트>가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딸과 이별한 엄마의 모습인가. 엄마와 이별한 딸의 모습인가. 단편적으로 구분되지 않는 건 영화의 몽타주가 빗어낸 교란 탓이다. 극 중 류이치 사카모토 특유의 소리가 울리는 듯한 음악이 깔리면서 사라와 스텔라가 통화를 하는 소리가 보이스오버로 들릴 때, 스크린에서 비추는 것은 사라가 VR 헤드셋으로 보고 있는 가상의 우주 공간이다. 마치 우주에서 딸과 통화를 하는 모습처럼 비추어진다. 그런데 이 사라의 푸티지로 조직된 몽타주는 이상하게도 스텔라의 시선 안에서 머물러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몽타주를 보는 주체는 누구지?"하는 의심을 곧장 촉발시킨다. 이러한 몽타주는 사라의 훈련과정을 그리는 영화 중반 곳곳에 배치되어져 있다. 사라가 일기를 쓰는 행위에서 곧장 사라의 목에 걸린 액션캠의 시선으로 이어지고, 다시 감독의 시선에서 액션캠을 차고 러닝을 하는 모습으로 컷이 바뀔 때, 보이스오버로 사라의 목소리(그녀가 쓴 일기)가 들리면서 후에 그녀가 쓴 일기를 읽는 스텔라의 모습으로 다시 컷이 바뀌는 순간의 경우에도, 이 일련의 과정들이 '스텔라가 관찰하고 있다'라는 느낌을 계속해서 의식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이 전복되는 순간은 (스텔라를 돌보는 남편으로 유추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적 시선으로 보여지는 스텔라의 모습이 스크린에 비치어질 때다. 이 투박한 질감의 푸티지는 잠시 머물다가 사라가 편지를 쓰는 장면에 이어 힘든 훈련을 버티는 순간들로 진행된다. 다시 류이치 사카모토의 울리는 듯한 느낌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사라의 독백이 보이스오버로 들린다. 이후에 아무도 없는 놀이터의 영상과 함께 사라와 스텔라의 통화가 보이스오버로 들리는 몽타주가 등장하는데, 이 두 개의 영상의 주체 또한 오로지 관객의 시선 안에서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확연히 느낀다. 이때 관객인 우린 '누군가 함께'(적어도 스텔라는 아닌) 스텔라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느끼게 된다. 그러다 보니 영화는 시점숏의 사용에도 시선의 주체와 관객과 완벽한 동일시를 이루지 않으면서도, 관객이 스크린에 통해서 관음증적인 시선으로 볼 수 없는 착란을 일으킨다.

 

ⓒ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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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앨리스 위노코는 노골적으로 '사라의 나체'를 보여준다. 사라가 옷을 갈아입거나 씻는 모습에서 사라의 벌거벗은 몸은 꼭 관객에게 보여줘야 했을까. 이 의문은 마치 시험대에 올려진 것처럼 장면의 불필요성에 대한 근거를 찾고자 요구한다. 그리고 이 요구되어짐은 감독이 의도한 착란에 따른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관객은 자신이 에로틱한 시선의 능동적인 권력자임을 스스로 박탈한다. 관객인 우린 '사라'를 어떤 인물로 보고 있는가. 스텔라의 엄마? 별거 중인 아내? 배우 애바 그린이 연기하는 캐릭터? 이런 물음은 어떨까. 우리의 시선이 극 속 어떤 인물의 시선과 동일시하여 사라를 보고 있는가. "굳이 사라의 벗은 몸을 볼 필요가 있을까?"라는 물음은 관객 스스로 생각한 것인지, 관객이 감독 혹은 스텔라와 동일시하여 생각한 것인지 구분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 구분이 정확히 이뤄지지 않더라도, 우린 사라의 벗은 몸을 볼 때, 분명 불편하다는 감정보다 보여진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라는 판단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록시마 프로젝트>는 <아폴로13>(1995, 감독 론 하워드)의 경로(영웅적인 서사)를 따르지 않으면서도, 육아의 일상을 다룬 <툴리>(2018, 감독 제이슨 라이트만)나 <82년생 김지영>(2019,  감독 김도영)의 길을 가지도 않는다. 앨리스 위노코는 "우주비행사 사라에게 어떤 시선을 내어줘야 할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 듯하다. 전작 <매릴랜드>(2015)에서 아프가니스탄 전투에 참전한 뒤부터 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에 시달리는 한 군인의 시선을 통해서 불안정한 내면의 세계를 스크린에 투영하고자 했던 위노코는 이번 작품 또한 시점숏을 적극적으로 사용해 '인물의 시선'을 카메라에 담는다. 위노코는 관객에게 인물의 시선을 건넨다는 것보다는 시선을 공유함으로써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참여를 바란 듯하다. 사라를 보는 시선에 있어서 독립적인 주체로 바라볼 수 있도록 영화는 부단히 노력한다. 이는 사라의 정체성을 구현해내는 방식에 있어서, 플래시백을 통해서 순수했던 어릴 적의 모습이나 남편과 헤어지게 된 모습, 더 나아가 스텔라가 아기였던 모습까지 관객에게 보여주지 않는 태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영화는 결말에 이르러 사라와 스텔라는 스스로 자신들의 시선의 끝에 다다른다. 우주로 가기 하루 전 사라는 감염의 위험으로부터 격리 중이다. 그러나 딸과 함께 로켓을 보고자 했던 약속이 마음에 걸린다. 딸을 영영 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딸에게 약속조차 지키지 못하는 엄마로 남기 싫어서일까. 늦은 밤 격리시설을 몰래 빠져나와 딸과 함께 자신이 타고 갈 로켓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이 순간 사라의 시선과 딸의 시선은 같은 곳을 바라본다. 영화가 펼쳐낸 가장 마법적인 순간이다. 그렇게 사라는 우주로 향하고, 스텔라는 아빠와 함께 엄마가 떠나는 순간을 바라본다. 아직 사라의 시선은 끝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여러 말들이 초원을 달리고 있다. 사라는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달리는 말들을 유심히 바라본다. 그리고 영화 처음 사라가 밤하늘을 바라본 순간과 똑같이 그녀의 시선은 위로 향한다. 옅은 미소와 함께. 이제는 알 수 있다. 그녀의 시선이 우주로 향하는 엄마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스텔라의 우주는 엄마인 것이다.

 

ⓒ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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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록시마 프로젝트>는 사라와 스텔라를 온전히 관객의 시선 안에 놓지 않는다. 어떤 순간은 스텔라의 시선 위에 놓여 있고, 어떤 순간은 사라의 시선 안에서 자리하며, 또 어떤 순간은 감독의 시선 안에서 관객의 시선이 머금는다. 하지만 이 시선들은 점과 점을 이은 선분처럼 사라와 스텔라를 잇고, 감독의 눈으로 향하다가도, 관객의 시선에 맡겨지기도 한다. 이처럼 끊임없이 이어진 선들은 영화의 호흡과 관객의 호흡으로 교차하며 끊임없이 이어지기를 반복한다. 이윽고 관객의 응시에는 스텔라가 혼자서 잘 지내는 모습을 볼 때, '사라와 함께 보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면서도, 사라가 힘든 훈련을 잘 극복하는 모습을 볼 때, 또한 '스텔라와 함께 보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진다. 동떨어진 두 사람을 연결하고자 하는 것은 몽타주를 조직한 감독이 아닌 관객인 우리가 아닐까. 우린 사라와 스텔라의 이미지를 다시 재조립하여 두 사람을 잇는다. 영화와 관객이 만든 이 선분이 우주로 떠난 사라와 엄마를 떠난 스텔라를 이으면서, 두 사람의 삶이 결코 끊어지지 않기를 희망한다.

영화 <프록시마 프로젝트>의 원제인 '프록시마'는 태양계에서 가장 가까운 항성이다. 앨리스 위노코는 영화의 제목을 '프록시마'로 지은 것에 대해 "극히 작은 것과 엄청나게 큰 것, 가까운 것과 먼 것, 친밀한 것과 우주적인 것 사이의 대조를 주고자 했다"고 말한다. 스텔라와 사라, 두 세계의 대조. 스텔라가 거대한 우주전시장에서 무감각했던 순간이 어느새 자신의 엄마가 향할 세계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영화는 서로 다른 세계에 위치하면서도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사실을 통해서 성장하는 두 여성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려내는 작품이다.

 

P.S. 사라가 열심히 런닝머신을 뛰는 모습이나 무거운 기계를 장착한 더딘 몸짓은 '버틴다'라기 보단 '적응'을 향한 운동이미지로 다가온다. 중력을 버티는 훈련 속에서도 사라는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단련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 우주비행사이면서도 스텔라의 엄마가 되기 위한 현재(사회가 정한 여성이라는 존재)를 이겨내기 위한 것처럼 느껴진다.

 

ⓒ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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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오세준, yey12345@ccoart.com]

오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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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아르》 영화전문기자 및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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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동 2020-10-29 12:27:24
마지막 장면을 보고 싶어지네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