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양] '타이페이 스토리' 관계의 풍경화
[에드워드 양] '타이페이 스토리' 관계의 풍경화
  • 오세준
  • 승인 2020.10.0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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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양'의 타이페이 3부작
ⓒ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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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드워드 양의 타이페이 3부작에 대한 글을 쓸 때, 가지는 곤란함 내지는 강력한 압박이 있다. 이를테면 '대만 뉴 웨이브의 배경과 경향'이나 동시대 시네아스트였던 허우 샤우시엔이나 왕 퉁의 작품들과의 연관성, 결은 다르지만 90년대에 등장한 '이안'과 '차이밍량'의 초기 작품들 속 변화 등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의무에 대한 강박이다.(물론, 이 고민은 에드워드 양뿐만 아니라 '대만 뉴 웨이브'의 속한 감독들에 대한 작품들을 쓸 때, 숙고되어지는 부분일 것이다)

심지어 80년대 아시아 영화의 흐름 속에서 당시 대만영화가 가지는 미학을 고찰해보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1983년 영화비평가이자 영화학자인 '페기 차오'와 대만의 젊은 감독과 비평가가 함께 발표한 '창조력, 예술경향, 문화자각을 갖는 영화를 체창한다'는 선언문에서 시작해야 할지, 아니 그 이전에 신랑차오 운동의 출발을 알린 두 편의 옴니버스 영화 <광음고적사>(1982), <샌드위치 맨>(1983)부터 시작해야 할지. 혹은 (대만영화의 위기 속에서) 이 같은 대만 뉴웨이브가 중국의 외교정책에 의해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대만의 외부적 상황과 장제스 총통 사망 이후 개발독재, 철권통지의 그림자가 드리운 사회적 불안의 내부적 상황 속에서 무엇을 극복하고자 했는지.

그러나 앞서 언급한 질문들이 어쩌면 단순한 (대만의) 영화사적 고증에 불과하다면, 다른 질문도 던저볼 수 있을 것이다. 에드워드 양의 <해탄적일천>, <타이페이 스토리>나 <공포분자>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작품들(소외 3부작이나 <확대>)을 연상케 하면서도(정작 에드워드 양은 자신의 작품에서 서구 모더니즘에 대한 영향을 읽는 것은 편협한 사고라 말한 바 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경우, 동시대가 아닌 1960년대라는 시간을 택하면서 전작들과는 다른 경향을 보인 점, 이것이 대만의 역사를 기록하고자 하는 허우 샤우시엔의 스타일과 결은 다르지만 같은 맥락을 함께 한다는 점에서 그 차이에 대한 물음을 던져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에드워드 양은 이후 <독립시대>와 <마작>을 통해서 다시 도시인들의 관계를 작품 안에 투영하는데, 이러한 에드워드 양이 가지는 도시인들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반복적으로 작품들 속에서 어떠한 차이를 끌어내고자 하는지 다시 또 질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시네마테크나 각종 영화제에서 대만 뉴 웨이브 감독들의 회고전이 열리거나 그들의 작품들이 뒤늦게 정식 개봉을 할 때면, 공교롭게도 <나의 소녀시대>, <나의 청춘은 너의 것>, <장난스런 키스>, <청설>, <안녕, 나의 소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말할 수 없는 비밀> 등 '최근 5년간 대만영화라 불릴 작품들'(청춘‧멜로‧로맨스‧코미디‧드라마)과 함께 박스오피스에 올라가 있는 모습, 또 넷플릭스나 왓챠 등의 OTT 플랫폼에 함께 묶여 소개가 되어 지는 흐름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느낌을 주면서도, 뉴 웨이브 감독들의 그늘에 가려져 단절됐던 과거 대만영화의 멜로드라마 전통이 지금에 이르러 관객들을 이끄는 데 큰 힘(흥행)을 발휘하는 데 있어서 마치 주객전도가 된 것 같은 묘한 기분을 전달한다. 즉, '대만 뉴 웨이브'라는 작품들이 현재의 대만영화들과 극장 안에서 궤를 같이할 때, 대만영화의 동시대성에 대한 고민도 해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필자의 질문들은 마치 무엇이 떨어질지 친절히 알려주는 테트리스 게임 속 블록들과 같은데, 아이러니하게도 빠르게 떨어지는 블록들을 쌓는 데 급급한 탓에 정작 블록을 지워야 하는 목적(작품에 대한 온전한 분석)을 망각해버리는 일을 자초하기도 한다. 결국, 작품 안에서 시대적인 흔적들을 찾아야 하는 행위에 대한 의무감은 어떤 의미로 자리해야 하는지, 이 같은 고민이 어쩌면 영화를 기록하는 자에게 있어서 느슨한 태도에 대한 방증인 것인지, 구태여 과거에 정리된 영화평론가나 학자들의 글을 들추어 작품의 글에 반영을 해야 하는지. 이러한 내적 갈등이라 불릴 질문들에서 벗어나 글을 써보는 것이 지난해 <타이페이 스토리>에 이어 올해 <공포분자>가 나란히 개봉함에 따라 시도해 볼 만한 작업으로, 작품 안에서 에드워드 양이 지속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타이페이'란 도시를 어떤 식으로 정의해 볼 수 있는지 나름의 답을 찾고자 한다.

 

ⓒ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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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도시를 위한 영화들이 있다. 뉴욕에 사는 이탈리아 이주민들의 생활상을 그려낸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 <뉴욕 뉴욕>, <좋은 친구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또 <애니 홀>, <맨하탄>, <한나와 그 자매들>부터 최근작 <레이니 데이 인 뉴욕>까지 우디 앨런의 낭만적인 뉴욕의 풍경도 빼놓을 수 없다. 여기에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미드나잇 인 파리>, <로마 위드 러브>, <매직 인 더 문라이트>에서 그가 보여준 유럽의 다양한 도시들은 어떠한가. 아차! <중경삼림>과 <아비정전>이 보여준 왕가위의 홍콩이 빠지면 섭하다.

그렇다면 에드워드 양의 '타이페이 3부작'은 어떨까. 그의 작품들은 타이페이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유난히 인색하다. 오히려 차이밍량의 <애정만세>가 타이페이의 전통적인 공간과 서구화된 공간을 균형있게 담는다. 에드워드 양의 타이페이 3부작에서 '타이페이'는 '지정학적 토대'로 쓰이기보단 단순히 '무대'라는 미장센으로의 쓰임에 가깝다. 다시 말해서 '타이페이'는 '대만의 수도'보다는 '당시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인 아시아 대부분 나라들의 도시의 총체성', 즉 후기 자본주의 도시화의 표본 정도로 받아들여진다.

그렇기에 에드워드 양의 작품들에서 느낄 수 없는 것은 현실의 공간과 영화적 공간 사이에 존재하는 일정한 간극이다. 느낄 수 없다는 말보다는 어쩌면 고려될 리 없다는 말에 더 가깝다. 이 말은 관객인 우리가 영화 속에 재현된 도시가 현실의 도시보다 더욱 실재적으로 느껴지는 착각에 빠질 일이 없다는 것이다. 에드워드 양에게 타이페이는 도시라는 공간의 의미보다는 '타이페이의 사는 도시인들의 정체성'으로 그 의미가 해석되어 진다.

그러다 보니 에드워드 양의 영화 속 공간은 주로 인물들의 안온한 공간에 기댄다. 집에서 나와서 혼자 살 집을 둘러보며 시작하는 <타이페이 스토리>나 주인공들이 집에서 아침을 맞이하며 시작하는 <공포분자>, 타이베이에서 살아가는 가족의 모습을 온전하게 그린 <하나 그리고 둘>이 그 예다. 인물들의 공간은 타이페이의 흔적을 가지고 있기보단 타이페이인이라는 국적을 가진 인물들이 도시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 그 공간 안에 채워지도록 그려진다. 인물들의 변화에 대한 징후를 포착할 수 있는 곳도 그들의 '집'이다.

 

3.

에드워드 양의 작품에서 '집'은 인물들의 삶의 모습을 통한 보편성을 담는 공간이면서, 방황하는 인물들의 감정으로 채워지는 공간이다. <타이페이 스토리>는 에드워드 양의 초기작이면서도 이후의 작품들의 원형이 되는 작품으로 타이페이라는 도시의 자장 안에서 가족, 부부나 연인, 친구 등 그들의 삶이 도시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 출발점은 '아룽'과 '수첸'의 관계에서부터 시작한다.

아룽과 수첸은 더는 친구가 아니다. 연인이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들은 어린 시절 남녀라는 의식 없이 서로 친하게 지냈던 친구이지만, 이제는 남녀라는 의식 속에서 연인이라는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여러 번 기억을 되짚어봐도 서로에게 "사랑해"라는 한 마디 건넨 적이 없다. 두 사람의 거리는 그렇게 모호하다. 수첸이 사진 공간을 자유로이 드나드는 아룽의 태도에는 사랑보다는 익숙함이 자리하고, 아룽만 마냥 바라보는 수첸의 태도에는 외로움과 쓸쓸함이 교차한다.

이러한 필자의 생각이 단순한 감상의 결과가 아니다. 에드워드 양의 카메라가 두 사람의 거리를 그렇게 규정한다. 그의 카메라는 '거리두기'라는 명령을 토대로 아룽과 수첸의 가깝지 않은 거리를 유지하도록 수행해낸다.

예를 들면 영화 처음 수첸이 이사하는 방을 구경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같은 공간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두 사람을 담는 컷과 컷은 다른 공간에 머무는 것과 같은 거리감을 만들어낸다. 또 회사 앞에서 수첸이 6차선 정도의 큰길 넘어 에 있는 아룽에게 다가가는 장면에선 빠르게 지나가는 차들 때문에 길을 건너기가 쉽지 않은 수첸의 모습을 길게 잡는 카메라는 '가까워질 수 없는 두 사람의 거리'를 꽤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컷과 컷의 연결은 수첸과 아룽이 한 공간 안에 있다고 보여주면서도 그들의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을 표현해낸다.

 

ⓒ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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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아룽과 수첸의 관계에 있어서 '연인'이라는 설정만을 차용할 뿐, 멜로나 로맨스라는 장르로 빠지지 않으면서 나름의 이야기를 축적해 나아간다. 아룽의 시간은 과거 자신이 야구선수로 지냈던 경기장, 자신과 친했던 친구의 집, 수첸의 가족이 사는 집 그리고 가족 모두가 미국으로 떠나고 남은 옛집 안에 채워진다. 이와 반대로 수첸의 시간은 집을 떠나 새로 이사한 집에서 주로 채워지면서 아룽의 빈자리와 직장에서 해고된 자리 대신에 도시에서 정처 없이 떠도는 공간들 안을 채운다.

수첸은 직장동료에게, 아룽은 옛연인에게 마음이 흔들리면서도 어느샌가 한 집에 어우러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볼 때면, 도대체 이 두 사람은 무엇을 욕망하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재밌게도 그들의 궤적은 마땅한 방향으로 흘러간 것처럼 흔적을 스크린 위에 찍어내 보이지만, 동생의 친구들과 클럽에서 한창 놀다가 잠깐 불이 꺼진 순간에 잠이 들어있는 수첸의 모습이나 수첸의 아버지와 친한 친구의 어려운 상황을 돕는 일이 올바른 행위(가족주의적)라 믿었던 아룽이 정작 자신의 가족들이 자신을 믿지 못하는 상황을 맞이하는 순간은 두 사람이 기어코 다시 마주할 수밖에 없는 관계임을 확인하게 된다.

아룽과 수첸은 서로 밀어내면서도, 또 둘의 힘이 다른 방향을 향해 가면서도 서로 맞물리며 돌아가는 톱니바퀴와 같다. 이렇게 두 사람의 몸짓은 계속해서 도시 안을 돌고 도는 이유에 있어서 욕망을 분출하기 위함보다는 되려 욕망을 찾거나 기다리는 것처럼 비추어진다. 가족에서, 회사에서, 젊음에서 점점 멀어지는 수첸은 도시 안을 표류하고, 아룽은 미국에서 타이페이로, 자신의 가족에서 주변인들의 가족 안으로, 자신이 야구선수였던 과거 안으로 깊숙이 파고든다. 이러한 두 인물들의 모습은 친구에서 연인이 된 상황의 불안정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연인에서 결혼으로 가는 과정의 불확실함에 대한 근거를 마련해낸다.

영화 끝에 아룽은 수첸의 집에 들려 대화를 나눈다. 그때, 아룽이 켠 불빛을 수첸이 다시 끈다. 그리고 말한다. 결혼하자고. 아룽은 결혼은 '잠깐의 희망', '모든 걸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일종의 환상'이라고 답변한다. 그러면서 미국에 있는 매형이 자신이 부족해서 도움이 안 된다고 했다며, 미국으로 가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말한다. 이에 수첸은 "왜 말 안 했어?"라는 말을 하는데, 이때 아룽은 "아직도 나를 그렇게 몰라?"라고 되려 묻는다. 빛이 없는 캄캄한 방 안에서 두 사람은 마주하면서도 마주하고 있지 않다. 빛이 채워질 자리에 두 사람의 공허한 관계가 대신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확인하는 시간에도 여전히 두 사람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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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진저리가 난다", 아룽과 수첸 중 하나는 분명 이런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 되돌아오지 않을 과거를 찾겠다며, 아니 자신의 소신(아룽이 직접 언급한 '정의감 표출')이라며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 안에서 계속 맴도는 아룽의 모습이나 그 변화로 직장에서 해고됐지만, 그 변화로 다시금 직장을 가지게 된 수첸의 모습에서 마냥 시간을 죽이고 있었던 순간들이 진절머리가 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이페이 스토리>에서 느껴지는 권태로움은 오로지 아룽과 수첸의 사이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아룽과 타이페이, 수첸과 타이페이 더 나아가 타이페이와 테이페이인들의 관계를 규정짓는 것까지 확장되어 진다.

"(...) 그러다가 우리는 문득, 우리가 또다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반시간이 지났다. 그렇게 시간 죽이기는 계속된다." 영화를 보면서 문득 하이데거의 이 문장이 떠올랐다.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른 채 마냥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은 아룽과 수첸뿐만 아니라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이 그러하다. 이들의 관계라는 것은 직장동료이면서도 애인이 될 수 있고, 친구이면서도 연인이며, 가족이면서도 남이 되는 불안정한 것으로, 이들은 타이페이라는 도시 안에 내던져진 존재들이다. 자신의 선택과 결단만이 자신들의 존재 의미를 되찾을 수 있지만, 타이페이의 시간에 흐름에 몸을 맡기고, 공간에 따라서 일괄적인 자세를 보인다.

캄캄한 밤 수첸을 쫓아다니던 젊은 남성으로부터 칼에 찔린 아룽은 아침이 돼서야 응급차에 실린다. 그는 죽었을까. 이어 수첸은 직장을 새로 얻었는데도 창문에 비친 자신의 존재만을 응시할 뿐 왜 기뻐하지 않는다. 그렇게 창문 밖을 보며 아룽을 두고 "그 사람은 아직 결정을 못 내렸어요"라고 말한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

수첸의 직장을 새로 얻은 상황과 아룽이 생과 사를 오가는 상황은 다르면서도 같다. 수첸은 그렇게 또 직장을 잃을 수 있는 것이고, 아룽이 다행히 살아난다고 한들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 모르는 일이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관계도, 감정도, 인생도 선택하지 않는 존재다. 진정한 자신으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자신들이 박탈한다. 여전히 도시 안은 달리는 차들과 젊음의 활기가 넘쳐나고, 화려한 도시의 불빛은 밤하늘을 밝히지만, 그것은 그 순간 아주 잠깐 허락된 쉼표일 뿐, 아이들과 남편을 버리고 말 한마디 없이 무정하게 떠난 아룽의 친구의 아내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삶도 어느 순간 상실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에드워드 양은 보여주려는 듯하다. 그것이 <타이페이 스토리>의 도시가 보여준 권태로움이다.

<타이페이 스토리>는 관계의 사슬이 변화의 진통으로 끊어지고 느슨해지면서 다시 또 좁혀지는 거리감을 밀도있게 그린다. 이후 그의 작품들 속에서 더욱더 복잡해지는 것은 사건의 미로성이나 내러티브가 아닌 복합적인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인물들의 관계성이다. 이어 이러한 관계성은 어떤 식으로 누구와 관련을 가지는지 영화 속 주인공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외적인 세계에 위치한 관객들에게까지 답이 요구되어 진다. 그것이 인물들의 감정들이 넘실거리는 스크린 안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청거리는 인과관계 탓에 에드워드 양의 작품들이 지니는 기질은 여전히 다각적으로 해석이 요구되어지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에드워드 양의 도시가 지금의 시대에도 유효한 것은 그가 보여준 도시인들의 삶이 불확실성의 세계 안에서 계속해서 헤매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기에 퍼즐처럼 조각 난 (에드워드 양이 보여준) 도시의 이미지를 계속해서 맞추고 싶어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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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오세준, yey12345@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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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아르》 영화전문기자 및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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