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 에스터] 공포가 가져다 준 것
[아리 에스터] 공포가 가져다 준 것
  • 배명현
  • 승인 2020.09.13 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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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 에스터'(Ari Aster) 감독론

'공포영화'란 점프스퀘어와 피갑칠한 분장 그리고 영혼이 깃들었다는 소재 등으로 대표되는 장르로 오해되지만 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대상과의 부지불식간의 대면-그리고 이후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으로부터 극대화되는 감정을 포착하는 것에야말로 그 본연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근래 그 본래의 의미를 가진 영화를 찾기란 너무나 어려워졌고, 호러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영화들은 갖추어야 할 기본적 정의마저 퇴색시킨 채, 점점 더 마니악한 비주얼(극단적인 고어 혹은 고어와 접목된 미스터리 혹은 공포인 척하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코미디 영화...)에 집중하고 있다. 점프 스퀘어의 남용으로 짜증나는 영화만 늘고 있으며 효과적인 시각 연출을 표현할 능력이 부족한 감독들은 화면에 피를 덕지덕지 발라놓고 관객이 공포스러워 하기를 기도한다. 또한 한 번 먹힌 소재가 언제까지 먹힐까 실험이라도 해보려는 듯 일절, 이절, 뇌절을 거듭하는 프렌차이즈 영화는 기대조차 못 하게 만든다. 공포영화를 보러 들어갔다 졸고 나오는 경우 도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장르가 그러하듯 호러라는 장르에도 구원자가 도착했다. 아리 에스터(Ari Aster)는 호러라는 장르를 완벽하게 이해한 동시에 자신만의 방법론으로 장르를 훌륭하게 변주할 줄 아는 감독이다. <유전>(2018)으로 장편 데뷔를 했을 때부터 찬사를 받았으며 특히, 수준 미만의 양산형 영화로 사망선고를 받기 직전이던 오컬트장르의 팬들로부터 각광을 받았다.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악마적 영향으로부터 느끼는 공포감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하지만 결국 벗어날 수 없다는 결론을 통해 무력함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인간의 유약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과학의 진보를 믿었던 근대 이후에도 여전히 유용한 오컬트적 요소와 소재는 여전히 강력한 종교적, 영적 위력을 보여주며 미지에 대한 인간의 무의식적 두려움을 영화를 통해 다시 한번 상기 시킨다.

 

사진 ⓒ (주)팝엔터테인먼트
사진 ⓒ (주)팝엔터테인먼트

때문에 <유전>과 가장 연결 짓기 쉬운 영화는 역시 오컬트 영화의 고전이라 평가받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악마의 씨>(1968)>일 것이다. 사랑하는 배우자와 함께 들어가 살게 된 아파트의 거주자 모두가 악마 숭배자들이었고 자신이 잉태한 아기조차 악마의 씨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영화. 이를 통해 우리는 잘 안다고(혹은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지점을 경유한 공포감은 당시 영화계에 놀라운 파장을 일으켰고 공포영화의 틀로 자리 잡게 된다. 개인주의가 극단적으로 발달하던 당대의 시기에 주어졌던 문제의식은 영화를 넘어 현실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52년 후 유전은 놀라운 변주를 보여주게 된다. <유전>을 통해 영적 힘이 전달된다는 전제를 달아둔다. 그리고 이 가족에게 일어나는 사건이 어떤 우연이나 불운한 사고가 아닌 정해진 운명이었다는 것을 결말에서 보여준다. 인물들은 각자 살기위해 움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움직임은 자신의 목을 조른다는 것과 종국에는 이 모든 게 덫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영화가 끝난 순간엔 깨닫게 된다. 이들은 RPG게임에서처럼 정해진 수순을 따라갔을 뿐이고 결국엔 불운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 것이라고.

<악마의 씨>가 제시한 공포가 알 수 없는 타인이라면, <악마의 씨>의 DNA를 이어받은 <유전>은 타인은 여전히 위험한 동시에 인간에게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은 없으며 우리는 이 비관적 숙명론의 철저한 관찰자라는 사실을 관객에게 알려준다. 아니 어쩌면 여기서 끝나면 다행일지 모른다. 영화의 시작에서 미니어처를 통해 영화라는 세계로 들어갔다면 영화가 끝난 후엔 반대로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이 때 느껴지는 것은 우리 또한 미니어처의 복제품일지 모르며, 우리 또한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작고 불행한 숙명론의 희생양일지 모른다는 암시이다. 요컨대 냉소가 느껴진다는 말이다. 아리 에스터의 시선엔 냉소가 있다.

 

사진 ⓒ (주)팝엔터테인먼트
사진 ⓒ (주)팝엔터테인먼트

<미드소마>(2019)는 어떠한가. 이 작품은 <유전>에서 보여주었던 어둠의 이미지(보이지 않고 알 수 없는 이들)이 아닌 낮의 이미지(보이는 것과 이미 알고 있는 것)를 다루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닌 잘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것. 하지만 이 두 영화에는 공통점이 있다. 영화를 끝까지 관람하면 영화 전체를 설계한 흑막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유전>에선 파이몬 숭배 모임의 ‘조앤’ 이라면 <미드소마>에선 호르가 마을의 펠레가 있다. 이 둘은 인물들을 자신들의 세계 속으로 초대하는 자들이다. 이들의 초대에 있어 희생자(주인공)는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두 영화 모두 그렇게 되기(희생)를 영화 시작 전부터 결정된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파이몬이 선택한 가족과 호르가가 선택한 희생양이 이루어지기에 이 두 영화는 공포 영화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두 공포가 시사하는 점이 드러난다. 바로 자유의지의 무용함이다. 희생자들은 그 어떤 선택을 하든지 게임판을 만들 이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괘 안에서 벗어 날 수 없다.

마치 이 세상이 돌아가는 시스템 안에서 단 한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불행한 공포를 간접적으로 우리는 마주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보자. 자본주의로 인한 배금주의가 팽배해진 사회에서 우리는 늘 일하고 재산을 늘리는 데 고민한다. 때문에 우리의 선택은 늘 유효하며 자신의 선택이 재산을 늘릴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다. 실패를 하더라도 이 실패를 통해 배운 교훈이 자신을 더 나은 곳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 믿는다. 이 믿음은 다음 선택 원한이 있을 때 유효한 가정이다.

하지만 아리 에스터의 영화는 그 반대를 이야기한다. 그 어떤 선택을 하던지 정해진 구조와 시스템이 정해진 대로 움직일 뿐이라고 말이다. 이 불쾌한 은유는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공포심을 가져다준다. 영화에 동의를 하는 순간, 그러니까 우리의 무용함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의 미래는 암울해질 것이고 부정하자니 우리는 자본주의 시스템 그 너머를 상상해 낼 수가 없다. 아리 에스터의 냉소는 그렇기에 더욱 두렵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다음영화가 악몽 코미디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세 번째 영화가 어떤 사유 길을 따라갈지 궁금해진다. 지금까지의 냉소 대신 조금의 희망을 비출 날이 올까, 아니면 더욱 비참한 세계를 조망하는 칼을 갈아 와 우리의 목을 썰지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사진 ⓒ (주)팝엔터테인먼트
사진 ⓒ (주)팝엔터테인먼트

[영화웹진 코아르CoAR 배명현 영화전문 에디터, rhfemdnjf@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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