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시간> 경계를 지우다
<사라진 시간> 경계를 지우다
  • 오세준
  • 승인 2020.08.26 02: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 '사라진 시간'(Me and Me, 한국, 2019, 105분)
감독 '정진영'
사진 ⓒ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형구'(조진웅), 사진 ⓒ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영화가 혼자 말하고 있더라고" 한 지인이 개봉 당시 <사라진 시간>을 보고 내게 한 말이었다. 당시 난 온‧오프라인으로 개최하는 영화제들의 수많은 작품 관람, 팬데믹에 따른 업무 위기 등으로 그 작품의 감상을 잠시 미뤄둔 상태였다. 한편으로, 그것이 단순히 배우 정진영의 감독으로서 첫 장편영화였던 터라 더 신경이 쓰였고, 또 별점테러에 대한 측은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 그런 반응에 대한 저항과 비판적인 시선도 있었다. 그리고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왜 우리는 정확히 눈에 보이는 대상만으로 세상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中에서

 

기억과 시간, 환상과 현실

위에서 언급한 한 지인의 말을 조금 뜯어보자. 영화는 말하고 있었고, 관객은 듣고 있었다. 그런데 영화는 관객의 존재 따위를 잊은 채 혼잣말을 한다. 이때 돈과 시간을 낸 관객에 대한 '영화의 태도'(혹은 기질)가 상당히 중요해진다. 설령 영화의 태도가 여타 영화들과는 다르다고 한들 그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까지. 이 판단에 따라서 영화가 '절대적 고독자'(관객으로부터의 외면)로 남느냐 아니냐가 갈린다.

어느 시골 마을. 한 교사 부부가 집에 불이 나면서 사망했다. 사건 수사 담당인 '형구'(조진웅)는 마음 사람들의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단서를 추적한다. 그런데 잠에서 깨고 나니 자신이 '교사'가 되어 있다. <사라진 시간>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다. 이전에 영화가 보여준 50분에 달하는 이야기는 제목 그대로 사라졌다. 이 순간 주인공 형구와 관객은 동일한 경험을 가진다. 결국, '이 사라짐의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영화의 골자인 것이다.

<사라진 시간>에는 '이상증세를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신내림'(빙의)를 겪는데, '밤'이라는 특정 시간에 자신이 누가 될지 모르는 불안함을 가진다. 즉, 이들은 낮과 밤이 엄격히 구분된 존재이다. 편의상 영화를 형구가 형사인 전반부와 교사인 후반부로 나눠보자면, 전자에는 교사 수혁의 아내인 '이영'이, 후자에는 '초희'가 위치한다. 중요한 건, '이 인물들의 범주에 '형구'가 들어가느냐 마느냐'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때 형구는 전반부에선 이런 증상을 가진 인물이 아니다. 후반부에서의 형구는 "몹쓸병이 있어서 결혼을 못 하신다" "어찌 될지 모르니깐 밤에는 가두어달라" 동네 주민인 '해균'(정해균)의 말을 통해서 전반부에서 등장한 '이영'과 같이 밤이면 이층에 가둬진 채 지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영화는 '이영'과 달리 '형구'가 빙의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곧 이 차이는 형구를 더욱더 모호한 존재로 만들면서, '어떠한 가능성'을 불러일으킨다.

가령 전반부에 등장하는 형사 형구는 환상이나 꿈과 같은 가짜이고, 후반부의 형구가 진짜이며, 그의 이상증세라는 것이 망상장애나 혹은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는 수준의 인지장애를 앓고 있다는 확신이다.

 

사진 ⓒ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사진 ⓒ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그러나 이런 추론도 한 가지 사건으로 무너진다. 후반부에서 형구는 끊임없이 전반부의 형구를 쫓는다. 자신의 아파트, 아내와 자식들과 전반부에 가지고 있는 모든 기억들까지. 그러나 후반부의 세계에서 '전반부의 형구'는 무(無)의 존재로, 반복적으로 부정당한다. 이런 상황에서 후반의 형구는 지금의 세계가 전반의 형구의 꿈이라고 결론 지으며, 이 악몽에서 깨어나기 위해 잔인하게 해균을 죽이고 그의 하우스에 불을 지른 채 도망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하우스는 불이 탔지만, 해균은 멀쩡이 살아있다. 심지어 형구를 만난 기억조차 사라졌다.

낮에 일어난 이 잔혹한 소동극은 후반부가 꿈이 아니라는 것과 동시에 또 다시 '형구'를 모호한 존재로 만든다. 여기서 관객인 우린 반대로 전반부가 후반부에 '꿈'이라는 가정을 던질 수 있다. 그러나 전반부의 주체는 수혁‧이영 부부라는 점과 이 부부를 제외한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담는 카메라의 의도성은 기어코 '꿈'이 아니라는 점을 거뜬히 거부해낸다. 전반부가 꿈이라면 자신이 형사라 믿는 형구에게 "부부와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왜 필요한지?"에 물음이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기어코 관객에게 구구절절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더욱더 그러하다.

<사라진 시간>은 같은 공간 안에서 한 인물에게 두 가지의 기억을 동시에 부여한다. 전반부가 이전의 기억이라 한다면, 후반부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들(동네 사람들, 직장 동료, 학생, 신분증과 같은 기록까지)의 기억이다. 즉, 형구는 감독의 의도로 전반부의 세계에서 강력히 박탈당한 것이다. 믿을만한 것은 자신이 경험했다고 확신하는 (전반부 세계에서의) 기억뿐이다.

 

경계선 지우기

전반부에서 해가 지는 마을의 모습을 바라보며 수혁‧이영 부부는 "날이 짧아졌어" "여긴 참 정확해"라고 말한다. 이와 비슷하게 후반부에서는 노란 단풍나무를 보며 해구가 해균에게 "겨울이 오려나 봐. 계절 바뀌는 건 참 정확해요. 그쵸"라고 말한다. 이 상투적인 대사들은 참 묘하다. 지나치게 이질적이다. 또 이러한 질감은 '부감'에서도 나타난다.

 

사진 ⓒ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수혁'(배수빈)과 '이영'(차수연), 사진 ⓒ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전반부에서 수혁과 수인이 끌어안는 모습을 위에서 아래로 담는 카메라의 시선 순간 창문을 넘어 마당의 문으로 향한다. 후반부의 경우, 형구와 초희가 원형의 탕에서 함께 몸을 담고 있는 모습을 위에서 아래로 담는다. 이때, 수혁‧수인 부부가 등장해 탕에 들어간다. 그리곤 전반부에 했던 대화를 다시 또 되풀이한다. 조금은 언캐니한 순간이다.

재밌게도 이런 질감을 가진 이미지는 <사라진 시간>에 다분하다. 이런 이미지들의 '중첩'은 끊임없이 전반부의 세계와 후반부의 세계를 이으려고 어필(appeal)하지만, 찰나일 뿐이다. 끝에 남는 건 낯이 익으면서 너무도 낯선 감정. 이건 형구와 관객이 동시에 가지는 감정이다.

이런 감독의 의도적인 연출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꿈과 현실, 평행세계와 같은 SF적인 세계관에 대한 설정이 아니라, 한 인물에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일 뿐이다. 우린 이미 경험한 바 있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서 그레고리 잠자가 어느 날 아침 눈을 뜨고 나니 벌레로 변한 것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 수많은 동화에서 나타나는 '마법의 힘'은 어떠한가.

<사라진 시간>의 어려움에는 영화의 세계를 기어코 관객의 세계로 끌어오려는데 발생한다. 이는 관습적인 인과관계에 대한 인식에 따른 어려움이기도 하다. 알랭 레네 감독이 앞서 말하지 않았던가. "왜 영화는 그동안 관습적이고 선형적인 이야기에만 매달렸는가?"라고.

 

사진 ⓒ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사진 ⓒ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관객인 우린 형구와 함께 '형사였던 형구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서 영화의 끝을 향해 달린다. 그런데 점점 형구의 뜀박질은 느려지더니 멈춘 채 더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관객은 아랑곳하지 않고 죽어라 달린다. 여기서 앞서 언급한 '영화의 태도'가 드러난다. 형구는 어느 순간 이전의 기억을 찾지 않는다. 학교에 출근을 하고, 아이들을 가르친다. 이런 모습은 악몽에서 깨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고 불까지 지른 모습과 정반대다. 이때 동일한 위치에 머물러 있었던 형구와 관객의 위치는 해체된다. 

형구는 후반부의 세계를 더는 거부하거나 저항하지 않는다. 그리고 형사인 형구와 교사인 형구를 구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형사였던 자신의 기억을 소각하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현상에 대해서 그저 인정할 뿐이다. 그는 자신에게 두 개의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그는 자신이 형사이기도 했었고, 지금은 교사일 뿐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는 어긋난 두 개의 시간을 매듭짓는다. 환상과 현실, 현실과 현실, 환상과 환상 등의 구분을 허물고, 시간의 흐름을 선형적으로 되돌린다.

감독이 하는 일은 딱 하나다. 주인공인 형구에게 '두 가지의 기억(시간)을 불어 넣고, 그 경계를 조금씩 지워나가는 일', 관객인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영화의 주체인 형구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이다.

영화의 끝에서 왜 결혼을 하지 않았느냐는 초희의 말에 형구는 말한다. "결혼했었습니다"라고. 이 단순한 답은 사실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대사다. 그는 정말 결혼을 했을까? 그건 꿈이나 망상 같은 환상이 아니었나? 이런 질문이 여기선 더는 의미가 없다. 형구는 형사였던 자신도, 교사인 지금의 자신도 모두 '자신의 것'이라 믿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때 형구는 장자의 <재물론> 편에 나오는 '호접몽 이야기'의 장주와 오마주가 된다. "장주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꿈속에서 장주가 된 것인지 알지 못한다"는 구절과 같이.

 

사진 ⓒ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형구와 '초희'(이선빈), 사진 ⓒ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더 나아가 형구는 초희가 밤마다 빙의가 되어 자신이 누가될지 모른다는 아픔에 대해서 "나 그거 알아요. 그거 아프죠? 꽤 많이 아파요"라는 위로의 말을 건넨다. 이때 두 사람의 얼굴을 잡는 클로즈업과 교차편집은 마치 형구는 형구를, 초희는 초희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전달하면서도, 두 사람이 가졌던 '누군가를 만날 수 없다'는 믿음이 무너지고 서로가 마음을 건넬 수 있는 관계로 이어지는 순간이다.

어느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이 시퀀스의 구성이 특별해질 수 있었던 것은, 형구의 태도가 '자신에게 일어난 알 수 없는 변화'를 긍정하는 상태(그때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더는 구분될 필요가 없는 상태)이기에 특별해진다. 어쩌면 <사라진 시간>을 좀 더 곱씹어 봐야 하는 이유에는 결국 '형구의 몸짓'에 있다. 형사인지 교사인지 어느 것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을 죽이고 스크린 밖으로 뛰쳐나올 듯 도망치는 형구의 이미지는 어느새 타인을 자신의 집에 초대해 직접 음식까지 만드는 모습에 이른다. 그렇게 그의 움직임은 '판단중지' 상태로 무한히 수렴한다.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관객인 우리가 '영화의 혼잣말'에 딴지를 걸어야 하는 것은 "왜?"나 "어떻게"가 아니다. 그쪽의 세계(영화)를 이쪽의 세계(현실)로 기어코 끌고 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주인공이 보여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변화하는 주인공의 태도는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등 영화 속 세계를 기꺼이 인정하는 주체를 통한 사유이다.

영화가 끝나고 형구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만드는 쪽은 분명 관객의 몫일 것이다. 혹은 이런 질문은 어떨까? "영화의 세계가 나의 세계였다면" 아마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영화'와 '현실'의 경계선이 지워지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영화웹진 코아르CoAR 오세준 영화전문 기자, yey12345@ccoart.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