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 릴리스' 수면이 가른 두 세계
'워터 릴리스' 수면이 가른 두 세계
  • 배명현
  • 승인 2020.08.21 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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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영화특별시SMC
마리와 플로리안, 사진 ⓒ ㈜영화특별시SMC

<워터 릴리스>는 셀린 시아마의 장편 데뷔작이다. 퀴어의 첫사랑을 담은 이 영화는 인물의 시선과 응시가 액션과 리액션으로 작동한다. 거기에 몸의 움직임과 촉감은 감정의 증폭제로 작용한다. 스크린 안에서 일어나는 세 인물의 희열과 열패감 그리고 그 사이를 부단히 오가는 사춘기 특유의 이해하기 힘든 행동과 언행은 영화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혹은 온전한 이해를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셀린 시아마의 작품 중 가장 훌륭한 영화를 말하라면 단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일 것이다. 시선과 응시가 너무나 명징하게 작동하는 그것은 관객의 안으로부터 불씨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불씨는 엔딩에서 폭발한다. 나는 그 폭발의 도화선을 <워터릴리스>에서 보았다.

<워터릴리스>는 세 명의 소녀가 첫사랑을 겪으며 진행된다. 시간의 순서로 진행되는 이 영화에서 이 세 인물은 결말로 갈수록 성장해간다. 누군가는 명확하게 '성장'이라는 단서를 선택할 수 있겠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묻고 싶어진다. 이들이 성장의 서사를 겪은 것이 아니라면 이들의 의미는 어디에 있냐고.

이들의 성취는 단연 '첫사랑'에 있지 않다. 수중발레 선수인 '플로리안'(아델 에넬)은 매혹적이다. 주인공 '마리'(폴린 아콰르)는 플로리안의 춤을 감상한다. 여기서 마리는 플로리안에게 자신의 정체성과 성애를 한 번에 찾으려 한다. 어떤 방식으로 그 둘을 찾아야 하는지 모르는 마리는 플로리안을 복잡한 감정으로 바라본다. 분노하기도 하고 하지만 그 분노는 얼마 가지 못한다. 첫사랑의 맹목성은 누구도 저항할 수 없다.

플로리안이 버린 쓰레기를 집으로 가지고 와 향을 맡는 페티시적 행위, 수중발레 연습 이후 몸이 닿는 샤워 등 마리는 이런 감정이 처음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런 행위가 처음인 것은 분명하다. 동성을 좋아하는 여성으로서 어떻게 주체를 형성할 것인지, 어떤 욕망을 실현시킬 것인지, 관계를 어떻게 형성시킬 건지를 고민하는 장면을 감독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스크린 위에 띄워진 마리의 마른 몸과 불안한 시선은 늘 어떤 장소에 머물고 싶어하지만 감독은 늘 그녀를 다른 장소로 이동시켜놓는다. 이 쇼트체인지는 분명 잔인하지만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훈련이란 점에서 불가항력적이다. 애정이 담긴 매라고 보아야할지도 모르겠다.

 

플로리안과 마리, 사진 ⓒ ㈜영화특별시SMC

플로리안은 아름다움의 형상이다. 물속에서 다리를 휘젓고 물구나무를 서면서 화려함을 뽐내는 동작들은 팀을 이루는 동시에 완벽하게 합이 맞아야 한다. 외적 규합과 가장 가까운 존재이다. 수중발레 무대 이전에 존재하는 여성으로서의 규율(겨드랑이를 매끈하게 제모하는 것-코치는 겨드랑이를 제모하지 않은 선수에게 남편 앞에서도 그럴 것이냐고 꾸중한다)과 그녀에게 매력을 느끼는 남성들 사이에서 불만을 느낀다. 하지만 그녀는 이곳에서 벗어날 생각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녀에게 헤프다고 지적하는 동료 선수들에게 '나는 그걸 즐긴다'고 이야기한다. 그녀는 마리와 안을 포함 한 세 인물 중 가장 신체적 움직임을 보여주지만 가장 적은 내적 변화의 결과를 보여준다.

'안나'(루이즈 블라쉬르)은 어떠한가. 그녀는 자신이 욕망하는 남학생이 있지만 그는 늘 아름다운 플로리안 곁에 있다. 그녀의 겉보기는 가장 어른스러우나 장난감을 얻기 위해 어린이 세트를 주문하고 선물할 목걸이를 훔치기 위해 입속에 넣을 정도로 어린이스럽다. 그렇기 때문일까. 안나가 마리와 다툰 후 홀로 수영장에 있는 모습은 웃음을 유발한다. 이런 유아적 욕망의 발현 의지는 계속해서 일어난다. 벗은 채로 문을 향해 팔을 벌리기까지 하는 그녀는 결국 남학생과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그건 그녀가 아닌 플로리안의 대체라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두 번째 성관계 기회가 이루어질 때, 남학생의 입에 침을 뱉는다.

마리와 안나는 수영장에서 부유한 몸을 띄운 채 눈을 감는다. 둘은 팔과 다리를 벌리고 서서 서로의 몸에 의지한다. 몸의 반은 물속으로 반은 공기 중에 띄워 놓는다. 그 경계에서 온전히 둘만의 공간을 만든 것이다. 영화 속 일련의 경험들이 이 두 인물에게 '소녀'로서의 극복이라면 시아마의 근작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소녀 이후의 존재적 물음과 약간은 더 성숙한 사랑의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 일 것이다.

 

마리와 안나, 사진 ⓒ Balthazar Productions

물론 이곳의 공간이 여성들의 평등한 세계 구축이란 의미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시아마는 영화와 함께 나이를 먹은 것 같다. <워터 릴리스>(2007)-<걸후드>(2014)-<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으로 말이다. 물론, <톰보이>(2011)를 빼고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이 영화는 '톰보이'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이니 약간은 맥락이 다르다고 해야겠다.

 

데뷔작에서부터 자신의 세계를 명확하게 인지한 뒤 밀고 나가는 감독이 얼마나 있을까. 그녀는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우리가 왜 이러지?'라고 뒤늦게 느낀 적이 없어요. 왜 그러는지 늘 알았어요"

그렇다. 그녀는 왜 이런지에 대한 이야기 대신 늘 그 이후의 이야기를 했다. 정체성에 대한 불안 그 이후의 결정 말이다. 그녀는 그것을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나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후 시아마의 영화가 보고싶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사진 ⓒ ㈜영화특별시SMC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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