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양] '공포분자' 도시 속 위험한 사람들
[에드워드 양] '공포분자' 도시 속 위험한 사람들
  • 오세준
  • 승인 2020.09.1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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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양'의 타이페이 3부작
사진 ⓒ ㈜에이썸 픽쳐스
사진 ⓒ ㈜에이썸 픽쳐스

영화 속의 타이페이, 어떻게 읽을 것인가. 에드워드 양의 눈(카메라)은 적어도 <공포분자> 안에서 타이페이라는 도시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또 어떻게 담고 있는가. 이러한 물음은 영화를 본 후에 남는 잔상, 즉, 타이페이의 전경이 아닌 그 안에 살고 있는 인물들의 불안에서 비롯된 의아함으로, 타이페이라는 도시의 그림이 뚜렷하게 그려지지 않는 어려움에 비롯된다. 에드워드 양은 부감으로 타이페이의 전경을 담았던 전작인 <타이페이 스토리>(1985)와 달리 파편화된 이미지들의 연속과 중첩에 따른 몽타주로 타이페이의 내외를 해부한다. 그러면서도 영화는 분열된 형태로 해체되지 않는다. 오히려 집약적으로 결속되어진다.

<공포분자>는 도시에 내장된 위기, 취약하고 위태로운 도적‧윤리 체계, 병태적인 인간관계를 에드워드 양 특유의 지성적인 카메라언어로 비판적 리얼리즘을 강하게 반영된 작품이다. 이러한 <공포분자>를 보는 경험은 '감독의 카메라'라는 메스가 타이페이를 해부하는 동시에 '관객의 눈'(시선과 응시)으로 봉합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의문이 생긴다. 필자에 머릿속에 남아 있는 잔상들은 '봉합하는 과정'에서 도출된 일종의 왜곡된 형상은 아닌지. 어쩌면 이는 현실의 공간과 영화적 공간 사이에 존재한 간극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지. 이 글은 필자의 머릿속에 자리한 '봉합된 형태의 잔상들'을 다시 해부하는 과정으로, 앞서 던진 몇 가지 의문들에 답변을 찾기 위한 나름의 답을 찾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다.

 

도시의 모습, 분열된 타자

해가 뜨기 전, 새벽 도로를 달리는 경찰차, 도시를 깨우는 사이렌 소리. 잠 못 이룬 남성(사진사)와 그의 여자친구. 어느 골목 한 남성의 시체. 출근을 준비하는 남편(의사)와 재집필로 고민에 빠진 아내(작가). 어느 건물의 도박장. 그 곳을 주시하는 경찰과 몰래 도망치기 위해 발코니에서 뛰어내린 두 남녀. 곧장 체포되는 남성과 절뚝거리며 큰길로 빠져나온 여성(혼혈소녀). 텅 빈 도박장을 급습하는 진압부대. 총소리, 창문 깨지는 소리, 한 여성의 놀라는 소리, 빈 깡통이 나뒹구는 소리.

<공포분자>는 시작부터 불균질한 컷들의 조합으로 도시의 불안한 증후들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방식은 영화 속 인물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사진사'-'혼혈소녀'-'의사'-'작가'(이 글에서 인물을 이름이 아닌 직업으로 구분한다), 네 명의 주인공들은 타이페이에 살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분명 무관한 관계다. 그러나 에드워드 양은 관객에게 주인공들이 서로가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게 하려는 듯 인물들이 담긴 숏을 지속해서 연결한다.

이를테면, 사진사와의 이별로 충격을 받은 그의 여자친구가 응급차에 실려 가는 장면에서 보이스오버로 "수면제 한 통을 다 먹었어요"라는 혼혈소녀의 말이 들린다. 이어 장난전화를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으로 넘어간다. (이때 혼혈소녀의 모습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보이스오버의 목소리는 쓰러진 여자친구의 목소리로 느껴진다) 분명 두 여성은 서로 모르는 사이다.

하지만 사진사가 여자친구와 헤어진 이유는 발코니에서 뛰어내리는 혼혈소녀의 모습에 매료되어 그녀를 찾기 떠났기 때문. 정작 사진사는 혼혈소녀를 만난 적이 없고,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 이 같은 아이러니함은 <공포분자>의 영화적 형식, 즉 에드워드 양의 의도적인 몽타주가 빚어낸 환상이 전달하는 감정이다.

 

사진 ⓒ ㈜에이썸 픽쳐스
사진 ⓒ ㈜에이썸 픽쳐스

그러나 이 환상은 온전히 '관객의 것'만은 아니다. <공포분자> 속 주인공들은 환상을 현실로 믿고 싶은 욕망이 들끓는 존재들이다. 집에서 도망치고 싶은 혼혈소녀, 남편과 헤어지고 싶은 작가, 사진 속 여성을 만나고 싶은 사진사, 진급을 해야 하는 의사, 이들의 이러한 욕망은 타이페이라는 도시 안에서 발생한 우연이라는 인과율에서 벗어난 근거를 기회로 삼아 실현해 낸다. 여기서 이들의 선택은 자신들의 환상을 위해서 우연을 근거로 삼는 '자발적인 오인'으로 볼 수 있다. 즉, 이들은 오로지 자신의 환상을 현실로 끌어오기 위해서 스스로 오인하도록 방치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에는 도덕적‧윤리적 가치의 결핍, 자기중심적인 태도로 폭력화에 취약해지는 면모를 가진다.

여기서 필자가 '우연'이라 부르는 것은 에드워드 양의 의도된 설정값(사건의 발화점)을 뜻하면서도, 인구가 밀집한 도시 안에서의 긴밀한 연결에 따른 것을 뜻하기도 한다. <공포분자> 속에 인물들은 가족, 부부나 연인과 같은 관계 속에서 소통이 어려운 상태로, 그들은 사진, 전화, TV, 신문 등의 매체를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집착한다. 영화 속 작가와 사진사가 자신들이 쓴 책이나 찍은 사진(환상의 산물들)이 진실된 것, 또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 믿는 것처럼. 이러한 점들은 영화 속에서 혼혈소녀가 장난전화를 하는 모습 대신에 전화선을 길게 찍는 장면이나, 백남준의 비디오아트가 떠오르는 수십 개의 TV 속 작가의 얼굴이 담긴 장면들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이처럼 에드워드 양 감독이 타이페이를 그리는 방식에 있어서 '인물들의 욕망'은 도시를 좀먹는 것인지, 아니면 도시가 인물들을 타락하게 만드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양가적인 시각을 제공한다. 의사가 혼혈소녀에게 복수를 하는 결말과 자살을 하는 결말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유, 또 영화의 모든 이야기가 작가의 소설일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는 이유도 에드워드 양이 어떤 의도로 도시를 그려내고자 하는지에 대한 근거로 작용할 뿐, 정작 타이페이라는 도시가 어떤 도시인지 정의를 내려야 하는 것은 관객의 몫으로 남겨진다. 결국 영화는 '불안정한 징후들'을 일관되게 채워나갈 뿐이다.

인물들의 욕망은 영화가 보여주는 어느 사거리 위에서 신호 따위 개의치 않은 듯 질주면서도, 깜빡이 없이 방향을 트는 탓에 서로 충돌하기 일쑤다. <공포분자>가 타이페이를 그려내는 방식에 있어서 주인공들은 타이페이에 사는 불특정 다수 중에 일부임을, 즉 타이페이라는 도시의 많은 인구가 함께 어우러진 공존의 영역에서 추첨이 되는 우연함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셈이다. 여기서 타이페이는 대만의 위치한 한 지역을 뜻하기 보다는 '도시'라는 것, 정확히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도시가 가지는 기질 내지는 변모한 형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에드워드 양은 풍경이 아닌 인물들의 초상으로 그려내는 것으로 자신만의 답을 내리는 것이다.

 

사진 ⓒ ㈜에이썸 픽쳐스
사진 ⓒ ㈜에이썸 픽쳐스

이는 에드워드 양 감독의 카메라가 끊임없이 공간의 내부(안)에서 내부(안)를, 내부(안)에서 외부(창문)를 조명하거나, 또 한 건물을 조명할 때, 창문 너머로 공간과 인물을 담아내는 방식에 대한 영향으로, 영화의 모든 것들이 구분되어지는 듯 보이지만, 결국에는 도시라는 하나의 공간 안에서 폐쇄적으로 이뤄져 있음을 깨닫게 한다.

물론, 에드워드 양이 단순히 도시의 전경보다는 도시 안에 갇힌 인물들의 몸짓을 보여주는 방식에서 머무는 것은 아니다. 관객인 우리가 끊임없이 분열되어 가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이 영화 속 인물들 또한 분열된 자신을 마주하는 경험을 가진다. 혼혈소녀가 사진사의 작업실에서 여러 장의 사진으로 이뤄진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이 대표적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인물들은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인지하지 못한다. 혼혈소녀가 자신이 상상했던 사랑이 아니었다고 깨달은 사진사는 신문을 통해 작가의 신작을 접하는데, 이때 그 소설이 작가의 환상으로 만들어진 산물임에도 기어코 '사실'이라고 믿는 그릇된 실수를 저지른다.

이렇듯 <공포분자> 속 인물들의 모든 인과관계는 사건을 발생시키는 근거가 상당히 모호하다. 사진사가 작가의 남편인 의사에게 아내의 소설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았다면? 혼혈소녀가 장난전화를 하지 않았다면? 또 경찰이 도박장을 급습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의미없는 가정들만이 나열될 뿐이다. 영화 안으로 접착될 수 없는 물음들. 영화는 실재하는 세계를 배경으로 삼으면서도 필연성이 결핍되어 있는, 예측할 수 없는 우연한 성질을 가진다. 그렇기에 의사에 관한 영화의 두 가지 결말은 꿈이든 현실이든 구분되어지는 것조차 세계가 결정해주지 않는 것이다.

<타이페이 스토리>에서 아룽의 죽음,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에서 밍의 죽음과 샤오쓰의 살인, 그리고 <하나 그리고 둘>에서 영어교사를 죽이는 리리의 남자친구. 에드워드 양의 세계에서 '죽음'은 두드러진 모티브다. 앞서 언급한 의사의 살인도 같은 맥락 안에 있다. 이들의 폭력성은 통제할 수 없는 시스템, 그 안에 불분명한 원인에 따른 분노에 의한 것이다.

마치 곧장 터질 듯,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가스 저장 탱크의 반복적인 장면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무언가에 대한 일종의 경고가 아닐까. 원인도 모르고 누군지도 모르는 죽음과 폭력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음을, 또 어쩌면 관객인 우리조차 자신도 모르게 폭력의 가해자 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듯. 의사는 계속해서 손을 씻고, 거울 속의 비친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확인한다. 그의 이러한 강박은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착각과 자신의 위기나 불안감을 불식시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 그조차 타인에게 또 자신에게 폭력을 자행하는 인물이었다는 것을 영화 끝에 보여주는 것이다.

 

사진 ⓒ ㈜에이썸 픽쳐스
사진 ⓒ ㈜에이썸 픽쳐스
사진 ⓒ ㈜에이썸 픽쳐스
사진 ⓒ ㈜에이썸 픽쳐스

영화 처음 우연히 마주쳤던 네 사람은 기어코 폭력적인 관계로 바뀌어 비극적인 결말을 토해낸다. 이들은 에드워드 양의 카메라를 통해서 연계를 가지게 되고, 우연에 의해 연결되며, 그렇게 관객의 눈에 '도시'라는 이미지의 형상을 만들어낸다. 앞서 언급한 '봉합된 형태'는 무엇일까. <공포분자>가 자아낸 죽음들을 보면서 박 사장을 향한 기철의 살인(기생충)과 벤을 향한 종수의 살인(버닝), 또 한에게 무자비하게 죽은 준석의 친구들(사냥의 시간)이 떠올랐다. 얼기설기 엉킨 여러 인물들의 죽음들의 한 뭉텅이, 폭력으로 얼룩진 불안들로 가득 채워진 도시. 이것이 필자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도시의 모습이다.

 

P.S. 과거 에드워드 양의 영화를 보다가 당혹스러웠던 순간이 있었다. 이 감정의 출처는 <하나 그리고 둘>과 <타이베이 3부작> 사이의 간극에서 발생된 어색함이었다. 필자가 처음 접한 에드워드 양 감독의 작품은 <하나 그리고 둘>(2000)이었다. 이어 그에게 매료되어 <타이베이 스토리>(1985), <공포분자>(1986),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 연달아 보면서 초기작으로 갈수록 영화의 온도가 싸늘할 정도로 떨어진다는 것을 느꼈다. 지독할 정도의 '냉혹함'. 심지어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요"라며 사람들의 뒷모습을 찍는 8살 소년 양양의 따뜻한 모습이 잊혀질 정도였으니, '감독은 절대 낙천주의자는 아니겠구나' 싶었다.

[글 오세준, yey12345@ccoart.com] 

사진 ⓒ ㈜에이썸 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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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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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아르》 영화전문기자 및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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