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백' 법의 쓸모
'결백' 법의 쓸모
  • 오세준
  • 승인 2020.08.07 17: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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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결백’(Innocence, 한국, 2020, 110분)
감독 ‘박상현’
사진 ⓒ ㈜키다리이엔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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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에 이런 말이 있지 않나.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 <결백>의 관람이 딱 그런 모습이다. 잔인한 말이지만, <결백>은 코로나19 여파로 침체한 극장가에 여러 차례 개봉을 연기한 끝에 스크린에 모습을 비춘 순간까지만, 이 작품이 가진 '결실'의 끝이다.

<결백>은 유명 로펌의 에이스 변호사 '정인(신혜선)'이 아빠의 장례식장에서 '농약 막걸리 살인사건'이 일어났음을 알게 되면서, 유력 용의자인 치매에 걸린 엄마 '화자'(배종옥)를 직접 변호해 '진실'을 파헤치는 이야기다. 여기서 '진실'은 상당히 어설픈 존재로 자리한다. 결과적으로 작품 전체라 해도 무방한 '숨겨진 비밀'에 해당하면서 동시에 재판을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키'(Key)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필자가 이것을 '어설프다'고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에 대한 물음은 딱 하나다. "'이것'의 존재는 어디로 향하는가"(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진 ⓒ ㈜키다리이엔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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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이야기

영화의 시작은 상당히 흥미롭다. 검은색 차가 상가집 입구로 들어오면서 차 문을 열고 등장하는 '추 시장'(허준호)의 존재와 그의 궤적을 따라 원테이크로 장례식장 안을 보여주는 카메라의 역동적인 움직임은 분명 관객의 시선을 집중케 한다. 더욱이 '추 시장'을 도지사로 치켜세우는 분위기, '카지노 설립'에 대한 대화, 그와 함께 술을 마시는 친분있는 일당들의 정체, 맛이 상한 막걸리까지. 즉, 추 시장과 함께 술을 마시는 모두가 이 지역의 '카르텔'이라는 사실을 뚜렷이 보여준다.

여기서 '추 시장'의 행동이 '조문'이 아닌 '인사치레'라는 것을, '영정'이 아닌 '술잔'으로 먼저 향하는 점에서 느낄 수 있다. 그와 함께 술을 마시는 자들도 추시장을 통한 자신들의 이익을 계속해서 꺼내는 것으로 보아, 이들 모두가 죽은 자에 대한 '애도'가 아니라 '마땅한 죽음'에 대한 마지못한 인사쯤인 듯하다. 이런 이해관계를 한 컷에 담아내는 감독의 카메라가 대뜸 '화자'(배종옥)에게 향하고, '농약이 든 막걸리'를 마신 추 시장과 4명의 지인들이 갑자기 쓰러지면서 영화는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다. 사실 영화는 '이 장면'에서 모든 것을 다 보여줬다.

3분여 가까이 추 시장과 일당들을 담아내는 의도적인 연출, 누가 봐도 그들은 지역 내 기득권층이다. 죽은 자를 애도하는 공간에서 이들의 자유분방함은 그들이 영화 속에서 스스로 "우리가 적대자요!"라고 공공연하게 떠드는 꼴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이 왜 '농약이 든 막걸리'를 마셔야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우연히 마셨다기보다는 '누군가의 복수'였다는 점은 확실히 알 수 있다. 여기서 범인이 정황상 '화자'가 분명하지만, 그녀가 치매에 걸린 탓에 확신할 수 없는 상황. 이때 '정인'(신혜선)은 엄마인 '화자'의 변호사임을 자처해 사건의 내막을 밝혀낸다.

검찰이나 경찰이 아닌 '변호사'가 사건의 진범을 찾는 '정인'의 위치는 영화 <성난 변호사>(감독 허종호, 2015) 속 변호사 '호성'(이선균)과 같다. 그러나 '후자'는 "이기는 게 정의지"라 믿는 검찰 출신 변호사가 한 살인 사건의 유력 용의자를 변호하면서 자신이 잘못됨을 깨닫고 검찰과 공조해 나아가지만, '전자'는 치매가 걸린 자신의 엄마를 범인으로 단정짓는 무능한 경찰과 부패한 검찰을 상대로 홀로 사건을 해결해 나아간다. 여기서 중요한 차이는 변호사가 사건을 해결해야 할 동기, 즉 '변호사'라는 직업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다.

 

사진 ⓒ ㈜키다리이엔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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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백>에서 정인이 등장하는 순간, 영화가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하는 이유는 그녀의 목적이 '엄마의 변호'에서 순식간에 '사건의 범인을 찾는 수사'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더는 '화자가 막걸리에 농약을 탔냐 안탔냐'는 중요하지 않다. 아니. 애초에 정인의 용의 선상에서 그녀의 엄마는 없다. 그녀의 수사는 '사건의 본질'이 아니라 '엄마의 과거'를 쫓는다.

<결백>은 정인의 현재와 과거를 교차하여 진행한다. 현재는 추 사장과 주변인들의 소행이 '자신의 엄마'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과거는 자신이 왜 집을 떠났는지 보여준다. 영화는 엄마인 '화자'와 딸인 '정인'이 나란히 평행선을 달리는 듯 굴지만, 그 끝에는 서로 분명히 만난다는 꼬리표가 노골적으로 달려있다.

 

모녀의 복수

폭력과 학대를 일삼는 아버지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정인은 대학 진학을 위해 집을 떠난다. 그런 정인을 방관한 화자의 과거는 더 끔찍하다. 과거 추시장과 일당들은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서 당시 화자의 남편인 '춘수'를 물에 빠뜨려 죽인다. 죄책감 때문이였을까. 추시장의 일당인 동시에 '춘수'를 직접 물에 빠뜨린 '태수'(최홍일)가 정인을 임신한 '화자'를 거두어 키운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을 알게된 '화자'는 '태수'를 직접 죽이고, 이어 추 시장과 일당들을 죽이기 위해서 막걸리에 직접 농약을 탄다.

<결백>은 명백한 복수극이다. 태수의 죽음과 추시장과 일당들의 농약 막걸리 사건 모두 화자가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벌인 일들이다. 영화가 관객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모티브인 '청산가리 막걸리 살인 사건'이 아니라, 한 여성의 복수를 그리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 드라마를 지켜내기 위해서(터트리기 위해서) 엉성하고 얄팍한 수사물‧법정물을 이용한다. 영화에서 '정인'이 중요한 인물일 수밖에 없는 것은 엄마인 '화자'를 구원할 유일한 인물이 아니라 그녀 혼자서 수사도 해야 하고, 변호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분명 필자는 이런 '화자의 과거'가 영화 내에서 어디로 향하는지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다. 이것은 분명 결백할 리 만무한데도 '정인의 과거'와 만나서 '모녀의 화합'이라는 신파극을 형성한다. "피고인 여기가 어디입니까? 제가 누구입니까?" 치매에 걸린 화자를 향한 정인의 이 말은 '변호사와 피고인의 관계'에 대한 정체성을 묻고자 함이 아니라 엄마와 딸의 관계 다시 세우기 위한 시도이다. 그러면서 이 가족의 비극이 과연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 묻는다.

 

사진 ⓒ ㈜키다리이엔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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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의 선택'은 과거 추시장이 태수에게 벌인 금광사업에 대한 사기행각을 들추며(진실), 이에 따른 원한으로 태수가 죽기 전에 막걸리에 농약을 섞어 놓았다(거짓)고 진술함으로써 '화자'의 재판을 끝낸다. 이때 정인의 선택에는 "왜?"라는 물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온전히 엄마를 위한 탓이겠지만, 실상은 자신의 가족사를 비극적으로 만든 추시장과 태수에게 마땅한 복수를 벌인 것이다. 더 나아가 치매로 기억을 잃은 화자의 존재를 대신해 농약이 아닌 법으로 그들을 심판한 것이다. 즉, 진실로 사실을 덮어낸 셈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왜 '결백'(Innocence)하다는 것일까. 거짓 진술을 한 정인까지 포함에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은 '죄인'이다. 결백해야 할 인물들이 있다고 관객에게 피력하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두 모녀의 복수가 법정으로 가야 할 마땅한 이유가 있었는지. 법은 이 영화에서 판단이 아니라 정인의 말에 수긍만 할 뿐이다. 경찰과 검찰이 무능한 게 아니라 영화 속에서 법은 정인을 편애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법은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악당들을 소탕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이기에.

이는 이원태 감독의 <악인전>(2019)과도 비교해 볼 만하다. 조직 보스 '동수'(마동석)와 형사 '태석'(김무열)은 서로 공조하여 연쇄살인마 '경호'(김성규)를 붙잡는다. 이때 심문과정에서 '경호'는 이런 말을 한다. "만에 하나 제가 사형선고를 받는다고 해도, 저 어차피 안 죽잖아요"라고. 실제로 사형을 선고받지만, 죽지 않는다. 그러나 '동수'가 직접 교도소 안으로 들어가 그를 처벌하는 결말은 카타르시즘을 넘어서 '법의 쓸모'에 대해서 직설적으로 던져준다. 여기에서 '복수'는 단순히 개인의 원한이나 동료의 죽음보다도 '법이 하지 못하는 정의'를 행위자가 자신의 죗값을 마땅히 치르고서라도 교도소 안에서 행해야 한다는 법의 무능함으로 인한 또 다른 비극이다.

 

사진 ⓒ ㈜키다리이엔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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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전>을 비추어 보았을 때, <결백>이 놓치고 있는 것은 '현실성'이 아니라 '법의 존재'가 신파적 이해관계를 앞세워 유능한 변호사 혼자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법의 편애를 작동하도록 한 작품의 설정이 이상적이지도, 그렇다고 완벽한 복수를 이뤄내지도 않았기에 되려 무식하고 안일하게 다가온다는 점이다.

또 '무죄 입증 추적극'이라는 영화의 소개가 유독 불편한 이유는 한 사람의 정의가 법에 편승하여 개인적인 복수를 성공하기 때문이다. 이는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에서 백 선생에게 아이를 잃은 부모들이 그를 직접 죽이려는 순간의 가지는 윤리적인 딜레마와는 차원이 다르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이 인물의 선택에 대한 판단을 관객의 몫으로 두면서 '윤리적‧도덕적 판단'에 대한 딜레마를 전달한다면, <결백>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의미로든 판단할 수 없도록 가두어 두는데,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두 모녀의 화합을 통해서 가정의 비극사를 극복하고자 하는 '신파극의 정서'이다.

<결백>은 <또 하나의 약속>(2013)과 <재심>(2016)을 제작한 이디오플랜의 이노센스 3부작 완결편이라고 한다. 제작사 관계자의 따르면 "억울하게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을 지원하는 미국의 인권단체인 '이노센스 프로젝트'에서 힌트를 얻어 영화로 제작했다"는 동기로 시작됐다고 말했다. 어떤 이유든 <결백>은 지극히 개인적인 복수극에 '법의 권력'을 이용한 신파극이며, 법정 안을 가득 채우는 영화의 상투적인 이미지들로 영화의 장르마저 혼동케 하는 드라마임에 분명하다.

 

사진 ⓒ ㈜키다리이엔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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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아르CoAR 오세준 영화전문 기자, yey12345@ccoart.com]

오세준
오세준
《코아르》 영화전문기자 및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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