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의 여름밤' 사소하면서 강렬한
'남매의 여름밤' 사소하면서 강렬한
  • 선민혁
  • 승인 2020.09.08 22: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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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남매가 다마스에 이삿짐을 싣고 이동한다. 운전하는 아버지와 조수석의 딸, 뒷좌석에 앉아 고개를 앞으로 내민 막내의 모습을 카메라는 정면에서 담는다. 다마스는 도로를 달리고, 오묘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오프닝 장면에서부터, 나는 이 영화에 매료될 것을 예감했다.

<남매의 여름밤>의 내러티브는 전혀 자극적이지 않다. 방학을 맞아 할아버지의 집에서 머물게 된 남매가 일상을 보낸다. 극적인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인물들의 행동이나 감정이 과장되게 표현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영화가 보여주는 일상들은 강렬하다. 어디선가 본 것 같기 때문이다. 다른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나 이야기가 나온다는 뜻이 아니다. 이 영화는 내게, 마치 내가 실제로 겪은 적이 있는 것만 같은 이야기들을 담담하게 건네 준다. 마치 내 기억 한편의 어느 순간들을 이 영화가 알고 있는 것처럼.

 

사진 ⓒ 그린나래미디어

친척의 집에서 느낀 편안함과 낯섦, 가까우면서 멀게 느껴지는 사람들. 한밤 중 목격하거나 전해 듣게 된 친척의 치정싸움. 여럿이서 만들어 먹는 국수와 갑작스러운 부고 등, 영화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지만, 기억 한편에 자리를 공고히 지키고 있던 유년시절의 순간들을 절묘하게도 매우 사실적으로 드러낸다. 이로 인해 우리가 묻어두었던 사소한 순간들은 들키게 된다. 우리는 <남매의 여름밤>에게 그 순간들을 들킴으로써, 사소하고도 개인적이었던 그것이 보편적인 것이 되는 경험을 한다. 숨겨두었던 무언가를 들켰는데, 이상하게도 위로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어떤 따뜻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사진 ⓒ 그린나래미디어

우리가 기억의 어느 편에 묻어두었던 사소한 순간들을 담담하게 드러내는 <남매의 여름밤>은 가족이라는 관계에 대해서도 가감없이 이야기한다. 이 영화에서 가족은 분명히 매우 따뜻한 것이다. 힘들 때 위로가 되어주며 즐거움도 슬픔도 함께 나눈다. 누나 옥주(최정운)와 남동생 동주(박승준)는 티격대면서도 서로에게 한없이 의지하며 남매의 아빠(양흥주)는 자식들을 위해 자존심을 굽히고 누구에게든 넉살 좋게 행동할 준비가 되어있다. 남매의 고모(박현영)는 옥주와 동주에게 다정하며 오빠를 위해 기꺼이 많은 것을 양보해왔고 자세한 사정을 듣지 않고도 이해해줬다. 할아버지(김상동)는 말씀은 많이 없어도 자식과 손주들을 감싸주며 존재만으로도 그들에게 큰 위로가 되어준다.

 

사진 ⓒ 그린나래미디어
사진 ⓒ 그린나래미디어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가족은 그저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다. 어른 남매는 늙은 아버지의 의사는 묻지 않은 채 그를 요양원에 보내려 한다. 어른 여동생은 어른 오빠에게 "이 집, 오빠 꺼 아닌 건 알지?" 하며 아직 살아있는 아버지의 집을 팔자고 하고 어른 오빠는 수용한다. 이러한 결정을 알게 된 어린 누나 옥주는 분노하여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아빠에게 따지지만, 너도 아빠의 물건을 훔쳐서 팔지 않았냐는 아빠의 응수에 말문이 막힌다. <남매의 여름밤>이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가족의 부끄럽고 처연한 얼굴에 우리의 말문 역시 막히고 만다.

좋은 표현이란 무엇일까. 적어도 영화에서는 관객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면 그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관객들은 감동하는가. 극적인 서사, 독창적인 연출, 격정적인 감정 이런 것들 보다 때로는 충실한 기록 혹은 담담한 재연이 더 충격적이고 강렬할 수 있음을 <남매의 여름밤>은 증명한다. 1시간 45분의 러닝타임 동안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기억인가, 싶었지만 가족들 사이에 있는 내 모습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꿈일 것이다.

[글 선민혁, sunpool1347@gmail.com]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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