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친 여자' 도망친 건 누구지?
'도망친 여자' 도망친 건 누구지?
  • 배명현
  • 승인 2020.09.23 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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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주) 영화제작전원사, 콘텐츠판다
ⓒ 영화제작전원사

'감희'(김민희)는 계속해서 이동한다. 사건의 중심은 다른 곳에 있는데 감희는 그곳에 안착하지 못하고 주변을 맴돈다. 하지만 이 움직임을 포착하려는 순간 카메라는 곧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고 마치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의뭉스런 표정을 짓는다. 마치 모종의 거부반응을 보이듯 과장되며 반복되는 대사로 타인의 침입을 거부하려하지만 결국엔 그 침입을 허락하는 듯하더니 영화는 끝나버린다. 그렇다면 도망친 여자는 감희인가.

다시 생각해보자. 도망친 여자는 진정 감희인가. 어쩌면 이 이야기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자 모두가 도망쳤기 때문이다. 감독 홍상수가 이야기 했듯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두가 어디론가 도망치고 있다.

홍상수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영화 제목의 도망친 여자는 결국 누구고,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냐"라는 질문에 "(제목의 의미를) 결정할 수도 있었지만 결정하기 직전 그만뒀다"며 "사실 이 영화의 모든 여성이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있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어보자. 이들은 어디로 도망치고 있는가. 사전에서 도망을 검색해 보면 본래의 그 의미가 등장한다. 명사: 피하거나 쫓기어 달아남. 이상하다. 인물들을 위협하는 요소는 어렴풋하게 등장이라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가고자하는 약속의 땅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 목적지가 사라져 버린 움직임은 이들의 도망을 우습게 만든다. 이 조소를 지지부진한 말들과 먹을 것들, 세속적 욕망과 함께 추락해버린 일상, 혹은 경제적 부유 속에서 잃어버린 사랑을 통해 보여준다. 동시에 이것들은 인물들 사이를 연결해주는 관계의 고리이기도 하다. 대화에 의미는 없지만 그 대화 자체가 매개로 존재하고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지른 테이블 위에 사과가 올라와 있고 파스타가 있다. 반면 고양이남과 젊은 시인 사이엔 그것이 없다.

 

사진ⓒ (주) 영화제작전원사, 콘텐츠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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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홍상수 작업의 특징인 반복과 전이를 환기해보자. 홍상수식 대화와 화법, 도저히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 듯한 반복되는 그 화법은 여전히 기능한다. 그리고 심지어 그것이 기능하는 순간을 바라보는 관객을 웃게 만든다. 하지만 그의 특징적인 대화의 매개물. 바로 술이 빠졌다. 물론 막걸리(와인으로 보이는 것도.)가 등장하긴 한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말인가. 잔뜩 취해 고성이 오가는 와중에, 인물들 내면 깊숙한 곳에서 분출되어 나오는 ‘그것’이 없다. 홍상수는 바뀌었다. 분명히 바뀌었다. 이제는 다른 곳에 그것을 두고 영화 밖으로 빠져나온 것 같다.

마치 영화 후반에 나오는 바다를 담는 스크린 그리고 그 스크린 위를 찍는 카메라와 같다. 생각해보자. 영화는 사물을 찍어 상영한다. 하지만 그 사물이 실체가 아닌 것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마치 플라톤의 동굴 속 그림자와 같이 허상을 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제 시작된다. 영화를 보는 이들은 이것이 거짓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거짓임을 알고도 그 허상을, 그 스크린 위를 영화는 담는다. 그것도 두 번이나 말이다. 감희는 어딘가로 도망가려 하지만 그곳은 실제하는 바다가 아닌 허구이고 도망친 곳에서 만나는 사람은 전 남자친구의 부인이 되어버린 옛 친구이다. 이 불편한 만남은 전 남자친구와 재회하며 연속되고 그녀는 영화관을 나오기보단 다시 영화관 안으로 들어가 기꺼이 스크린 위 바다를 바라본다.

아마 다른 인물들도 그렇지 않을까. 도망친 곳에서 만난 것은 기쁨의 무엇이 아닌 예기치 못한 불쾌일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든다. 이 불편한 마주함은 영화가 끝나도 계속 이어질 것 같다. 도망치려 하지만 도망칠 수 없고 간절함을 가지고 도망쳐봤자 그곳은 약속의 땅이 아닌 새로운 악연이 점철된 땅일 뿐이다. 이번 영화는 그의 반복과 변주가 유독 잔인하게 보인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사진ⓒ (주) 영화제작전원사, 콘텐츠판다
ⓒ 영화제작전원사

도망친 여자
The Woman Who Ran
감독
홍상수
Hong Sang soo

 

출연
김민희
서영화
송선미
김새벽
권해효

 

제작|배급 영화제작전원사
제작연도 2019
상영시간 77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개봉 2020.09.17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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