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페이 3부작]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 세상의 진실에 대한 이야기하기
[타이페이 3부작]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 세상의 진실에 대한 이야기하기
  • 배명현
  • 승인 2020.09.15 16: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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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A Brighter Summer Day 1991, 237분)
감독 '에드워드 양'(Edward Yang)
사진 ⓒ ㈜리틀빅픽처스
사진 ⓒ ㈜리틀빅픽처스

빛과 어둠, 시대와 충동, 세대와 규범. 그 외 영화가 다룰 수 있는 모든 것이 녹아있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영화를 '어떤 시각'으로 접근해야 하는지보다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가 더 중요한 작품일 것이다. 영화는 시작부터 백열등을 켜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필라멘트는 붉게 빛을 내지만 어둠이 가득한 방을 밝음으로 채우지 못한다. 영화의 시작은 빛으로써 희망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닌 역부족, 혹은 희망에 다다르지 못한 그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으로 읽힌다.

그 때문에 영화 속 대만에서 희망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영화는 일본의 식민지를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시기를 조망하며 대만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불안 그리고 그 시류 속 평범한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 어른들은 무능하고 무기력하다. 아이들은 어른의 흉내를 내며 자신들의 조직을 만들고 대립한다. 그 혼란의 시기 한가운데를 영화는 조망한다. 그리고 그 급류에 휩쓸려 일어난 미성년자 최초의 살인 사건을 다룬다. 영화의 주인공인 샤오쓰와 밍은 서로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였으며 둘 모두는 '시대'라는 진범의 희생자였던 것이다.

처음으로 돌아가 영화를 반추하며 한가지 가정을 해보자. 대만의 대외관계가 안정되어 전쟁과 거리가 멀었다면, 그래서 허니가 해군을 가지 않았다면 이 살인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아니 그 이전에 소공원파와 217파가 생겨나지 않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기에 영화의 결말은 우리에게 이상한 울림을 준다. '밍'(양정이)을 살해한 '샤오쓰'(장첸)는 왜 대학에 지원했을까. 감독은 합격자 이름을 나열하는 목소리를 영화의 엔딩크레딧과 함께 넣었을까. 그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대만의 맥락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영화가 물리적인 한계 때문에 담지 못한 맥락을 영화의 마지막은 함축하고 있다.

대만은 역사적으로 복잡한 정체성을 가진 곳이다. 수많은 나라의 식민지로 인해 그들의 국가적 정체성은 확고하게 잡히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 와중 공산당을 피해온 중국의 이주민과의 대립 그리고 반공이라는 이름의 혼란은 윗세대를 무기력하고 무능력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억압된 존재였다. 그 때문에 영화에서 보여주는 새로운 세대. 그러니까 젊은 청소년들은 그런 어른들에게 실증을 느끼고 자신들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반항적이고 폭력적인 청소년. 그들은 어딘가에 속해지길 바랐고 결속되길 바랐다. 홀로 서는 것은 위험을 이야기했으니까. 그 때문에 이들은 강해 보일 필요가 있었다. 자신들을 과장되게 꾸며 어른처럼 행동했으며 거칠게 행동한다.

 

사진 ⓒ ㈜리틀빅픽처스
사진 ⓒ ㈜리틀빅픽처스

소공원파와 217파의 전쟁을 어둠으로 찍은 것은 아마도 이들에게 닥친 상황을 은유하기 위함이었을지 모른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위태로움과 불안. 서로를 죽일 정도로 분노하지만 대체 왜 이렇게까지 싸워야 하는지는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아이들. 이들 사이에 샤오쓰가 있다. 그는 손전등을 들고 다니며 빛을 비춘다. 세상의 어둠을 비추며, 어른들은 가지 않는 곳에 오르며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려 하지만 그조차 어렵다. 애초에 손전등은 그의 것이 아닌 영화감독의 물건이었다. 그가 아무리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다 한들 세상은 어른들의 논리로 이루어진 곳이다. 그가 들어가 균열을 낼 틈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그 무너진 욕망의 결말에 밍이 우연히 서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샤오마와 달리 부모의 '빽'이 없는 샤오쓰는 '급'의 차이를 무의식적으로 느낀다. 남자들과의 관계로 자신을 지켜온 밍은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알았다. 때문에 밍은 샤오쓰가 아닌 샤오마를 택했던 것이다. 샤오쓰는 무너진 욕망 앞에서 복수하고자 칼을 든다. 하지만 그 길에 밍이있었다. 이 사건의 시작을 어디로 보아야 하는 것일까. 샤오쓰의 개인적 동기? 아니면 소공원파와 217파? 그전에 어른들과 청소년들의 세대 갈등? 그보다 전에 있던 국가적 혼란? 아니 그 이전에 또 그 무엇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 영화가 다룰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다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는 현실을 모두 담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명징하게 보아야 할 부분들을 조명한다. 거기에 더해 우리가 보지 못한 부분까지도 능동적으로 탐색하게 만든다. 그의 영화 속에서 싸구려 영화를 만들던 감독에게 샤오쓰가 화를 낸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세상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이쁜 배우를 찾으려는 감독. 단지 팔아먹을 영화를 만들려는 영화인에게 그는 영화로 일갈을 날리고 있었다. 에드워드 양은 영화가 담을 수 있는 '진실' 그 모든 것을 말하려고 했던 것이다. 에드워드 양에게 영화란 그런 것이었다.

그렇다면 영화의 끝에 샤오쓰의 합격은 어떤 의미였을까. 샤오쓰는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더이상 바깥의 세상일이란 의미 없는 것 따위일지 모른다. 그러나 샤오쓰는 대학에 지원하였다. 그리고 합격했다. 이 순간 내레이션의 목소리는 너무나 사실적이라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앞과 뒤 수없이 나열되는 이름 중 무심코 나오는 그의 이름. 이 목소리는 새로 녹음한 목소리가 아닌 실제 인물이 합격했을 때 호명된 이름일 것이다. 그리고 실제 샤오쓰도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을 겪고도 대학에 지원하고 합격하였다.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세상에서 그는 발버둥을 쳤다. 더 나아갈 수 없는 곳에서도 그는 필사적으로 무엇이든 한 것이다.

에드워드 양은 그의 행동에서 어떤 감동을 받은 것일까. 대만의 희망을 그에게서 본 것은 아닐까. 어둠 속에서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치던 그와 그의 세대들에게서 말이다. 다행히 2019년의 대만은 에드워드 양의 걱정처럼 묵시록의 세계로 치닫지 않았다. 지금은 없는 이 감독에게 나는 또 희망과 진실을 보는 법을 배웠다.

 

P.S. 어떤 영화는 이름만으로 그 깊이를 글로 담아내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내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처음 만난 건 한국에서 첫 스크린 개봉을 했던 17년이었다. 그 후 몇 번의 기회가 주어져 영화를 다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에 대해 글을 써볼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아직 나의 역량과 경험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였다. 때문에 탄탄하진 못할지라도, 그 동안 담아온 에드워드 양에 대한 존경과 웹진에 대한 책임감을 함께 이 글에 녹여보았다.

 

[영화웹진 코아르CoAR 배명현 영화전문 에디터, rhfemdnjf@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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