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넷' 크리스토퍼 놀란식 문제적 이미지
'테넷' 크리스토퍼 놀란식 문제적 이미지
  • 오세준
  • 승인 2020.09.07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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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쓸모와 고민
사진 ⓒ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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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고, 혼란스럽다. 영화가 끝났을 때, 오직 이 두 가지 감정뿐이었다. <테넷>의 '시각적 스펙터클'은 분명 감탄스러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왜 감탄해야 했는지' 납득될 만한 이미지들이 머릿속에 뚜렷이 남지 않았다. 필자의 이해회로가 이토록 불안해진 것에 대해서 '영화의 시각적 체험을 즐기지 못했다'에 대한 반성적인 태도가 오로지 눈에 비치는 세계(영화)가 아닌 온전히 '나의 능력적 한계'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놀란 감독이 아이맥스 카메라를 역방향 촬영이 가능하도록 개조해 영화로 펼쳐낸 '역순된 움직임의 시각화' 자체로 놀랐어야 했는지. 어쩌면 '이해하지 말고 느껴야 한다'고 말했던 놀란 감독의 충고를 무시했기 때문인지. 결국, <테넷>을 감상한 경험에 따른 감정을 해석하지 않으면, 다시 <테넷>으로 돌아갈 수 없는 어떠한 지점에서 고민이 필요했고, 그 고민의 대상이 분명 내가 끌어당기지 못한 특정 이미지에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극 중 오슬로 공항의 '프리포트'에서 '주도자'(존 데이비드 워싱턴)가 인버전된 자신과 싸우는 액션 시퀀스는 총 두 번이다. 두 시퀀스의 '반복'에는 '캣'(엘리자베스 데비키)을 살리기 위한 사정을 제외하면, 주도자와 더불어 관객에게 '복면을 쓴 남자의 정체가 주도자 자신이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뚜렷한 목적을 가진다. 이런 나름의 반전!?을 제외하면, '액션' 자체의 움직임은 어색하고 기괴하다. 격렬한 충돌이 주는 쾌감이 아니다. 타격이 연속적으로 상쇄되는 탓에 어떠한 효과도 주지 못한다. 이는 '시간을 역행하는 이미지'에 대한 수용의 문제다. 인버전된 인물이 보여주는 움직임을 이해해야 하는 단계 이전에, 그 움직임이 보여주는 역동적이고 결렬한 몸짓을 소화해야 하는 관객의 시각적 체험의 한계에 따른 어려움이다. 이것은 마치 진한 향을 가진 커피 찌꺼기처럼 그 쓰임(관객에게 보여짐)이 다했음에도, 진하게 머릿속에 남아 더욱더 혼란스럽게 만든다.

 

'무엇'을 위한 어트랙션인가?

앞서 언급한 이러한 문제적 이미지!?는 시각적인 스펙터클을 충분히 전달함에도 인상적이지 못한 수준의 것이다. 알다시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뛰어난 액션'을 자랑하는 감독은 아니다. 굳이, 마이클 베이나 잭 스나이더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사진 ⓒ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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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다크 나이트 시리즈>와 <인셉션>에서 드문드문 등장하는 맨손 격투나 몸싸움 등의 장면들은 영화 전체를 맵핑(mapping)했을 때, 여타 쇼트들과 밀접하게 붙지 않는 투박한 질감이다. 물론, 이 같은 부족한 액션 장면들은 아쉬움보다는 액션을 전문으로 하는 '세컨드 유닛'을 쓰지 않는 놀란 감독의 개성일 수 있다. 그래서인지 한 쇼트에 시간의 순행하는 움직임과 역행하는 움직임이 동시에 담긴 상황에서 느껴지는 당혹스러움은 '인버전'의 개념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 탓이 아니라, 각각의 움직임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거나 운용하지 않은 미숙함으로 다가온다. 전작들보다 비교적 컷의 속도가 빠른 것 역시 일종의 타개책이 아니었을까. 놀람 감독 스스로가 문제가 될 법한 지점들을 숨기기 위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에서 보여지는 인물들의 몸짓은 언제나 '시간'과 연관되어 있었다. <인셉션>(2010)의 경우, 꿈의 층위에 따라, 그에 따른 공간에 따라서 '인물들의 움직임'이 시간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현이 되었고, <인터스텔라>(2014)는 여러 행성에서의 주인공들의 움직임이 각각 우주선과 지구라는 공간에 위치한 동료와 가족들의 노화로 하여금 '상대적인 시간의 차이'를 보여주는 변화의 원인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테넷>은 한 공간에 다양한 시간대의 움직임을 담아내면서 감독이 짜놓은 플롯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면 인물들의 행위나 움직임이 관객에게 완벽히 닿지 않는 어려움을 자아낸다. 대표적인 예가 영화의 결말에 위치한 '10분 전투'일 것이다. 이 전투 장면은 혼돈, 그 자체다. '주도자', '닐'(로버트 패티슨), '캣', '사토르'(케네스 브래너)와 더불어 '레드팀'과 '블루팀'의 상황까지. 이것들은 영화의 시간을 구성하는 '시계태엽'으로, 교차편집을 통해 서로 맞물리는 듯 굴지만 영화의 서사를 따라오지 못한다면, 관객의 눈에는 각각 인물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상황(공간과 시간) 안에서 독립적인 존재로 비추어진다. 그 순간, 그들의 '합'이 나타내는 어트랙션은 단순한 구경거리로 전락할 뿐이다. 그리고 관객은 관찰자가 아닌 구경꾼으로 위치하게 된다.

 

사진 ⓒ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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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테넷>에서 '역행하는 이미지'는 어떻게 수용해야 할까. 주도자와 닐이 탄 'BMW 승용차'를 역행해서 쫓는 사토르의 '아우디 SUV' 장면을 보면서 '역행하는 차량의 움직임'의 놀라움보다는 "왜?"가 먼저 떠올랐다. 이때 이 인버전된 이미지(시간을 역행하는 이미지)의 존재에 물음을 가지게 된다. 하나는 노벨상 수상자인 발 록스돈 피치(Val Logsdon Fitch)의 물리학 이론(사물의 엔트로피를 반전시켜 시간을 거스르는 인버전)이 영화의 세계 안에서 구현된 환상이라는 점, 또 하나는 단순히 내러티브(플롯의 연결)를 위한 소모품이라는 점이다.

또 도플갱어처럼 존재하는 여러 시간대의 사토르는 알고리즘의 위치, 특정 차량, 호흡기, 아내인 캣의 상태, 상황에 따른 대사(목소리) 등으로 구분해내야 하는 점에서, 인버전이 가능케한 영화의 환상보다도 수많은 그의 이미지는 결국 내러티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유리된 존재라는 것을 더욱더 부각시킨다. 사토르의 환상은 내러티브를 제거하면 관객의 눈에는 이유모를 '환영'에 불과한 것이다.

즉, 시간을 역행하는 이미지는 '인지대상'(이미지)과 '인지주체'(관객) 사이에서 완전한 접촉을 일으키지 않는 모호함이 들어 있다. 이러한 역순행되는 이미지들은 놀란 감독의 의도와 다르게 스크린을 보고자 하는 관객의 눈 앞을 가린 셈이다. 그렇기에 관객인 우린 인버전된 움직임을 충분히 납득할 수 없는 곤란함에 쉽게 빠지게 된다. 여기에 영화 속 '사건의 인과관계'가 시간을 역행하는 이미지로 하여금 '결과-원인' 순으로 바뀌기에, 이는 분명 영화가 시간을 선행하는 대상을 좌우대칭으로 뒤바뀐 존재로 재현을 하는 정도로밖에 볼 수 없다.

또 '인버전 장치'의 쓰임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큰 틀에서 영화 속 '인버전을 가능하게 하는 기계'(이하 인버전 장치)는 당연히 '타임머신'과 같은 장치로 인식될 뿐이다. 이것이 최근 할리우드 SF영화에 나타난 '시간여행' 영화들과 차이를 두기 위한 도구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시간초월 장치를 통해서 과거로 돌아가 폭파 테러범을 찾는 <소스코드>(2011), 타임루프를 활용해 세계를 구하는 <엣지 오브 투모로우>(2014), 양자역학을 통한 시간여행을 펼치는 <어벤져스: 엔드게임>(2019) 등의 '시간회귀 서사', 더 나아가 '중력(gavity)'에 기반한 시간초월(5차원과 3차원이 연결된 공간인 웜홀)을 보여준 <인터스텔라>까지.

 

사진 ⓒ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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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놀란 감독이 경계하고자 했던 것은 '인버전의 구현'보다도 시간 SF 장르의 전형성을 비틀기 위함이 아닐까. 이에 따라 제한된 룰이 적용된 인버전 장치와 '시간을 역행하는 이미지'라는 결과물이 탄생하게 된 것은 아닐까. 과거의 과오를 되돌리기 위해 시간을 역행하는 '캣'과 주인공을 구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시간을 역행하는 '닐'은 관객인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모습이다. 캣을 구하기 위해서 시간을 역행하는 주도자의 모습까지도. 그렇다면 '시간을 역행하는 이미지'의 쓸모는 더욱더 없어지게 된다.

다만, 미국 영화사가인 '톰 거닝'이 전시성을 띤 초기 영화들에 대해서 "관객의 관심을 얻어내기 위해 기꺼이 자기 폐쇄적인 허구의 세계에 균열을 일으킨다"라고 말한 바와 같이, <테넷>이 품고 있는 다양한 시간대의 움직임이 보여주는 충돌은 전시적인 성격을 가진 초기영화의 어트랙션을 충실히 이행한 결과물이라는 점. 더욱이 인물과 사물을 역순으로 시각화하는 데 있어 놀란 감독이 기존의 메커니즘을 깨고 시각적 확장을 이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배명현 에디터는 "<테넷>은 거시적 형태로, 그러니까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은 그 시간 밖까지 생각해야 보이는 영화이다. 영화에서 설명한 대로 이야기하자면,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미래가 원인이고 그 행동의 결과가 현재에 일어난다는 것을 숙지해야, 이 작품의 진정한 성취를 볼 수 있는 영화"라며, "놀란의 성취는 영화적 시각화에 있다"라고 설명한다.(<테넷> 운명 혹은 현실 (1) - "이해하려 하지 말고 느껴라", 09.01, 코아르CoAR) 

그런데도 "<테넷>의 세계는 상식적인 인과율로 이해할 수 없다. 시간이 양방향으로 흐르는 눈으로 보고 나서도 상상하기 어려운 영화 속의 세계"라는 선민혁 에디터의 말에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은 왜일까.(<테넷> 일어난 일이 일어나도, 09.01, 코아르CoAR) 이는 필자를 괴롭히는 무수히 많은 질문들. 시간을 역행하는 이미지가 영화 전체에 어떤 질적변화를 일으켰는가. 시간을 역행하는 운동-이미지는 촘촘히 쌓이는 쇼트들 안에서 어떤 질적변화를 일으켰는가. 비선형적인 서사, 화려한 스펙터클 등이 관객의 능동적인 참여를 충분히 일으켰다고 볼 수 있을까. 시간을 순행하는 인물의 몸짓과 역행하는 인물의 몸짓을 한 화면에 담긴 놀란식 이미지는, 이 글의 소제목처럼 '무엇'을 위한 어트랙션인지, 그것이 효과적인 어트랙션을 발생시켰는지 조금 더 시간을 두고 고민해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P.S. <테넷>을 향한 조금은 비판적인 시선과는 별개로, 주인공이 흑인인 동시에 첩보원이면서 주도자인 설정 또한 '인버전'된 것이 아닐까. 주인공은 007(스파이)이면서 M(주도자 혹은 책임자)이고, 백인들의 전유물인 '할리우드 첩보영화'를 전복시켰다. 한마디로 흑인이 세계를 구했다. 또 Q(남성 과학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여성이 존재하고, 주로 본드의 섹스 파트너인 본드걸의 자리(조연)에는 홀로 자신의 적을 물리치는 한 여주인공이 위치해 있다. (심지어 '캣' 역을 맡은 엘리자베스 데이키는 무려 키가 191cm다. 모든 주인공들보다 크다.) 여기에 핵무기는 여전히 세계를 위협하는 대량살상무기이고, '테넷'이라는 조직 자체도 분명 'MI6'와 같은 기관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닐'의 존재가 더욱더 특별해 보인다. 물론, '로버트 패틴슨'은 정말로 잘생겼다.

 

사진 ⓒ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사진 ⓒ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코아르CoAR 오세준 영화전문 기자, yey12345@ccaort.com]

오세준
오세준
《코아르》 영화전문기자 및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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